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강해1-수요설교
<룻기 1장 1절>
1.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룻 4장 18절-22절>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이번 수요일부터 룻기 강해를 시작합니다. 아마 지금부터 2달 동안 8차례에 걸쳐서 룻기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될것 같습니다.
제가 이 룻기서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몇가지 있는데 짧게 설명해드리면,
첫째는, 일단 재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룻기를 공부하는 동안 지루하다는 느낌은 별로 갖지 않을 것 같습니다.
둘째는 룻기 전체 내용이 4장으로 되어서 그렇게 길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좀 지루해진다 싶을 때 끝납니다. 무엇이든지 좀 아쉬움이 있을 때 끝나는게 좋다고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사실 이것이 제가 룻기를 선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만. 이 룻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물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런 환경과는 좀 동떨어진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모세나 다윗 그리고 솔로몬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이고 다윗과 솔로몬은 지혜와 능력이 있는 왕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능력의 선지자입니다. 평범하게 살고 있는 우리와는 조금 동떨어진 사람들처럼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그들의 삶을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적용시키는 일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룻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정말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 룻기에 나오는 사람들중에 우리가 기억해야할 중요한 인물들은 세명입니다. 그들은 바로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입니다.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 이 세명이 살아가는 모습은 바로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룻기에 나오는 그들의 모습은 저와 여러분의 이웃집에 살고 있는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모습입니다.
나오미를 보십시오.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살기가 너무나 힘들어서 이방인의 나라에 이민 갑니다. 그리고 그 이민을 간 그나라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그만 남편이 죽습니다. 그래도 이 나오미는 자기에게 두 아들이 있기 때문에 그 두 아들을 의지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두 아들을 그나라에 살고 있는 이방 여인들과 결혼시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이방인의 나라에서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 살아가게 되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두 아들도 그만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우리 주변에서 종종 일어납니다. 그동안 그렇게 고생을 하다가 이제 좀 살만한 것 같은데 남편이 죽어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종종 봅니다.
그리고 룻을 보십시오. 룻은 이방나라의 여인입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하루는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며늘아, 이제 나는 더 이상 이나라에서 살기 싫다. 남편도 죽고 아들도 죽고 없는데 내가 여기 이방인의 땅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구나. 이제 나는 내 고향으로 돌아갈란다. 그리고 거기서 내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하겠다. 그러니까 너는 네 갈길로 가거라. 부디 좋은 남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런식으로 말을 하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요청을 룻은 거절합니다. 그리고 시어머니를 따라 나섭니다. 그러니까 룻은 자기 시어머니를 따라 나오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이민을 오게 된 이민자라 할수 있습니다. 저는 나오미와 룻을 보면 가끔 제 아내와 아버지가 연상되어집니다. 제 아버지는 며느리인 제 아내를 따라 이 미국땅에 같이 이민을 왔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품에 가계시지만, 약 30년 전 아내와 같이 이민오신 아버지를 공항에서 처음 만났던 그 모습을 저는 잊을수가 없습니다. 시어머니를 따라 이민온 룻이 살아가는 모습은 이곳 미국으로 이민와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와 룻이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여기저기 남의 밭에 가서 룻이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은, 바로 이곳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궂은일을 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보아스를 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보아스가 아주 잘살고 있는 대지주 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보아스는 그렇게 아주 잘사는 사람은 아니고 조금 잘 사는 사람입니다. 요즘 사회에 적용시킨다면 재벌이나 상류층 사람이 아니라 중 상류층 계급 정도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밭을 좀 가지고 있고, 사람에게는 늘 예의를 갖추고 법을 지키면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선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이런 보아스앞에 나오미와 룻이 나타나게 되었고, 보아스는 최선을 다해 나오미와 룻을 도와줍니다. 이 보아스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 있는 덕이 있고 인품이 있는 사람이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는 저와 여러분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선하고 좋은 아저씨와 아줌마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가 기록된 룻기가 왜 성경 66권에 기록되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너무 평범한 이야기인데 이 내용이 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가는 데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경 66권중에 하나로 하나님께서 넣어놓으신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나가는데 조연이 아니라 주인공이다 라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각각 그 인물로 나누어 살펴보면 이렇게 바뀌어지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난 이후에 아담과 화와가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후에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새로운 믿음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새로운 믿음의 나라가 시작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그리고 이삭이 야곱을 낳습니다. 이 야곱이 열 두 아들을 낳는데 그중에 요셉이 형들의 시기질투에 의해서 종으로 애굽에 가게 됩니다. 그이후 요셉은 애굽나라의 국무총리가 되고, 그래서 후에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요셉의 형제들 모두가 애굽땅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그로부터 430년 동안 애굽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살이를 하다가 모세를 통해서 애굽나라를 벗어나 가나안땅으로 다시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가나안 땅에서 아직 왕이 있기 이전 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때 사건이 생길때마다 사람을 세워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이 사람들을 사사라고 부릅니다. 사사시대입니다. 그리고는 사울왕이 처음으로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 되면서 왕정시대가 됩니다. 그러다가 그다음 다윗이 왕이 되고 그때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나라는 그당시 강대국가가 됩니다. 하지만 다윗왕 이후로 그다음 왕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솔로몬 왕 말기에 나라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이렇게 둘로 갈라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이 두나라를 심판하심으로 말미암아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그리고 남유다는 바벨론 나라에 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을 통하여 포로가 된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지켜나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에스라, 느헤미아를 통하여 다시 가나안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재건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른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시고 이 예수님을 통해서 열두제자를 남겨두십니다. 그래서 이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나가시는 것을 우리는 볼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때마다 이사람, 저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계속해서 보존되어지고 지켜나가는 것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제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길게 설명을 했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제부터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처럼 다윗처럼 에스라처럼 다니엘처럼 훌륭하고 재능이 있는 특별한 사람들을 세워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시기도 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가신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룻기‘ 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좀 길게 설명했습니다. 만약에 이 룻기가 4장 17절에서 끝이 났다면 이 이야기는 아주 아름답고 로맨스틱한 소설입니다. Happy Ending 으로 끝나는 한편의 드라마 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포함될 이유는 없습니다. 이 룻기가 성경에 포함된 가장 큰 이유는 마지막 4장 18절부터 22절까지의 내용에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 가정의 족보가 담긴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아스가 오벳을 낳았고 이 오벳이 이새를 낳고 그리고 이새가 누구를 낳습니까?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다윗을 낳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룻기는 끝이 납니다.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4:21-22).'
그리고 이 다윗의 씨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1장에 있는 족보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계보라 그러면서 낳고 낳고 하는 족보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6절입니다.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 3. ... 4. ...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나오미와 룻과 그리고 보아스는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통해서 다윗 왕이 태어나게 됩니다. 룻의 아들이 오벳이고, 오벳의 아들이 이새이고, 이새의 아들이 다윗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룻은 다윗왕의 증조 할머니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도 기록 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룻이 자기 시어머니 한분을 따라서 낯설고 낳선 나라인 베들레헴에 왔을 때. 자기가 그나라의 가장 위대한 다윗왕의 증조 할머니가 된다는 것을 꿈에라도 생각했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혈통 중에서 메시아가 나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될것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보았겠습니까?
룻기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특별한 사람 모세와 다윗, 다니엘 같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도 하나님나라를 이루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여기 룻기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평범한 사람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해나가십니다.
헬렌 켈러를 잘 아실 것입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지만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힘들고 어려운 장애자들에게 소망과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헬렌 켈러가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은 앤 설리반이라고 하는 평범한 사람을 통해서 입니다. 헬렌 켈러가 7살 때 가정교사로 들어와서 그 손바닥에 알파벳트를 써가면서 글을 가르쳐주고 정성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위대한 헬렌 켈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헬렌 켈러처럼 될수 없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앤 설리반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격려할수는 있습니다.
유명한 전도자 디엘 무디를 잘 아실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시켰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도자입니다. 하지만 이 디엘 무디를 이렇게 변화시킨 사람은 평범한 일을 했던 에드워드 킴볼이었습니다. 킴볼은 주일학교 선생으로 봉사를 하다가 유난히 집중을 하지 못하고 정신이 산만한 아이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킴볼 선데이 스쿨 교사는 그 아이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신앙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수많은 영혼을 구원시키는 전도자 디엘 무디가 된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디엘 무디처럼 수십 만명의 사람을 구원시킬수 있는 위대한 영혼의 전도자가 되기는 힘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드워드 킴볼은 될 수 있습니다. 내 주변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과 소외된 내 이웃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는 있습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내가 섬겼던 사람이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쓰임을 받는 위대한 사람이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에드워드 킴볼이 디엘 무디라는 정신이 산만한 어린아이에게 관심을 쏟을 때, 그 아이가 그렇게 위대한 전도자가 되리라는 사실을 알았겠습니까? 아닙니다. 설리반이 앞을 보지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이 헬렌 겔러라는 맹인이 훗날에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어둠속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넣어주는 위대한 사람이 될지 알았겠습니까? 설리반은 단지 헬렌 켈러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 것 뿐입니다. 그랬더니만 하나님께서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추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어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나가십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룻기입니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이 태어나게 하시고 그 다윗의 씨를 통해서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셨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룻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하면 내가 이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가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상급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는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을때 다윗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혈통에서 예수그리스도가 태어납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상급입니까? 믿는자에게 이보다 더 위대하고 큰 상급이 어디있습니까? 그래요 우리는 내가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상급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상급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에 다시 재림하게 될것을 말씀하시면서 세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제 세상 끝날을 곧 맞이하게 될수도 있는 저와 여러분이 정말 새겨 들어야 할 비유의 말씀입니다. 첫째 비유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처녀 비유입니다. 슬기로운 다섯처녀는 신랑을 맞이하지만 미련한 다섯처녀들은 신랑을 맞이 못하게 됩니다. 둘째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받은 종들이 집에 돌아온 주인앞에서 결산을 하는 비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세상끝날 마지막 날 장면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들을 오른편과 왼편으로 갈라놓는 그 장면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둘째 비유인 달란트비유입니다. 먼나라에 갔다가 집에 돌아온 주인앞에 종들이 이윤을 남겨서 내놓습니다. 다섯달란트 맡은 사람은 다섯달란트를, 둘 달란트 맡은 사람은 두달란트의 이윤을 남겨놓았습니다. 그런데 한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고 숨겨두고 있다가 그냥 내놓았고 그리고 그사람은 쫓겨납니다. 이 달란트 비유에서 얻을수 있는 교훈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게 주어신 달란트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내게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달란트를 사용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고, 상급을 받게 되고,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남겼느냐. 내가 얼마나 많은 달란트를 받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는 것과 그리고 남기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받은 달란트를 사용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사용하면 이윤은 하나님께서 남기십니다. 이것이 달란트 비유의 핵심입니다. ‘내게 처한 영역에서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라고 하는 이런 고백을 바로 나오미와 룻과 그리고 보아스가 하나님앞에 섰을때 말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봅니다. 설사 그들이 겸손해서 차마 그렇게 하나님앞에 이렇게 고백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미 그들을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윗왕을 보여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면서 삼십배 육십배 백배이상의 큰 보상을 해주십니다. 나오미와 룻과 그리고 보아스가 자신이 처한 삶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할 때 그들은 다윗왕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게 된것입니다. 이 달란트 비유에서 주어지는 또 다른 하나의 교훈은,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 달란트 비유에서 말씀하고 자 하는 요지는 내가 믿는 사람이냐 믿지 못하는 사람이냐가 아닙니다. 달란트를 사용하는 사람이냐 사용 하지 않는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게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가 정말 믿는 사람인지 반드시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요 어떤 사람은 세탁소에서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픽업스토아에서 일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뷰티 서플라이 가게에서 일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집에서 자녀를 키우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에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때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십니다. 얼마를 남기는 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어느만큼 중요한 일인가 하는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찮고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면 이윤을 남기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세상나라에서는 최선을 다해도 적자가 날수도 있고, 망할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이 달란트는 사용하기만 하면 무조건 이윤이 남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요.
테레사수녀가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을때 그때 어느 한 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실은 기자가 좀 비딱한 질문을 했습니다. “한 대기업의 CEO는 수많은 직원들을 먹여살립니다. 그리고 그 가족까지 합하면 수만명의 사람들을 먹여살립니다. 사실 노벨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그 사람들일수 있지 않겠습니까? 테레사 수녀님, 당신이 한 일을 보면 사실 그렇게 많은 숫자가 아닌 사람을 먹여살리고 또 그들을 위해서 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면 수많은 사람들과 가족들을 먹여 살린 대기업 CEO가 노벨상을 받아야 할것 같은데 이에 대해 테레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때 이 마더 테레샤 수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보실때는 얼마나 남겼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아마도 저에게 이 상을 주신분은 하나님이 보시는 그 시각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저를 보아서 이 상을 주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각자 내가 맡은 위치에서 크던 작던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이윤을 남기게 하십니다. 왜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급을 주고 싶어하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이 일이 보잘것 없다고 할지라도 내가 하는 일이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그리고 손자 손녀들 밥을 해먹이고 빨래를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가게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청소를 하는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십시다. 그러면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 룻기가 쓰여졌습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라옵기는 이 룻기에 기록된 말씀이 앞으로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심령깊이 새겨지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