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아래 산다는 의미

기독교인은 은혜 아래 살아가는 존재이다. 물론 은혜의 의미는 아무 자격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배려이다. 헌데 이것은 구원에 국한하여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구원에 대해선 내가 할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주님이 이루어놓으신 것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그 외 모든 일에 대해서도 조금 달리 생각해야 한다. 정말 내가 해야 할 일은 없는가? 내가 대충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게 잘 이루어지는가? 아니다.
율법 아래 사는 것과 은혜 아래 사는 것 중 어느 것이 편한가? 예상과는 달리 실은 율법아래 사는 것이 마음이 더 편하다. 처벌의 기준에 대해선 법을 지켰는가, 위반했는가만 따지면 된다. 예를 들어 교통위반으로 티켓을 받게 되면 벌금액을 내면된다. 그것으로 끝이다. 티켓을 준 경찰도 그것을 받는 운전자도 더이상의 갈등은 없다.
반면 은혜는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 있다. 구원하고 변화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있다 그래서 그렇게 만들어 내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기에 하나님은 “간섭”하신다.
이는 훈련소에서 훈련 교관이 막 입대한 신참병들을 일일이 간섭하는 것과 같다. 왜? 전쟁터에서 용감하고 담대한 군인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 목표는 쉼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빨리 될 수도 없다. 그래서 될 때까지 간섭하고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참 힘들고 괴로운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내 기분에 관계없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간섭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될 때까지 내게 간섭하고 또 간섭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이 결국 내게 선하고 좋은 쪽으로 이끌게 될 것을 믿어야 한다. 이긴 운동 경기를 다시보는 경험이 있는가? 이미 결과를 알고 있기에 순간 순간의 갈등과 위기의 순간에도 느긋한 마음으로 시청할 수 있게 된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짜릿한 기쁨이 있다. 왜? 그 경기의 끝을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왜? 끝을 알기 때문이다.
환난으로 시작하지만, 인내, 연단의 좋은 것을 다 받고, 마지막에는 소망으로 끝난다.(롬5:3-4)
은혜아래 살아가는 자는 그 길의 끝이 승리임을 알기에 위기의 순간에도 소망과 여유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