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주는 능력

성도 중에 죄짓고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타협하면서 초라하게 살고 싶은 사람도 없다. 그러나 술자리에서 굴복하고, 상관의 위협 앞에 넘어진다. 왜? 두려움과 부끄러움 때문이다. 동료들로부터의 따돌림에 대한 두려움, 진급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부끄러운일을 감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그랬다. 하지만 십자가 이후에 그들은 완전히 변했다.(요19:38-39)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제자였다. 그러나 유대인이 두려워서 숨어서 믿었다. 그런데 빌라도에게 공개적으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게 해달라고 한다.
니고데모는 밤에 찾아왔던 사람이다. 사람의 눈이 두려워서 밤에 숨어서 찾아온 사람이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위해서 몰약과 침향을 가져왔다. 십자가 이후에 공공연하게 예수님을 믿는 것을 공포한 것이다.
몇년전 미국의 인기 있는 노래 경연 프로그램인 ‘Voice‘ 에 특별한 환경에 처한 한 자매가 출연했다. 그 자매의 부모는 두 분 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장애인이었다. 그런데 그 딸은 어릴때부터 총명했고 애교가 넘쳤다. 장애인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같지 않은 분위기와 풍모가 있었다. 어린시절때 그 자매는 부모님만 생각하면 웬지모르게 부끄러움과 위축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부모님이 수화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엿보게 되면서 두분 가슴 깊숙이 있던 아픔을 보았다. 그날이후 이 딸은 부끄러워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살아가야 겠다고 결심했다. 이후로 그 자매는 당당하고 적극적인 삶을 살았다. 자신이 노래에 재능이 있음을 알고는 ’Voice‘ 프로그램에 나가 상위권에 진출했다. 그리고 부모님과 자랑스럽게 수화로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본 시청자로 하여금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 그리고 그 자매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극복했다. 왜? 아픔을 알았기 때문이다. 십자가 달린 예수님..., 그리고 부모님의 아픔을... ,진정한 슬픔을 알 때 우리는 담대한 행동을 하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보시면서 민망히 여기셨다(마9:36). 창자가 뒤틀려 아프실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셨다는 뜻이다. 십자가의 자리는 아픔과 긍휼의 자리이다. 아픔을 아는 사람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이길수 있다. 요즘은 아픔이 망각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아프리카 수단의 내전, 미, 중의 갈등..., 약육강식의 세상을 우리는 살아간다. 주변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아픔을 느끼며 살아가기가 점점 힘든 세상이다. 나도 모르게 점점 마음이 건조해지는 듯하다. 그럴수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그랬던 것처럼....,
내 주변에 일어나는 모습을 볼때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아닌 진정한 아픔으로 느끼며 살아갈수 있길 소망해본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담대한 결단과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