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하나님께 맏기라

나오미는 홀로 된 두 며느리에게 친정과 고향으로 돌아가라 한다. 왜? 내가 책임 못 진다는 뜻이다. 누가 나오미에게 책임지라고 했는가? 나오미는 다 잃었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히 맡겼다. 근데 왜 두 며느리는 은혜에 맡기지 못하는가? 따라나서는 두 며느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것(룻 1:15) 은 “신앙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나오미의 제안은 며느리를 생각한 연민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결국 영적으로 망하라는 뜻이다. 무책임한 피상적 위로에 불과하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자녀들을 맡기지 못한다. 자녀의 문제를 내가 책임지려 한다. 맡기면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그런데 내가 붙들고 있으면서, 눈물 흘리며 망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주는 가능성보다 하나님이 주는 가능성이 더 크고 무한하다는 걸 잊지 말라.
부모의 약함이 오히려 강함이 되곤 한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보호하지 못했다. 그래서 갈대 상자에 담아 하나님께 맡겨 버린다. 오히려 더 강력하게 양육 받게 된다. 요셉의 부모는 졸지에 아들을 잃었다. 요셉은 부모의 보호 없이 팔린 노예로 자라난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형통을 누리면서 성장한다. 내 손보다 하나님의 손이 더 강력하다. 맡기면, 은혜 안에서 자라게 되어 있다.
내가 책임지려하지 말고, 맡기라. 하나님께 맡기라.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37:5) 맡기면, 완성된다. 맡기면, 안식이 있다.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서 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 나의 어떠함이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전능자, 엘 샤다이)이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은혜에는 한 방이 있다. 부스러기 은혜도 우리에게는 큰 것이다. 나오미는 마라같이 쓴 인생이었다. 그러나 은혜의 부스러기를 체험하는 순간 회복인생이 된다. 마라의 쓴물에 한 나무를 던졌더니 단물이 되었다.(출15:25) 여기서 하나님은 스스로 “치료하는 하나님”(여호와 라파)이라 소개한다. 불치병, 깨진 관계, 무너진 경제상황, 답답함과 견딜 수 없는 정신적 압박이라는 쓴 물이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한 방은 그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역전 시킬 수 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전능자의 은혜를 만나라. 바뀐 결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내가 책임진다고 쥐고 있지 말라. 하나님께 맡기라. 완성과 풍성함을 곧장 체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