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아법의 정신

이스라엘에는 “페아법”이 있다.
밭의 모퉁이의 곡물을 남겨두는 법이라고 해서 ‘모퉁이 법’이라고도 부른다.(레 23:22)
가난한 사람, 나그네를 위해서 곡식을 다 추수 하지 않는 것이다.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고 포도원 열매를 다 따지 않는다. 열매가 떨어지면, 줍지 않는 법이 바로 “페아법”이다.
모압에서 돌아온 나오미와 룻은 이 “페아법” 때문에 양식을 구할 수 있었다.
“페아법”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약자에 대한 배려”였다.
이 전통으로 인해 오늘날 현대 유대인들에게는 기부금 문화, 구제 문화가 아주 일반화되어 있다.
헌데, 페아법은 현대의 구제보다도 한 걸음 더 나간 배려였다.
가난한 사람에게 생길 수 있는 “수치심”을 최소화 하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무너지면, 다시 일어설 힘을 모을 수가 없다.
오늘날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성도들중 가난한자를 구제하면 대부분 그사람은 그 교회를 떠난다.
왜?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숨기고 싶은 수치심이 외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작은 돈 받고, 큰 자존심의 댓가를 지불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제를 한 교회도, 구제를 받은 사람도 마음에 상처로 남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동기는 좋았는데 결과는 웬지 허무하다. 왜? 성경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 이름으로, 당당하게, 보란 듯이 돕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말씀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3-4)
이스라엘에 카루브의 나무가 있다. 이 카루브 나무는 가뭄이 들든 들지 않든 늘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가난하고 빈궁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흉년이들었을 때 이 카루브 열매를 먹으며 어려운 시기를 견뎌나가곤 했다.
또한 돼지 먹이로 사용했던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카루브 열매 대신에 쥐엄 열매로 표현하고 있다.
가난하고 빈궁한 사람도 열매를 다 따가지 못하고 페아법을 지켜야 하는 나무가 있는데 그나무가 카부르이다.
그래서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카부르 나무에 가면 그 열매만큼은 얻을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한번 더 생각해보자.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도 페아법을 지키기 위해 그 카루브 열매를 남겨두었다.
이 행위에서 빈궁한 사람도 자신의 자존심을 지킬수 있지 않았겠는가?
예수님이 병자들의 병을 다 고치신 후에 그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있다.
“나를 나타내지 말라”(마 12:16)
그리고 이어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말씀을 인용하신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 까지 하리니” (마 12:20).
페아법을 만드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믿는 성도들 만이라도 온전히 깨닫고 실천한다면
이세상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