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룻기 강해4 룻의 선택

Author
kgmcc
Date
2020-09-30 14:39
Views
25
본문 : 룻기 1장 14-18절

날짜 : 2020년 9월 30일



 

<룻기 1장 14-18절>

 

14.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5.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얼마전 목회자 모임에서 지금은 은퇴를 하신 원로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에 비해서 한가지 일을 끈기있게 지속할려는 마음이 부족한것 같다“ 그러시면서 이런 저런 예를 들어 자신이 겪어온 이야기들을 하셨습니다. 옛날에는 솥이나 냄비를 사용하다가 구멍이 나면 땜질을 해서 사용했고, 그 냄비가 찌그러져지면 두들겨 펴서 계속 사용을 했는데 요즘에는 보기에 멀쩡한 냄비인데도 불구하고 싫증난다고 버리고 새것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신고 있던 신발 밑바닥이 떨어지게 되면, 아교풀로 붙여서 계속 신고 다녔는데 요즘은 운동화가 조금만 낡아도 버리고 새신을 사 신는 다는 얘기도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말씀을 듣던중에 제 어릴적 생각이 났습니다. 어릴때 제가 신었던 양말에 구멍이 나면 저희 어머니는 그 구멍이 난자리에 다른 천을 대고 바느질을 해서 저에게 신으라고 주시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른쪽 양말에 구멍이 나면 또 다른 천을 대가지고 바느질해서 신으라고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 때 한가지 천으로 된 양말보다는 두가지 이상의 천으로 된 양말을 많이 신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옛날에는 학교에서 연필을 사용하다가 그연필이 손에 잡을 수가 없을만큼 짧아지되면 모나미 볼펜 껍데기에 연필을 끼워서 계속 사용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죠. 물건을 사용하다가 싫증이 나면 버리고, 또 조금 유행에 뒤진다고 하면서 버리고 최신 제품을 사서 사용합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부모 형제들이 태어난 그 지역을 떠나 살기가 쉬운일이 아니었는데 요즘에는 직장을 따라 이사를 자주 합니다. 옛날보다 더 자주 거주지를 옮기면서 살아가다 보니까 이것이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인간관계가 옛날처럼 지속적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한번 형님 동생의 관계를 맺게되면 그 관계가 평생동안 지속이 되었습니다. 한번 형님은 영원한 형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만나서 좋으면 혐님, 동생하다가도 수가 틀리면 금방 원수가 됩니다. 어제의 형님, 동생이 오늘은 원수지간이 되는 일이 허다합니다. 옛날에는 총각처녀가 데이트를 하다가 손을 한번이라도 잡으면 그것 때문에 결혼까지 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 머리가 흰 파뿌리가 되도록 같이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남녀간에 만나서 금방 사랑에 빠지고 금방 헤어지는 경우가 흔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싫어지면 쉽게 헤어집니다.

물건을 사용하는 것이 옛날보다 더 지속적이지 못하고 그리고 인간관계도 옛날보다 더 지속적이지 못하는 환경에 우리는 살고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신앙도 이러한 환경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그래서 요즘에는 지속성이 부족한 신앙생활을 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주변에 많이 보입니다. 누가 지금 저에게 현대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 하나만 얘기해달라고 한다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할 것 입니다. ”요즘 성도님들은 지속적인 신앙심이 부족합니다“

제가 지속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힘과 능력은 그리고 신앙의 섬김과 헌신은 바로 지속성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마음이 맞지 않으면 너무 쉽게 교회를 옮깁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만듭니다. 그래도 맞지 않으면 미국교회를 다니다가 결국에는 나홀로 신앙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저희들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룻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속성에서의 차이 입니다. 룻은 일단 한번 시작을 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17절입니다.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죽음이 저와 어머니 사이를 갈라놓을때까지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룻이 다른 사람과 달랐던 점입니다. 룻은 한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지켜나가는 지속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지속성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지속성을 가진 마음을 가진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또 내일 마음이 바뀌는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실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그사람을 통해서 일어날수가 없습니다. 그사람에게 능력이 있고 학벌이 있고 돈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은 그것을 가지고 역사하시지 않으십니다. 지속적인 마음이 있는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회사 사장이나 심지어는 가계 주인도 지속성있게 직장에 오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자기 기분에 따라 직장에 나오다가 안나오다가 하면 누가 그사람과 같이 일하길 원하겠습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먼저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지속성을 가지고 내가 섬기는 대상이 하나님이었을때 성경은 그것을 헌신이라고 말씀합니다. 룻은 하나님께 헌신하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좀더 쉽고 구체적으로 설명해드리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마음이 보이는 시어머니에게로 나타난 것 뿐입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를 보고 친정집에 돌아가라라고 했을때 처음에는 두 며느리가 울면서 어머니를 뒤따라가겠다고 말합니다. 9, 10절입니다. 9.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그런데 나오미가 다시한번 '돌아가서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라.' 식으로 말하니까 오르바는 울면서 돌아갑니다. 하지만 룻은 계속해서 나오미 곁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시어머니의 곁을 떠난 오르바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르바의 선택은 상식적인 선택입니다. 정상적이고 합당한 선택입니다. 오르바의 선택에 대해서 우리는 비난해서도 안되고 그 선택은 죄악의 길로 되돌아가는 선택이었다라고 그렇게 너무 쉽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오르바는 아내와 며느리가 된 그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시어머니를 따라 나설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오르바는 시어머니에 대한 예의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어느곳에서도 이 오르바의 선택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오르바는 시어머니 나오미가 복을 빌어주었던 것처럼 결혼해서 행복한 여생을 살았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상처당한 그 여인을 기억하시고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르바의 선택은 상식과 현실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르바의 행복과 축복은 이세상에 있을 때 뿐이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오르바를 보면서 나오미가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5절입니다. 15.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이렇게 나오미가 룻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말은 그앞에 있습니다.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뭐예요?)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그당시 모압 백성들이 믿는 신은 몰렉신입니다. 화면에서 보시는 것처럼 모압 곁에 암몬이 있는데 모압과 암몬은 롯과 두 딸에서 태어난 후손입니다. 지금의 요르단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모압과 암몬이 섬긴 몰렉신은 그모스 신이라고도 불리는데 자기들이 믿는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주로 어린 아이들을 산채로 제사드렸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오르바가 자기 백성들이 믿는 몰렉신을 섬기기 위해서 돌아갔듯이 룻아 너도 너희 백성들이 믿는 몰렉신을 믿고 살아가기 위해서 돌아가라고 말한것입니다. 그때 룻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16절입니다.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너도 동서인 오르바처럼 너희 집에 돌아가라‘ 라고 말했고 이에 룻은 ’아닙니다. 저는 어머니를 따라 가겠습니다.’ 단순히 이렇게만 생각해선 안됩니다. 그러면 인간미를 다룬 한편의 아름다운 소설이지 성경책이 될수 없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너희가 믿고 있는 신을 믿고 살아갈 것을 얘기했고 룻은 이방신이 아닌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겠다는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룻의 헌신의 대상은 시어머니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론 하나님입니다. 오르바의 선택이 현실적이고 상식적이었다고 한다면, 룻의 선택은 현실과 상식을 넘어선 하나님을 향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헌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헌신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일을 이루어나가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룻과 같은 이러한 헌신을 할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하면 룻과 같은 헌신을 할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어떻게하면 룻과 같은 헌신이 가능한가?

첫째로 어떤 희생이라도 치루겠다는 마음을 가질때

16절 전반부입니다.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이제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야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여자와 이방인들을 사람 이하로 생각하는 사회이었고 과부가 되면 남편의 형제나 친족 외에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할 수 없는 율법이 있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시어머니 나오미는 돈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과부입니다. 또한 자신도 과부의 신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만 손익 계산을 한다면 자기가 살고 있는 고향땅에 머물러 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 룻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감수합니다.

이렇게 헌신된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합리적이고 정상적이고 상식선에서 선택하고 행동하는 오르바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제가 할일은 다한것 같습니다. 제 의무와 책임은 여기까지 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내가 손해를 보는 댓가를 치루게 된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아니하는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신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룻은 현실적인 계산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희생을 할 각오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를 볼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룻처럼 헌신할 수 있습니까?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루겠다라고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룻은 자기 계산을 하지 않았습니다. 손익 계산을 하지 않는 그 헌신적인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시고 큰 역사를 행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룻과 같은 헌신이 가능한가?

둘째로 뒤 돌아서지 않을 때

나오미가 고향길을 가다가 며느리에게 돌아가라 라고 말합니다. 11절입니다. “11.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고향으로 길을 가다가 나오미는 며느리에게 뒤를 돌아볼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나오미는 길을 가는동안 어느것이 며느리를 생각하는 것인가를 고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 각자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살아가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하지만 헌신은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뒤를 돌아보면서 옛날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께 헌신하기가 힘들어집니다. 헌신된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가다가 뒤를 돌아보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애굽을 떠날때 홍해를 건너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제 다시 홍해를 건너 애굽으로 되돌아 갈수 없습니다. 되돌아가서도 안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몸은 돌아가지 않았지만 마음은 되돌아갑니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 배고프고 힘들때마다 그들은 애굽에서 먹었던 음식을 그리워하며 옛날생각을 합니다. ‘그때는 우리가 고기를 먹었는데, 그때는 부추를 먹고, 싱싱한 채소를 먹었는데 지금 이꼴이 뭐냐’ 라고 옛날생각을 한것입니다. 그런데 왜 애굽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먹을 음식을 주었습니까? 일을 시킬려고 음식을 준것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농장주인이 돼지에게 잘 먹이는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돼지를 잘 먹이는 것은 돼지를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돼지가 살찌면 찔수록 그돼지를 잡을 때 더 많은 이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울때마다 그시절을 되돌아보면서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 사람들중에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그당시 20세 미만인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다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롯의 아내를 보십시요.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땅에서 나오다가 그만 되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생활은 뒤돌아보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누가복음 9장 59절 이하를 보시면 예수님께서 어떤 한 사람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제 부친의 장례식을 치루고 난후에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62절입니다.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제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쟁기를 잡고 논과 밭을 갈아야 하는 일꾼입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의 여성인 아멜리아 에어하트는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여자 비행사입니다. 1932년 5월 20일 이 아멜리아는 미국의 뉴펀들랜드에서 혼자 비행기를 몰고 대서양 횡단에 도전합니다. 그런데 대성양을 횡단하는 도중에 고도계가 고장이 나고 엔진이 파손되는 불상사가 생깁니다. 하지만 그 위험한 고비를 극복하고 14시간 56분 만에 북아일랜드 어느 한 지역에 착륙합니다. 원래 최종 목적지는 프랑스 파리였지만 타고있던 비행기의 상황이 너무 좋지않아 아일랜드에 도착한것입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대서양 횡단에 최초로 성공한 것입니다. 그때 기자가 아멜리아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비행기안의 고도계가 고장이 나고 엔진도 파손되었다는데 왜 비행기를 돌리지 않고 계속 전진했습니까?’ 그 질문에 아멜리아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비행기를 되돌릴수 없었습니다. 문제가 생겼을때는 비행기가 이미 대서양 반환점을 지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되돌아설수 없는 지점에 와있습니다. 우린 이미 홍해를 건넜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소돔과 고모라 도시를 떠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뛰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대서양 반환점을 지난 비행사들입니다. 쟁기를 잡은 농부들입니다. 뒤돌아서지 마십시다. 옛날에 가졌던 그마음으로 되돌아가지말고 앞으로 전진하십시다. 쟁기를 잡으면 할 일은 하나입니다. 앞을 바라보고 나가는 일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보면 안됩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룻과 같은 헌신이 가능한가?

셋째로 굳은 결심을 할 때

18절입니다. 18.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굳게 결심한을 보고’ 헌신은 굳게 결심을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룻과 같은 이런 굳은 결심을 한 적이 없다면 아직 헌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굳은 결심이 없이 헌신이 나올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헌신하는것은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헌신을 하기 전에 반드시 굳은 결심이 서있어야 합니다. 굳은 결심을 해도 헌신하기가 쉽지 않은데 굳은 결심한 적이 없이 헌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오미가 룻을 보고 돌아가라라고 했을때 룻은 이렇게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일단은 제가 유대땅에 들어가서 한번 살아보겠습니다. 그래서 거기 생활이 절말 제게 맞지 않으면 그때 돌아가겠습니다” 아니면 이렇게 말할수도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지금 연세가 있으시니까 제가 우선은 어머님을 돌보다가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게 되시면 제가 그때 한번보고 돌아가든지 하겠습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것도 어느정도 결심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룻은 단호하게 나오미에게 말합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서 장사를 지내게 될것입니다‘. 그러면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만일 내가 죽는일 이외에 어머니를 떠나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기를 내가 원합니다” 이것은 굉장한 헌신입니다. 이러한 헌신은 굳은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보시면 농부가 밭에서 일을 하다가 밭에 숨겨진 보화를 발견한 비유를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진주장사가 극히 값비싼 진주하나를 발견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밭에 숨겨진 보화를 발견한 농부와 극히 값진 진주하나를 발견한 진주장사가 잘했던 일은 굳센 결단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전 재산을 다 팔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그리고 농부는 그밭을 샀고 진주장사는 그 진주하나를 샀습니다. 그래서 그 보화와 그 진주가 자기들의 것이 된 것입니다.

룻은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지 못했던 이방인 입니다. 거기다가 여자이고 과부입니다. 그당시 고아와 과부는 사람들이 보호해주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는 환경입니다. 하지만 룻은 하나님을 따르다가 죽기로 굳은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룻이 이렇게 굳게 결심 한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룻이 이방인이었고, 여자이었고, 과부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왕의 증조할머니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룻의 씨앗을 통하여 온 인류의 구원자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하신 축복을 주십니다.

예수님 발 앞에서 삼백데나니온의 가치가 있는 향유가 든 옥합을 깨트린 마리아를 보십시오. 그당시 건강한 남자가 하루 일하고 받는 액수가 한 데나니온이니 삼백일을 꼬박 일하고 한푼도 쓰지 않아야 모을수 있는 값비싼 가치가 있는 향유입니다. 이곳 미국에서 노동자가 하루일당 100불을 받는다고 하면 삼만불의 가치가 있습니다. 마리아의 헌신으로 인해 깨어진 향유병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향기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도 맡게 됩니다. 심지어는 마리아를 비난한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들도 아름다운 향유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모두에게 아름다운 향기를 주는 이 헌신은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평생 모은 향유병을 들고 나오기까지는 굳은 결심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삼백 데나니온 이나 되는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앞에 깨트리기위해서 마리아는 결심을 하고 결심을 했던 그 굳은 결단이 있었기에 아름다운 헌신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내가 이렇게 한번 살아보겠다고 하는 굳은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짧게 정리합니다. 이시간에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일은 이것입니다. 내게 어떠한 희생이 온다고 할지라도 치루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일에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겠다는 굳은 결심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주님이 인정하시는 진정한 헌신자의 모습으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룻의 선택이 바로 주님이 인정한 참 헌신자의 모습입니다. 룻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이방인 출신입니다. 당시 사람숫자에도 계산되지 못했던 여인입니다. 경제적으로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는 과부입니다. 자기를 돌보아줄 자녀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돌보아 주어야 할 시어머니 나오미가 있습니다. 이세상에 누가 이 룻과 같은 여인을 구원할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여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왕의 증조할머니의 신분이 되게 하십니다. 이러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이 룻이 선택을 할 때 그때 지녔던 마음가짐을 너무나 귀하게 보셨다는 증거입니다. 룻이 할 수가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물질을 가지기 위해서, 그리고 세상의 박사학위와 명예와 권력을 가지기 위해 매일처럼 굳게 결심을 하고 결단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룻처럼 하나님을 믿고 그길을 가기 위해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기 위해 굳은 결심을 한 것이 가장 가치가 있고 귀한 것임을 오늘 본문을 보여줍니다.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도 룻처럼 귀한 선택을 하고 그길을 가겠다고 굳게 결심함으로 말미암아 룻과 같은 주님이 인정하는 축복을 누릴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