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비폭력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Author
kgmcc
Date
2020-06-06 17:22
Views
576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에 있다. 기독교는 힘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변화됨을 믿는다. 칼로 대항하려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열두 군단(한 군단은 6000명)도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마 26:53). 그러나 힘으로 이기는 것을 포기했다. 이것이 사랑이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다. 굴속에 들어온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냥 내 보낸다. 이것이 성경적 사랑의 모습이다.

이 사랑에서 기독교 무저항주의가 나왔다. 무저항주의는 패배주의가 아니다. 니체는 기독교를 노예의 윤리라고 했는데, 크게 오해한 것이다. 사도행전 24장을 보면, 벨릭스 총독이 나온다. 죄수 바울에게 뇌물을 받으려고 수작을 부린다. 바울은 이런 인간 쓰레기에게 담담히 자신의 지내온 삶을 간증한다.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하며 자신의 주장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기독교 무저항주의란 무엇인가? 상대가 악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무저항주의는 정치적인 모습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드러난다. 어머니에게 묻는다. 1등하는 아들과 꼴찌하는 아들 중 어느 아들이 더 가치있는가? 아무런 가치 차이가 없다. 차이를 느끼면 어머니가 아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을 떠나 아들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사랑이다. 아내에게 묻는다. 돈 잘 버는 남편과 돈 잘 못 버는 남편 중 어느 남편이 더 가치있는가?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으면, 그건 진짜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다. 그러면 한번 더 묻는다. 악을 행하는 자와 선을 행하는 자 중에 누가 더 가치가 있는가? 아무런 가치 차이가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성도이다. 도둑을 죽여도 살인죄이고, 성자를 죽여도 살인죄이다. 인간의 가치는 동일하다.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그의 존재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 무저항주의이다.

폭력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폭력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저항주의는 폭력에 반응하지 않는다. 동시에 폭력을 행하는 사람의 가치는 인정해 준다. 폭력자는 자신이 가치 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상대는 자신의 가치를 여전히 인정해준다. 결국 견디다 못해 울부짖으며 무릎 꿇는 것이다. 간디나 마틴 루터 킹의 무저항주의가 바로 이것이다. 세상은 사랑하면서 저항하지 않는 사람 앞에 무너진다. 폭력을 행하는 자신을 계속해서 가치있는 존재로 인정해주는 사랑 앞에 무릎 꿇는다.

누구나 내 뜻대로 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하지만 욕망은 싸울수록 더 치열해진다. 욕망은 그냥 바라보기만 하라. 그러면 불쌍한 내가 보인다. 왜 돈만 추구하는가? 열등의식 때문이다. 상처 때문이다. 욕망을 그냥 바라보면, 상처입고, 깨진 불쌍한 내가 보인다. 그런데 그런 불쌍한 나를 여전히 가치있게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 앞에 무너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과 무저항이 나를 무너뜨린 것이다. 요즘 흑인 조이 플로이드 사망으로 인한 시위로 우리 주변이 시끄럽다. 대부분 평화 시위 중이지만 일부 폭력과 약탈을 벌인다는 뉴스를 접한다.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의 심령들을 아우를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는 진정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 출현이 절실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