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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의 변화

글쓴이 : 샬롯 지구촌 교… 날짜 : 2019-09-16 (월) 09:27 조회 : 82
설교일 : 2019년 9월 15일
설교자 : 임대문 목사
본문말씀 : 요 3장 1-7절




<31-7>

 

1.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요한복음 3장과 7장 그리고 19장에서 나오는데 니고데모의 신앙이 조금씩 바뀌어지는 모습으로 나오고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맨먼저 니고데모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본문에 나오는 3장입니다. 1절과 10절입니다. 1.그런데 바리새인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10.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옛날 성경을 보시면 유대인의 지도자 대신에 유대인의 관원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서 그당시 이스라엘 최고위층에 해당하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이 산헤드린 공회원은 요즘 국회의원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니고데모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던 종교지도자이었고 또 부자이었습니다.

보통 니고데모와 같은 위치에 이르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기반을 적절히 활용해서 편안한 삶을 누릴려고 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훈계하고 가르치고 양육하는 위치에 있는 지도자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로부터 뭔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자신의 위치가 사람들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향한 목마름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름이 없는 청년 예수에게 밤에 찾아간 것입니다. 이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온 이유를 우리는 몇가지로 생각 해볼수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들의 자기를 바라보는 이목이 두려워서 밤에 찾아왔던 것입니다. 요한 1938절입니다.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일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 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이 아리마대 요셉은 마가복음 1543절을 보시면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니고데모 이야기는 바로 그다음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39절입니다. 39.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그러니까 니고데모와 아리마데 요셉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이후에도 유대인들의 눈을 의식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이전에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웠기 때문인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어둠에서 빛으로 찾아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3 21절입니다.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니고데모와의 만남에서 예수님께서 가장 마지막에 하신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어둠속에서 빛되신 자신에게로 나아온 것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설명하신 것이죠.

그 외에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온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당시 랍비들은 율법공부를 주로 밤에 하는 습관때문일수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짾튼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온 이유들 중에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바로 다른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서, 그리고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오는 모습 이 두가지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나는 이 모습은 바로 진리를 찾아 헤매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진리를 찾아 헤매는 동안에 여러 가지 장벽이 있습니다. 니고데모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장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그 장애물이 다를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이 장애가 될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의 신분이 장애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이미 가지고 있는 종교가 장애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모슬렘국가에서나 불교 국가에서는 그 종교가 가장 큰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그나라에선 자기의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찾는다는 것은 목숨을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한 행동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찾아 헤매는 니고데모의 모습에서 이세상에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은 바로 진리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진리는 바로 예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4 6절입니다. 6.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 , 진리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에겐 어떤일이 일어납니까? 이시간 예수님을 만난 니고데모의 모습을 통해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니고데모처럼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1. 거듭남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여기서 거듭난다 고하는 단어의 헬라 원어는 ‘아노덴’ 입니다. 영어로 born again 인데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아노덴’이라는 단어를 취하여 워싱턴 지구촌 교회서 사역하셨던 김만풍 목사님께서는 ‘아노덴 전도법’을 만들어 내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거듭남’ 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거듭나는 것을 점진적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신앙이 조금씩 자라면서 변화되어져 가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거듭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듭남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Burn again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용하신 거듭남과 니고데모가 생각하는 거듭남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아노덴이라는 단어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가 있고,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내려와서 거듭나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나는 것’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이렇게 묻습니다.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아노덴을 다시 태어나는 것, 어머니의 태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아노덴은 육신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태어나는 ‘아노덴’ 이라고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중요한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세상의 다른 종교는 ‘다시 새롭게’ 의 아노덴 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노력해서 새로워질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낮추고 채찍질하고 절제합니다. 인간적인 노력을 가지고 반복하고 반복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노덴’을 육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받아드립니다.

이 육신의 생일은 육적인 부모님이 낳아주셨는데 영적인 출생은 하나님이 낳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나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할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위로부터 받아드리는 종교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와 허물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해결될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위로부터 은혜가 내려질 때 해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노덴이고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어떻게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56절입니다.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물과 기름은 섞여지지 않는 것 처럼 육과 성령은 개별적입니다. 제 큰 딸 미소가 8개월때 한국에서이곳 미국에 왔으니까 미소는 한국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둘째, 셋째딸보다도 훨신 더 미국에 오래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미소는 영주권자이고 둘째 셋째는 시민권자 출신입니다. 왜요. 태어난 곳이 다르니까요. 이제 곧 시민권 수속을 밟을것이지만 시민권 수속이 끝나면 시민권자가 될 수가 있겠지요. 신분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요.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적으로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영적으로 태어날 수 있는가 하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성령은 그렇게 해석상에 문제가 없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지요.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내 죄값으로 대신 생명으로 치루셨다는 사실을 믿을때에 성령님이 그 사실을 믿는 자들의 심령에 내주하십니다. 이것을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1 13절입니다.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래요 우리는 예수님이 믿을때에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믿는자의 심령안에 내주하는 것입니다. 이 성령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물은 말씀이다 아니다 침례, 세례이다. 성령이다, 회개 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많이 해석을 하는 것은 말씀, 침례 그리고 회개입니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말씀을 받고도 회개함이 없이 형식으로 침례를 받는다면 거듭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말씀을 받고 회개를 했지만 삶에 진정한 변화가 없다면 진정한 회개를 했다고 할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 물로 거듭난다는 것이 말씀으로 인하여 거듭나느냐 말씀을 받고 회개를 했느냐 그리고 말씀을 받고 침례나 세례를 받았는냐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문제보다는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심령들의 중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을 때 내 심령이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말이나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침례를 받고 또 세상을 향했던 발걸음을 돌이키는 삶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하는 삶의 모습으로 나와야 하는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전에 예수를 믿는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갔지만 회개하고 난이후에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면서 세상을 살았습니다. 살아가는 방향이 바뀌어 진것입니다. 말씀을 듣을 때 내가 죄인의 괴수로다라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면서 방향을 돌이켰던 것입니다. 물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말씀을 들을 때 회개를 합니다. 이 회개는 방향을 돌이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부정적인 마음에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염려와 근심에서 평강과 화평으로 분열에서 화합으로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지식이나 형식으로 말씀을 보거나 침례나 세례를 행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지만 돌아서서 거짓말을 하고 남을 헐뜯고 다닌다면 진정한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회개하게 되면 성령충만해집니다. 회개를 하심으로 성령충만한 생활을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을 말씀을 듣었을때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음으로 다시 위로부터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믿는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내주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성령님이 예수님을 증거하십니다. 요한복음 15 26절입니다. 26.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성령이) 나를(예수를) 증언하실 것이요’ 성령님은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십니다. 성령님은 성령 자신을 증거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증거하십니다. 그럼으로 오늘날 성령 사역도 성령을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드러내어서 거듭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어도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성령사역인데 이상하게 성령 자신이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충만이 아니라 성령충만으로만 갑니다. 성령 충만이 곧 예수 충만이 되는 것이고 예수 충만이 곧 성령충만인 것입니다. 성령에 뜻에 순종하는 삶은 곧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요 그것은 곧 말씀에 순종하는 삶인 것을 알수 있습니다.

 

2. 성화과정

예수님을 만난 이후 니고데모는 점차 변해가는 모습을 우리는 요한복음 7장에서 확인해볼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니고데모의 모습은 예수님을 변호하고는 있는데 아직은 소극적이고 주변에 주어진 환경을 넘어서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그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사람들을 시켜서 예수를 잡아오라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예수를 잡으러 갔다가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는 메시지를 듣고 그 권위에 놀라서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너희들이 다 예수에게 미혹되었다고 그들에게 분노를 터트립니다. 그때 이 니고데모가 한마디 합니다. 요한복음 750절입니다. 50. 그중의 한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52.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지금 니고데모가 하는 말은 구약 성경 신명기1, 17장 그리고 19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당사자로부터 직접 듣고나서 그 사람이 행한 행위를 심사해야하고 그리고 판결을 나기전에는 그 사람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단정지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죠. 법정에서 그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직접듣고 또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신중하게 심사를 해서 이사람은 유죄다 아니면 무죄이다 판정을 내릴수가 있는 것입니다.그리고 판정이 나기전까지는 그사람에대해 심판할 수가 없다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지도 않고 그사람말을 직접 듣어보지도 않고 심판을 하는것은 율법에는 어긋난다는 말을 지금 니고데모가 하고 있습니다. 맞는말을 했지만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야 너도 한패냐 이렇게 말하니까 그냥 입다물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속으로 믿고는 있지만 어떤 환경이나 장애물을 만났을 때 쉽게 넘어지는 니고데모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난이후에 때로는 담대한 말과 행동을 할때가 있기도 하지만 주변의 반대나 장애물을 겪게 될 때 쉽게 좌절해버리는 모습을 가질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우리는 성숙해나가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힘과 능력은 내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부르시고 선택하신 주님께서 나를 끝까지 책임지시고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 있음을 우리는 어떤 환경속에서라도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인해 우리 믿는 성도의 성숙과정을 겪게 됩니다.

 

3. 헌신과정

결국 이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역을 다 마치시고 돌아가시고 난다음에 같은 산헤드린 공회원인 아리마데 요셉과 함께 예수님을 장사치르게 됩니다. 요한복음 19 39절입니다.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백 리트라는 75 파운드 정도 되는 무게입니다. 굉장히 많은 양인것이죠.

예수님이 죽기 전에 나서지 못했던 이 니고데모는 예수님 죽은 이후에 나섰던 것입니다. 이때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다 도망갔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아리마데 요셉과 함께 주님을 위해서 무대위에 나섰던 것입니다. 이때는 무대가 거의 끝나가는 장면인데 난데없이 두 사람이 무대위에 등장해서 주인공인 예수님을 위해 마무리를 하는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처음에는 다른 제자들보다 뒤처져 있었던 니고데모와 아리마데 요셉 이었지만, 아무도 나설 수 없었을때 그둘의 신앙이 빛을 발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이때가 바로 내가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되면 망설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헌신자는 다른 사람들의 눈이나 평가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니고데모가 만일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면 예수님이 죽은 이후에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고 그리고 최선을 다해 장사지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헌신하는 사람은 주변환경이나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주신 은혜만을 바라보며 섬김의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니고데모처럼 빛과 진리되신 예수님앞에 나아와서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니고데모처럼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주변 환경이나 이런 저런 장애물에 의해서 내자신이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할때도 있습니다. 세상 유혹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위해 살아가고는 싶지만 주님의 제자로서 영향을 끼치면서 살아가지 못하고 있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의 마지막엔 니고데모처럼 주변 사람과 환경을 넘어서는 헌신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 도망가버리고 예수님 혼자 외롭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을 때 그때 니고데모는 자신이 주님의 제자임을 담대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왜요? 산해드린 같은 공회원 신분이 아니면 빌라도 총독에게 시신을 내달라고 요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나 아리마데 요셉을 보면서 우리는 두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한가지는 성령님이 감동을 주실 때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게 주어지는 손해와 이득을 따지지 않고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주님에게 대한 봉사와 헌신은 늦음이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연극으로 본다면 주인공이 죽었으니까 다 끝난 것입니다. 주인공이 죽고난 뒤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 연극에서 서포트 라이트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니고데모와 아리마데 요셉의 헌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니고데오와 아리마데 요셉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가정해보십시다. ‘당신들이 이땅에 있는동안에 가장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면 무엇입니까?“ 그때 그들은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왜 내가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제자임을 밝히지 못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그분을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을 도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점이 이땅에 있는 동안 가장 아쉬웠습니다‘ 그래요. 주님에 대한 헌신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편 아무리 늦은 헌신이라 할지라도 때늦은 헌신은 없습니다. 무대에서 커튼이 다 내려가기 전까지는 그리고 우리의 생명이 다할때까지는 너무 늦은 헌신은 없습니다. 바라옵기는 니고데모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성령님이 감동주실때마다 순종하심으로 담대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갈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