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용서 되어지는 길

Author
kgmcc
Date
2022-07-24 01:20
Views
85


 

우리는 용서를 힘들어 한다. 왜? 용서는 내가 하는 것, 내 결정, 내 의지,

내가 이를 악 물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한 것도 힘든데, 용서하라고 하니 더 아프고, 더 힘들어 지는 것이다.

용서는 내 성품과 내 인격에 호소하기에 3번도 힘들다.

베드로가 7번 용서한다고 했을 때, 그건 대단한 결심이었을 것이다.

용서가 힘들지만, 얻을 유익도 있다. “용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죄인이다. 용서받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용서해야 용서받는다.(마 18:35, 마 6:12)

용서해야 용서받는다. 그럼 용서가 행위인가?

이를 악물고 실천해야 하는 자력 구원의 덕목인가? 아니다.

용서는 상태에서 나오는 반응이다.

“사랑한다.” 그러면 안을 수도 있고, 질책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폐병에 걸렸다. 안타까워 포옹한다.

동시에 안타까워 질책할 수 있다.

왜? 계속 담배 피기에! 엄마가 아이를 사랑한다.

그래서 불속에도, 물속에도 뛰어든다. 사랑하면, 이보다 더 많은 일들이 다양하게 벌어질 수 있다.

헌데 실체를 모르면, 물속에, 불속에 뛰어들어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란 실체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오는 오해다.

만 달란트(10조원) 탕감 받았다. 은혜다. 실제라면, 까무러칠 정도의 감격이다.

탕감받은 그는 관대해 질 것이다.“용납”하게 될 것이다.

근데 100데나리온(천만원) 빚진 자의 멱살 잡고, 감옥에 넣는다.

관대함, 용납이 없다. 무슨 뜻인가? 그는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은혜의 감격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다.

크리스천은 탕감받은 은혜로 산다.

그래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용납하게 되는 것이다.

용납하는 관점에서 용서해야 용서가 쉬워질 것 같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