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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신하의 믿음

글쓴이 : 샬롯 지구촌 교… 날짜 : 2018-08-30 (목) 22:07 조회 : 65
설교일 : 2018년 8월 26일
설교자 : 임대문 목사
본문말씀 : 요 4장 46-54절





<요한 복음 446-54>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가나 마을에 머물고 계실 때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왕의 신하가 예수님에게 와서 자기 아들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가버나움은 가나와40 km키로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일로는 25마일정도 되죠. 저희 교회에서 콩고드 밀 몰 정도의 거리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왕의 신하의 이 간절한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좀 냉정하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이사람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전반적인 신앙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은 다른 민족들보다 표적을 구하는 성향이 많았습니다. 기드온도 하나님께서 사사로 부르실때에 표적을 구했던 것을 볼수 있습니다. 어떤 표적을 구했죠? ‘하나님, 양털 한뭉치를 타작 마당에 둘테니까 밤사이에 양털에만 이슬이 적게 하시고 주변의 땅은 마르게 하시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할 자로 세우신줄 믿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기드온이 한번더 요구하죠. ‘하나님, 이번에는 양털 뭉치를 마르게 하시고 주변 땅을 이슬에 젖게 하여주시면 제가 정말 믿겠습니다. 이 표적을 한번 더 본 후에야 기드온은 사사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표적을 구하는 왕의 신하를 보면서 예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하지만 왕의 신하는 이러한 예수님의 책망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또다시 간청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0절입니다. 50....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네아들이 살아있다’ 믿기지 않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왕의 신하는 믿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 왕의 신하가 집으로 가는 길에 종을 만나 아들이 살았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종에게 아들이 낫기 시작한 지가 언제인지 묻고는 그 나은 때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인 줄 알게됩니다.

이렇게 왕의 신하가 가진 믿음으로 인해 아들의 병이 낫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주 ‘백부장의 믿음’ 에 이어 ‘왕의 신하가 가진 믿음’ 에 대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며 은혜의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먼저 이 왕의 신하가 가진 배경에 대해서 이시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 왕의 신하 배경

어떤 주석가들은 이 왕의 신하는 당시 가버나움을 다스리는 헤롯왕 다음번에 위치할 만큼 큰 신분에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신분에 있는 사람이 그당시 30살의 이름이 없는 청년 한 사람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자기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기 때문이죠. 자기 아들 때문이 아니면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평상시 같으면 이 청년 예수를 상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병 들었고 백방으로 애를 써보았지만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이 죽어 갑니다. 아주 급하게 되니까 이제 뭐 체면이고 지위고 뭐고 할 것 없이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아들이 병들었다고 하는 이 사건은 매우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서 신분이 높은 이 헤롯왕의 신하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가서 무릎을 꿇게 됐다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비극처럼 보여도 그 비극처럼 보이는 그 사건을 사용하셔서 축복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죽어가는 아들 때문에 이 왕의 신하가 예수님앞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왕의 신하가 예수님앞에 오게 된 동기가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문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헤롯왕의 신하는 이전에 예수님을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문둥병자도 고치고 열병환자도 고치고 맹인의 눈도 뜨게 한다더라- 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말도 안돼! 그럴 리가 없어. 언제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것이 없는 법이야.그랬으면 이 일은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소문에 대해 믿음을 갖는 것도 중요한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나오고자 하는 그런 결심과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축복을 받은 사람은 다 그래요. 기생라합이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경험했나요? 아니죠. 소문을 들었던 것 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끌어내시고 홍해바다를 가르시고 건너게 하셨다. 그리고 뒤를 쫓아오는 바로왕 군사들을 몰살시키셨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40년 동안 인도하시고 보호하셨다. 그리고 만나로서 먹이시고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족속들을 모두 물리치고 승리하게 하셨다-.

이러한 소문을 이 기생라합이 듣고 믿었던 것입니다. 소문을 믿었어요. 그래서 두 정탐꾼에게 고백을 한 것입니다. 여리고 지역에 사는 맹인 바디매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맹인은 볼수가 없습니다. 귀로 듣는 것 밖에 없었어요. 평상시에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귀로 듣고 있다가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리를 들을 때 ”메시야여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도 소문을 듣고 믿고 예수님앞에 나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대부분 소문을 듣고 믿고 예수님앞에 나아옵니다. 이런저런 소문을 듣는 것이죠. 갑돌이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더니만 병이 나았대. 부자가 되었데. 사람이 변했다네. 이런 저런 소문을 듣고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기회가 생기면 교회에 나가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올 수밖에 없는 환경이 필요할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나와야 되는 환경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병이나 경제 상황을 사용하시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이나 친척, 가족을 통해 예수님앞에 나오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해서 주님앞에 나아오면 극복해야 할 단계가 있습니다. 그래야 온전한 기적을 경험할수 있고 성숙한 신앙으로 살아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왕의신하도 이런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이겨내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서론이 길어졌습니다만 이제 본론으로 이 왕의 신하가 가진 믿음을 살펴보십시다.

 

1. 감각적인 한계 극복(, 공간적의 차원)

이 왕의 신하는 주변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왔습니다.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온것이죠. 그런데 소문은 자기 경험이 아닙니다. 소문은 내 경험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경험입니다. 내가 본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본 것입니다. 나는 못 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꼭 보아야 되고 내가 경험해야 된다고 고집했다면 이 사람은 끝까지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표적을 믿는 믿음, 그것은 내가 직접 경험해서 믿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경험하지 않았어도 믿고 확신할수 있는 믿음이 필요함을 전제로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감각적인 한계, 즉 시간적이고 공간적이고 그리고 경험적인 차원과 부닥치게 되고 여기서 우리는 갈등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보아야 되고 내가 손으로 만져야 되고…… 그렇게 생각해서 내가 이해가 되어서 믿음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가 하늘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죽어봐야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기 전에 모르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절대 믿음을 가지고 생활할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은 내가 경험하고 알아서 가지게 되는 성격이 아닌 것 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환경을 초월하고 넘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간, 공간의 환경을 초월하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지난주 백부장의 믿음을 살펴보았지만 이 백부장은 예수님의 능력은 시간. 공간을 초월하시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니죠. 백부장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제까지는 괜찮았는데 이젠 너무 늦었어’ 라든지 ‘거기 큰 도시에서는 좋은 의사와 큰 병원이 있어서 병을 고칠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안돼’ 이런 시간과 공간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우리는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시, 공간적인 한계를 극복하게 할수 있게 되는 사건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처음엔 갈등하지만 극복하게 하시고 결국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왕의 신하도 소문을 믿고 왔습니다. 하지만 시 공간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49절입니다.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자기 아들이 죽기전에 같이 빨리 집에 가자’ 는 의미입니다. 시간이 늦기 전에 빨리 같이 가십시다는 것이죠. 이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0절 전반부입니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네아들이 살아있다. 가라...네아들이 살아있다는 말씀을 듣게 된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하지만 ’가라‘ 라고 하는 말에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같이 가야지 왜 나혼자 가는 것입니까? 이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일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듣을 때 ’아멘! 감사합니다’는 하기는 쉽습니다만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왕의 신하는 믿고 혼자 집에 갔습니다. 50절 후반부입니다. 50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왕의 신하가 혼자 집으로 갔나요? 사람들 눈에 보기엔 그렇겠지만 사실은 아니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함께 갔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네 아들이 살아있다’ 는 말씀입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갔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의 생활은 집으로 가고 있는 왕의 신하의 모습일수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의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동안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태는 바로 이 왕의 신하처럼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면서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왕의 신하가 집으로 가는 내내 불안할수도 있고 의심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나혼자 갔다가 아들이 낫지 않고 거의죽게 되는 상황에 있으면 어떻게 하냐‘ ’다시 돌아가서 같이 가자고 애원해볼까?‘ 라는 생각이 들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불안이 생길때마다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지면서 계속 길을 갔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리모트 컨트롤(remote control)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텔레비전에서 떨어져 있어도 텔레비전을 켤수 있음을 믿습니다. 이렇게 리모트 컨트롤의 능력은 믿으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능력이 리모트 컨트롤 보다도 못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주변환경이 힘들고 어려울 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면서 그 말씀으로 불안해지고 초조해질때마다 마음을 다지고 신앙생활 해나가시길 축원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말씀을 통하여 나와 함께 동행하고 내곁을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심을 내가 믿고 신앙생활해나가시길 축원합니다.

 

2. 인격적 한계 극복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는 귀족 출신입니다. 헤롯왕의 직속 신하인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귀족 신분의 사람이 그당시 사람눈으로 보기엔 별 신분이 없고, 초라하게 보이는 30세의 청년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급한 마음에 부탁하는 말투로 예수님에게 얘기를 했지만 사실 또 한편으로는 이 사람의 명령일수도 있습니다. "내 집에 와서 아이를 한번 봐 주게" 라고 하는 마음이 있을수 있습니다. "빨리 가십시다." 급한 마음이 있지만 그래도 왕의 신하의 신분에 조금은 권위있는 모습으로 요청할수 있을 것입니다.‘자네가 내집에가서 내아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주면 내가 섭섭지않게 보답해주겠네’ 라는 속마음이 담긴 요청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경험할려면 내 모든 인격과 신분의 한계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가서 부탁합니다. “지금 이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단다” 무슨 의미입니까? ‘기적을 베풀고 능력을 베풀어라‘ 는 것입니다. 이때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로서의 신분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탁이나 요청도 있지만 또 한편 어머니의 신분으로서 명령의 성격도 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여자여 아직 내때가 아니니이다‘. 이렇게 거절을 하신 것을 봅니다. 기적이 일어날려면 순서가 바뀌어야 합니다. 자기가 말하고 예수님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분이 상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순서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즉시로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죠. ’예수가 무슨 말을 하시든지 너희는 그의 말씀을 들어라‘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왕의 신하가 순종을 해야 하는 것이죠.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같이 집에 까지 가서 아들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줘야 하는데 예수님은 왕의 신하의 계획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때 이 왕의 신하가 잘한 것은 바로 믿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50.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지금 우리는 성경책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서 믿음의 환경속에서 보니까 그렇게 하는 거 당연한것처럼 보이지만 그 당시 그 환경을 생각해보면 다르게 생각하게 될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 눈에는 왕의 신하가 예수님과 같이 가야 하는 데 왕의 신하가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 왕의 신하가 ‘이런 주변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그래도 내 신분이 있는데...’ 라고 생각해서 그냥 버틸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할수도 있는 것입니다. "글쎄, 예수님, 살고 죽고는 잘 모르겠고 어짾튼 우리 집에 좀 같이 가보십시다. 내가 예수님 말씀을 믿지만 그래도 같이 가서 한번 기도해주세요" 이렇게 자기 주장을 내세울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자기의 처지, 자기의 경험, 자기의 신분 다 부정해 버리고, 다 내려놓고 다 비우고 깨끗한 마음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가라." 갔던 것입다. 그런데 그냥 혼자 간 것이 아니죠. 이 왕의 신하는 집으로 가는 내내 예수님이 하신 한마디 말씀 그 말씀만 믿고 갔던 것입니다. ‘네 아들이 살아있다’ 믿고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감상이 아닙니다. 믿음은 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으면 행동으로 옮겨져야 되는 것입니다. 믿고 요단강을 건너 갈 때에 강물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그때 이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갑니다. 동으로 가라는 건지 서로 가라는 건지 몰라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익숙하고 평안한 고향을 떠나서 이방 땅으로 나섭니다. 나서서 한참 세월이 지난 다음에 세겜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마."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믿음입니다. 믿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극복해야 될 것이 많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따라 순종해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이제 가야합니다.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기적을 보게 됩니다. 왕의 신하의 종들이 아들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가지고 왕의 신하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을 오늘 본문은 보여줍니다. 51절입니다.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신앙생활해나갈 때 영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말씀을 믿고 신앙의 길을 갈 때 주님의 천사가 응답을 가지고 오는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실 때 그것이 내 신분과 내 인격과 내 자존심에 상처가 되고 도전이 될수 있다 할지라도 과감하게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신앙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경험할수 있는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만나고 경험하게 될줄 믿습니다. 물론 그길은 힘들 수 있습니다. 왕의 신하처럼 불안과 의심과 두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에게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거절당한 실패한 사람일수도 평가 받을수도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길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간것에 있습니다. 그 믿음은 주변 환경을 초월합니다. 주변의 평가도 극복할수 있는 소망과 능력을 줍니다. 말씀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말씀과 동행할 때 곧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인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왕의 신하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감각적인 환경과 신분과 인격을 넘어선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주님의 말씀을 가장 우선 순위에 두었던 것에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언제나 이 왕의 신하처럼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심으로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면서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