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야 할 말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NIV를 보면, 예수님이 “무시”했다 한다. “Ignoring what they said”(막5:36)
오늘날 교육은 타인의 말을 경청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경청이 매사에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무슨 말을 경청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쓰레기 같은 세상 말 다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들어야할 말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넘어가야할 말, 통과시켜야 할 말, 그걸 다 경청하면 인생은 황무지 된다. 비진리를 무시할 용기가 필요하다. 무시는 거절이다. 거절은 수락만큼 중요하다. “NO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boundaries)이라는 책이 있다. 무시를 통해서 확실한 “경계”를 세워야 한다는 내용이다. 경계없는 열심, 경계없는 집중은 다 허무로 흐른다.
심지어 죄가 된다. 왜 무시하지 못하나? 예민해서다. 타인들의 시선에 예민해서이다.
그래서 우울증, 대인기피증이 오기도 한다. 좋은 의미의 둔감력이 필요하다.
의사이자 베스트 작가인 와타나베 준이치는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에서 둔감력이 세상의 흐름에서 건짐받고, 스스로의 소모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길이라 강조한다.
그럼 뭘 들어야 하나? 말씀이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막5:36)
그래서 사람들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고 울며 심히 통곡한다. 과거의 상처가 지금을 결정한다. 반면 예수님은 미래와 목적을 말씀하신다. “죽은 게 아니라 잔다.” 미래의 살아남을 말씀한다. 다시 살게 될 목적을 말한다. 맹인의 눈을 고치시면서, 목적을 말씀하신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지금의 고난은 미래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세상은 “과거의 상처”에 집중하게 한다.
마귀의 정죄 시각과 매우 비슷하다.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고 과거의 상처를 넘어설수 있는 길은 단 한가지이다. 그것은 바로 오늘은 바로 미래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만을 인식하며 살아갈 때 가능하다. 주님의 말씀을 날마다 붙잡고 살아갈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늘은 미래를 위해 존재한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주의 음성 듣고 일어나라. 그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성숙한 자녀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시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