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한 고백

말하기는 쉬운데 막상 자신이 실제로 겪어 보면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세상만사다. 그래서 사람은 나이가 들고 철이 들어갈수록 타인이 겪는 일에 대해서 함부로 말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들을 만나 정답을 알고 있어도 선뜻 그 말을 못할때가 있다. 왜냐하면 어쩌면 그 사람이 정답을 이미 잘 알고 있음을 일단 간주하기 때문이다.
탁월한 신학자 C. S 루이스는 30세에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차분하고 통찰력이 넘치는 기독교 변증서들을 많이 썼다.
그의 나이 59세에 여류 시인 조이(Joy)를 만나 결혼하는데, 불과 4년 만에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한다. 그후 그는 자신 속에서 괴물처럼 일어나는 마음의 격랑을 좀처럼 다스리지 못한다. 그동안 냉철하고 깊이 있게 고통의 문제를 마치 메스를 든 외과 의사처럼 능숙한 솜씨로 다루던 사람이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그 고통이 자신의 문제가 된 경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슬픔은 게으른 것이라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일상이 기계적으로 굴러가는 직장 일을 제외하면 나는 최소한의 애쓰는 일도 하기 싫다. 글쓰기는 고사하고 편지 한 장 읽는 것조차 버겁다. 수염 깎는 일조차 하기 싫다.” 이런 고백으로 우린 그가 얼마나 처절히 고통속에 짓눌려있는지 알 수 있다. 철저하게 무력감에 짓눌린 자신의 모습 앞에 얼마나 정직한 고백인가? 하나님께 다가가면 나는 무엇을 얻는가? 그가 하나님께 느끼는 좌절감의 표현은 너무 솔직하다. 이전에 그가 고통에 대해 쓴 책이 무익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은 누구든지 약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믿음의 거인이라고 해서 비명도 지르지 않고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는 것은 아니다.
히스기야는 사면초가의 고통 중에 자신을 ‘아이를 낳으려 하지만 해산할 힘이 없는 여인’(사 37:3)에 비유했다. 머리로는 분명히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만, 그렇게 할 힘이 없다는 진솔한 고백이다. 중요한 것은 이 솔직한 고백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아무 문제가 없는 듯 자신을 포장하려 했던 아하스를 하나님은 괘씸하게 여기셨다. 말은 쉬워도 막상 우리가 겪으면 말처럼 쉽지 않다.
인생길에서 어두운 터널을 지날때는 솔직하게 하나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어린아이처럼 울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는 자라 할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