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종류의 아픔

아픔을 극히 단순화 하면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1. 표현할 수 있는 아픔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쉽기만 한 인생은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아픔이 가장 큰 아픔인양 과장할 때가 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표현할 수 있는 아픔은 최악의 아픔은 아니라는 것이다. 맹인의 아픔이 있다. 그러나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외칠 수 있는 아픔이다. 앉은뱅이의 아픔도 큰 아픔이다. 그러나 ‘나를 걷게 하소서’ 라고 외칠 수 있는 아픔이다. 표현할 수 있는 아픔은 부족하지만, 그나마 당당함이 있는 아픔이다.
2. 표현할 수 없는 아픔열 두해 혈루증 앓은 여인처럼 자신의 병명을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아픔도 있다. 부정한 병이요, 환부를 보여주거나 말할 수도 없는 아픔이다. 말할 수 없어 예수님의 옷자락만을 붙들어야만 했다. "가슴이 타들어가는 아픔" 이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존경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실수인지, 범죄인지 성병에 걸리게 되었다. 아내에게까지 전염이 되었다. 아내의 충격은 대단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드러내 놓고 부부싸움도 할 수 없었다. 큰 아픔 속에서도 아무 일 없는 듯이 살아야 했다.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는 "아플 때, 아프다, 억울할 때, 억울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감사" 라고 말한다. 이세상에 이처럼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3. 아픔을 극복하는 길
사실 표현할 수 있는 아픔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표현해서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사람에게 말한 아픔은 더 큰 아픔, 더 큰 소문이 되어 자기에게 돌아온다. 사람에게 말한 비밀은 자신을 죽이는 칼이 되어서 돌아올 때가 많다.
우리의 아픔은 예수님께 가지고 가야 한다. 예수님께 아뢰야 한다. 예수님은 종종 우리를 빈손으로 만든다. 왜? 예수님 손만 붙들라는 뜻이다. 요즘 우한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쓰라림이 더한듯하다. 이럴때일수록 우리의 모든 아픔과 쓰라림을 가지고 예수께 가자. 그리고 차마 표현을 하지 못해도 괜찮다. 하지만 예수님은 붙잡아야 한다. 그것이 손이든, 옷자락이든지 무조건 붙잡아야만 한다.
거기에 치유와 안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