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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글쓴이 : 샬롯 지구촌 교… 날짜 : 2018-12-03 (월) 09:59 조회 : 41
설교일 : 2018년 12월 2일
설교자 : 임대문 목사
본문말씀 : 요 4장 27-30절





<요한복음 427-30>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현재 우리나라의 자살률은oecd(경제협력개발 기구) 나라들 중에서 2위입니다. 그것도 13년동안 1위를 차지하다가 작년 2017년부터 2위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보건 복지부가 2016년도에 발표한 자살 직업군을 보면 무직과 집안 가사 그리고 학생 순이고 그다음에 서비스업종과 판매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자살률이 높은 것으로 나왔습니다. 직종과 나이층과 소득에 관계없이 다양하게 자살률이 분포되어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살아온 환경이나 배경과 성별이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는데 대부분 우울증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심리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우울 증세가 시작되는 출발점은 수치심에 있다고 합니다. 일반인보다 특별히 연예인들이나 서비스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주변인들이 내리는 냉정한 평가에 대해 민감한 수치심을 가지고 있다가 결국은 자살을 하게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수치심이 무엇인가 사전을 찾아보니까 ‘수치심이란 자아가 손상 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부정적 정서 상태‘ 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의 견해에 의하면 모든 생물들 중에서 인간만이 수치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여러분, 개와 고양이가 수치심을 느낀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강아지가 하룻밤 외도를 하고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가요? 고양이가 마루바닥에 오줌을 쌌다고 부끄러워 하던가요? 인터넷 동영상을 보면 가끔 다리 아래부분과 꼬리만 빼고 털이 다 깍인체로 돌아다니는 애완견을 볼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잘만 돌아다니더라고요. 만일 인간이 옷을 다 벗고 돌아다니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누가 온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이렇게 수치심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할수 있는 감정이라 할수 있습니다. 물론 종종 동물과 같은 사람들이 있기는 하죠. 하지만 대부분 정상적인 사람들은 동물과는 다르게 수치심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볼 때 수치심이 다 나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어떤 수치심은 인간에게 유익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연구자인 마리 파워스가 쓴 『수치심』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정당한 수치심, 건전한 수치심은 도리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관계를 회복하는데 ‘영혼의 신호등’이 되지만 잘못된 수치심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마저 깨뜨리는 ‘감옥’이 된다”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건전한 수치심은 자신의 한계를 알게 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지만 잘못된 수치심은 강박장애, 완벽주의, 열등감, 성격장애 등 모든 종류의 정신적 질병을 일으키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수치스러움은 있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하루는 다윗이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을하는 한 여인을 보고 시험에 들어 그여인을 데려다가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는 전쟁 중에 있는 남편을 최 전선에 내어 보내 죽게 만들었던 행위에 대한 수치와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죠. 왕이 되기 전에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서 블레셋으로 도망을 갔는데 블레셋 왕의 신하들이 자기를 알아 보았습니다. 그때 다윗은 살아남기 위하여 침을 흘리며 미친짓을 하면서 그 위기의 순간을 넘겼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까지 받은 다윗입니다. 그리고 어릴때는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물리쳤던 다윗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적국의나라에 도망가서 미친 짓을 했습니다. 다윗 자신에게는 이일이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로 마음에 새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다윗이 자신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수치스러운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인생에도 수치스러움이 있었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나안 땅에까지 들어왔다면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였어야 하는데 가뭄을 만나게 되자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내인 사라가 너무 예쁘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기 아내를 아내라 하지 않고 누이라고 부르게 합니다. 무슨뜻입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끌려가도 괜찮은데 나는 죽지 않고 살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남편의 자격으로서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수치스러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도 수치심 가운데 인생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사마리아 여인이죠.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이 여인을 만나 주셨기 때문에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 혹은 수가성 여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 도착한 시간은 정오인 낮 12시 이였습니다. 유대에서 사마리아 수가성까지는 걸어서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짧은 거리는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4시간을 걸어서 온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 상황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까? ? 18절입니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도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한 남자하고 동거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시대적 상황으로 보았을 때 이 여자가 남자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남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았겠지요. 버림을 받은 이유는 잘모르겠지만 남편을 다섯이나 두고 살았을 정도이면 주변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로인해 이여인은 수치감을 가지고 살아오고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추측할수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뜨거운 대낮에 물을 가지러 우물가에 나왔겠습니까? 그런데 이 여인이 우물가에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생수에 관하여 말씀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바로 메시야임을 드러내십니다. 26절입니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내가 그라. ‘내가 그동안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기다려왔던 메시야이다’ 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죄 많은 여인, 수치감을 살아가고 있던 여인이 메시야이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인생의 많은 허물을 가지고 수치심속에 살고 있던 이 여인이 물을 기르러 왔다가 구원자,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후 이 여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입니까? 29절입니다.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예수님을 만난 이 여인은 가장 먼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예수만 전한 것이 아니라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내가 행한 모든일을... 무엇입니까?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꾼 그 일 입니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죠?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나오지 않는 대낮에 물을 기르기 위해 우물가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일부러 사람들을 찾아가서 당당하게 이렇게 말 한 겄입니다. “내가 행한 모든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에 대해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내가 어떤 여자인지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나의 모든 과거를 다 알고 계시는 메시야를 내가 만났다. 어서 속히 와서 보라”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불과 몇 분만에..... 이렇게 사람이 달라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가 있었나요? 그것은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순간 자신의 모든 수치가 벗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말미암아 모든 죄책감과 수치와 부끄러움에서 해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해서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벗어지게 되는가 하는 내용과 그리고 왜 이 수치심을 벗어버리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1. 예수를 믿으면 왜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벗어지는가?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내대신 수치와 조롱과 모든 부끄러움을 대신해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믿게 되면 나의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와 죽음에서만 해방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결과인 수치와 부끄러움에서도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언제 최초로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면서부터입니다. 우리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수치와 부끄러움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는 순간부터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 7절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삼았더라"( 3:7).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삼았더라.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자 그 부끄러움을 가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한 다음 최초로 경험하게 된 것은 바로 수치와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증세가 심하게 되니까 나중에는 두려운 마음이 생겨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버리게 됩니다. 이후로부터 아담의 후손인 우리 인간들은 수치심을 숨기고자하는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에 대한 수치, 학벌에 대한 수치, 가난함에 대한 수치, 미모에 대한 수치 몸무게에 대한 수치. 그래서 이런 저런 수치들을 가리고 숨기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가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나오는 수치와 부끄러움은 무화과 나뭇잎으로는 완전히 가리워질 수 없습니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나뭇잎은 찢어져 버리거나 날라가 버립니다. 며칠만 지나면 나뭇잎은 말라 쪼그라들어 수치심을 가릴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어 쫓을 때 무화과 나무 잎 대신에 짐승의 피를 흘리게 해서 죽이고 난 후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힌 다음에 내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가죽 옷은 바로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입게 될 거룩한 의로운 옷을 상징합니다.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는 나자신의 수치를 가리울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의해서만이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이 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온갖 수치와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로마의 병정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긴 다음 자색 옷을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면서 예수님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성경을 보시면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좌우편 강도들도 예수님을 욕하였고 십자가 밑을 지나가던 자들도 예수님을 조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네가 정말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를 구원하여 보라” 라고 말하면서 비웃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온갖 수치와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대신하여 수치와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이 가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치심에서 떠나 자유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구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땅을 정복하기에 앞서 길갈에서 할례를 받게 하고 유월절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길갈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 5 9절입니다.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 5 9)

‘길갈‘ 이란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유월절과 할례를 지켜 행하는 자마다 애굽의 모든 수치가 벗어졌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잇습니다.

그렇다면 애굽의 수치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한 일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치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평범한 인간도 아닌 종으로 430년을 살아왔으니 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쉬운 예로 만일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남의집 종으로 지내오셨다면 자식된 내 입장에서는 수치스럽고 부끄러울수도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고 유월절을 지킴으로서 더 이상 애굽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관계가 새롭게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모든 수치가 벗어졌던 것입니다. 애굽의 수치가 떠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와 길갈에서 머물고 있는 동안에 할례와 유월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수치가 떠나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길갈’ 이라는 이름이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온 하나님의 자녀는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자라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음에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한 사람도 예외없이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애굽의 모든 수치가 벗어진 자들입니다. 애굽의 모든 수치가 떠나간 새로운 피조물들 입니다. 내게 그 어떤 수치와 부끄러움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뿌려지고 그래서 마음의 할례를 받으면 내게 있는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들이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침 안개가 사라지듯이, 하늘에 먹구름이 사라지듯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이 여인은 그동안 수치심과 부끄러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이 한 순간에 벗어지게 된 것입니다.

 

2. 우리 인간이 수치심과 부끄러움에서 벗어나는 일이 왜 중요한가?

우리 인간이 수치심과 부끄러움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일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것은 바로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자라야 가나안 땅의 풍요함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살고 있는 원주민을 몰아내는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길갈’ 이라는 곳에서 할례를 행하게 하고 유월절을 지키게 하셨던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길갈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원주민을 몰아내는 싸움을 할 때 전쟁에서 승리하여 땅을 정복해 놓고도 길갈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재무장을 하고 다시 전쟁터에 나가서 싸웠습니다. 그러니까 영적 재무장의 장소가 바로 길갈입니다.

그런데 그 길갈의 뜻이 뭐라고 했습니까?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라는 뜻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노예가 아닙니다. 질병에서의 노예도 아닙니다. 물질과 학벌에서의 노예도 아닙니다. 옛날에 내가 저질렀던 이런 저런 문제와 환경으로 인해 수치와 부끄러움의 노예가 아닙니다.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피로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이 벗어진 것입니다.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자라야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있습니다.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자라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 수 가 있습니다.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자라야 이런 저런 문제와 환경에서 오는 수치심과 죄책감에서 승리하며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영적인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자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자는 약속으로 주어진 풍성한 삶을 누릴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심령들마다 모두 애굽의 수치에서 떠나가게 되는 축복을 누릴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다윗이 강간범과 살인자라는 수치와 부끄러움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했나요? 아브라함이 아내를 팔아먹은 추잡한 놈이라는 주변 시선에 못이겨 번개탄을 피워놓고 수면제를 먹었나요? 그들은 모두 수치심과 죄책감을 떠나서 잘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오고 가는 세대들이 부러워하는 위대한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예수님을 만나 애굽의 수치가 떠났던 사람들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오프라 윈프리라는 여성입니다. 잘아시겠지만 이 오프라 윈프리는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여자입니다. 그는 인종차별주의가 극심한 미시시피주 가난한 흑인 출신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6살 때까지 외가에서 자랐습니다. 13살 때까지 파출부로 일하는 홀어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그후 19살 때까지는 다른 여자와 살고 있는 아버지 집에서 자랐습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하다가 가까운 친척한테서 성폭행을 당하고 미혼모가 되었습니다. 마약을 하고 난잡한 성생활을 하다가 소녀 보호소에도 출입하는 형편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오프라 윈프리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의 모든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벗어졌습니다. 그이후로 이 오프라 윈프리는 사람들이 자기를 흑인이라고 놀리고, 뚱뚱하다고 비난하고 마약을 한 여자, 어릴 때 사생아를 낳은 여자라고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 내고 자신을 비난하고 조롱힐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는데“ 그래요. 내가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누가 나를 정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나의 수치와 부끄러움이 떠나갔는데 누가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수치와 부끄러움이 무엇입니까? 학벌에 대한 수치입니까? 가문에 대한 수치입니까?, 은밀한 죄에 대한 수치, 신체와 외모에 대한 수치입니까? 물질에 대한 수치입니까? 신분에 대한 수치입니까?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의 대화나 관계 속에서 가지게 된 수치심입니까?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애굽의 수치에 대해 누가 말을 하거든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십시다. “그래서 그게 뭐 어짾다고?

요즘엔 악플 때문에 적잖은 사람들이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극단적으로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악플에 대해서 당당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그것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오히려 악플을 단 사람이 위축되고 숨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치심과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이 그 모든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대신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수치심과 부끄러움에서 떠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하기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성경이 기록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십자가에서 내대신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시면서 오늘도 내일도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며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