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기간에(3)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종으로 팔려갔다. 노예와 감옥 생활 등 견디기 힘든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20년이 지난 후 형들을 다시 만난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얼마든지 보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형들에게 용서를 선언한다. 요셉의 용서로 인해 야곱의 무너졌던 가정이 회복되고, 12명의 형제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는 기초를 마련하게 된다.
피해자가 좋은 이유는 무엇인가? 용서를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 때, 가해자는 결코 용서를 들먹일 수 없다.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용서는 오로지 피해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깨진 관계는 피해자의 용서가 있을 때 회복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용서할수 있는 것은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분이 태어날 조그마한 빈방 하나 마련해주지 못했다.
짐승들이 사는 말구유 장소만을 허용했다.
가장 위로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할 때 제자들은 잠만 잤다. 진작 같이 있어주어야 할땐 모두 다 도망쳤다.
한시름 놓게될 때 그제서야 제자들은 그분의 용서하심을 보았다.
몇시간후면 자기에게서 도망갈 배신자들의 발인줄 알면서도 정성껏 씻겨주신 자신들의 발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당신은 피해자인가?
용서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피해자의 용서만큼 강한 메시지도 없다.
약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평화의 선포와 용서하는 일이다.
세상에서 제일 보기 싫은 것은 피해자가 독해지는 것이다. 피해 입은 것도 불쌍하다.
그런데 그 이후 독한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무너지는 모습이 더 안타깝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향해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다.
피해자가 용서하는 것이 십자가 정신이다.
최근에 한국과 미국의 정치권에서는 정의와 경각심을 일으키겠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한편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는 차라리 피해자들의 용서하는 소리가 들려야 한다. 그래야만 모든 일들이 화평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사순절도 한주간이 남은 고난 주간을 지나고 있다.
내가 피해자 일지라도 피해의식보다는 용서의식을 실천해보는 고난주간이 되기를 염원해본다.
그럴때 부활이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