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현재의 중요성

Author
kgmcc
Date
2024-03-03 05:11
Views
118

 

요즘 미디어 발달로 알 필요 없는 것을 알게 될 때가 많다.

옛날 내가 관심 있었던 가수나 배우가 현재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면 구글에 검색을 해보면 알수 있게 된다.

그러다보면 몇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전보다 과거로 회귀해 오랜 시간을 낭비하는 경향이 있게 되었다.

헌데 우리가 성장할려면 현실에 뿌리를 내려야한다. 현실이란 현재와 그 의미가 일맥상통한다.

현재에 충실한 사람이 성장하게 되고 성숙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참 신앙인은 무엇보다 현재성에 관심을 가지고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예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계1:4)시다.

현재, 과거, 미래를 다 주관하시는 분이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 되신다.

헌데 적그리스도는 조금 다르다. 짐승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계17:8) 마귀는 “지금이 없다.”

이게 마귀 특징이다. 과거도 있다. 미래도 있다. 근데 현재가 없다. 마귀는 “현재성” 에 문제가 있다.

이단의 가르침에도 “현재가 없다.” 이단은 주로 과거적 해석을 한다. 문자적이다.

구약을 문자 그대로 지키라고 한다. 14만 4천을 문자 그대로 인식한다. 또 미래적 해석을 한다.

시한부 종말론이 그렇다. 현재를 포기한다. 미래만 바라보고 두 손 놓고 지낸다.

요한의 관심은 무엇인가? “주님이 언제 오시나?”가 아니다. “지금 깨어 있어야 한다?” 에 있다.

신앙의 현재성에 모든 것을 건다. 신실한 사람과 불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는 현재에 있다.

신실한 사람은 현재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을 낸다. 하지만 불성실한 사람은 과거나 미래적인 얘기를 주로 한다.

현재에 대해선 일부러 외면하는 경향을 보게 된다. 현실을 두려움없이 주시하고 극복해나가는 사람이 성숙한 자이다.

믿는 성도들은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그랬다.

‘마지막 날 부활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 마르다의 관심은 미래에 있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32)

반면 마리아의 관심은 과거에 있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어떠한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예수님은 관심이 늘 현재성에 있다.

참 신앙은 현재의 능력이다. 현재 능력이 지금의 삶을 바꾸는 것이지 과거나 현재의 능력이 삶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환경에 처해있던 현재의 삶에 충실하며 살아가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