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계획을 따라

개척교회가 힘들다고들 말한다. 왜? 치열한 영적 싸움, 열악한 조건 때문 일수도 있지만 사실은 “실패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 “초라하게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듯하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사람의 시선과 판단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한다.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십자가 사명의 마지막 유혹이다. 사람들은 항상 전제를 깐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외친다. 자기를 증명하라는 말이다. 신분에 맞는 능력을 보여달라는 뜻이다.
세상과 마귀의 유혹의 패턴은 이와 비슷하다. 광야의 시험을 다시 살펴보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로 떡 만들라”(마4:3)고 외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마4:6)고 외친다. 뛰어내려도 천사가 도와줘서 안전하게 되면, 성공한 것 아니냐고 유혹한다.
나를 증명하고, 나를 입증하다 보면, 정작 주어진 사명을 저버리게 된다. 바로 이게 유혹이다.
주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 이기는 길이다. 내 뜻을 위해 사는 사람은 “되고, 안되고의 문제”에 매달린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그냥 따름”이 중요하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 떨어지는 것이면, 떨어지면 된다. 내가 지워지는 것이 뜻이면, 지워지면 된다. 내가 썩어지는 것이 뜻이면, 썩어지면 된다. 죽는 것이 뜻이라면 죽으면 된다. 그게 뜻이면 그냥 따르면 된다. 먼지같이 사라져도, 속된 말로 콩가루가 되고 분해 되어도 감사할수 있다. 결국 주님의 계획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주님 계획 이루어짐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가난하거나 병들면, 부끄러워하곤 한다.
가난, 병듦이 힘든 것인데, 부끄러워한다. 왜? 실패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바울도 육체의 가시가 실패자로 보이는 부끄러움이었던 것 같다. 3번이나 떠나가기를 간구한다. 응답이 무엇인가? 가난, 병듦, 이런 것들은 주님의 계획 이루는데 상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기고 만장해지지 않아서 더 좋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능력으로 일하기에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기뻐한다. 힘든 일이지만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적용된다.
실패자로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렴이 있을 때 주님의 계획하심만 바라보자. 주님의 계획에는 실패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