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강해5 돌아온 나오미
<룻기 1장 19-22절>
19.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2.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우리가 산이나 들판에 살아가는 야생동물들을 보면 각자 나름대로 자기의 생명을 보호하는 무기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슴이나 노루에게는 다른 짐승과 싸워서 이길 특별히 강한 것은 없지만 빠른 발이 있어서 자기를 방어할 수 있습니다. 땅에 기어다니는 어떤 뱀은 독을 가지고 있고 고슴도치는 자기의 온 몸을 가시로 만들어 자신을 방어합니다. 또 어떤 곤충은 자기 몸을 주변에 있는 색깔로 바꾸어서 자신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오징어나 낙지는 자기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먹물을 뿌리고 상대방이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이에 도망을 가서 자기 생명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저는 오징어와 낙지가 자신을 방어하는 모습이 종종 우리 인간이 행동하는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때때로 우리 인간들은 남이 나를 잘 알지 못하게 먹물을 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다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먹물을 더 잘 뿌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참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덜한 것 같지만 한때는 차유리에 썬팅을 하는 것이 유행일때가 있었습니다. 저도 차유리에 썬팅이 된 차와 그냥 맨 유리로 된 차를 각각 타보았지만 아무래도 썬팅이 되어있는 차안에 있을 때 마음이 더 편안함을 느낍니다. 차유리 썬팅으로 인해 밝은 태양 빛이 어느정도 차단되는 탓도 있지만, 차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차안에 있는 나의 모습을 잘 보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이 보다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이후에 제일 먼저 한 것이 바로 자신들의 부끄러운 부분을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그이후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믿는 성도는 첫째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 둘째 아담인 예수님의 계열에 속합니다. 그럼으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숨기는 일보다는 투명하고 솔직하게 살아갈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활동을 하실 때 열두제자들과 같이 지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이 다른사람들에게 항상 노출이 되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실때는 입고 계시던 옷마저도 십자가 주변에 있던 로마군인들이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으시고 죽으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공생애 활동을 시작할때부터 죽으실 때 까지 속과 겉이 그대로 보이는 생활을 해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말씀하시면서 아주 심하게 책망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투명하게 사셨고 그리고 믿는 제자들도 투명하게 살아가길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투명하고 솔직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투명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자신의 건강과 평강을 위해서입니다.
솔직하고 투명하게 살지 않으면 인생을 살아가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카메라앞에 한번 서기 위해서 분장을 하는데 몇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자신의 실제 나이나 실제 모습보다 훨씬 더 젊고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몇시간을 분장실에서 수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자신을 실제보다 과장해 보일려고 하면 우리 인생이 힘들고 고달파집니다. 사실대로 말하지않고 사람들에게 꾸며서 얘기를 하게 되면 계속 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 이사람에게 이렇게 얘기를 했고,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얘기를 했다는 것을 다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게 얼마나 힘이 드는 일입니까? 그럼으로 나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단순하고 솔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는 투명하고 솔직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기쁘면 기쁘다고 말하고,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그대로 이야기를 하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알수 있나요? 본문 20절에서 알수있는데, 먼저 19절 전반부를 보시겠습니다. 19.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나오미가 며느리 룻과 함께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사실 사람을 제일 설레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입니다. 내가 태어나고 내가 자랐던 곳으로 갈때는 언제나 마음이 설레이게 됩니다. 아마 이곳 미국에 계신 성도님들중에 모국방문을 앞두고 마음이 설레이지 않으셨던 분은 거의 없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도 자기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오는 동안에 옛날 일들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과 같이 유대땅 베들레헴을 떠날때, 그날 그때 가졌던 감정이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이제 정든 고향땅을 떠나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저 모압땅으로 이민을 가게 되는구나. 이 고향을 정말 떠나고 싶지 않은데... 그래! 저 모압땅에 가게 되면 열심히 일을 해서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게 되면 그때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살아야지.’
아마 나오미는 고향을 떠날 때 이런식으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곳 미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살고 계시는 교포들은 대부분 언젠가 모국으로 돌아오겠다고 하는 생각을 하면서 조국 대한민국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생기고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조국으로 돌아갈려는 마음과 의지가 점점 희미해지게 됩니다. 자녀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가 생기게 되면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살기는 힘들다고 하는 현실을 깨닫으면서 살아갑니다. 아마 나오미도 모압땅에 가면 열심히 일을 해 돈을 모으고, 두아들을 결혼시켜 며느리와 손자 손녀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나오미 혼자 이렇게 돌아오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옛날 추억이 담긴 장소를 보며 지나갈때마다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저곳은 내가 어릴때 친구들하고 놀았던 곳인데..., 저 바위는 내가 남편인 엘리멜렉과 결혼하기 전에 같이 앉아서 얘기를 하던 곳인데..., 저나무는 내아들 말론과 기룐이와 함께 숨바꼭질 할 때 말론이가 숨어있던 나무이었는데...,'
이렇게 나오미는 추억이 담겨있는 장소들을 지나갈때면 옛날생각을 했을것입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이런 얘기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기 저 나무는 말이야. 옛날 너의 남편 말론이가 어렸을 때 숨바꼭질을 하게 되면 꼭 저 나무뒤에 숨어있었단다. 그리고 저 시내물은 너의 남편 말론이가 물장구 치고 신나게 놀았던 곳이야. 저기서 가끔 물고기를 잡기도 했단다.‘
나오미가 어떻게 룻에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향으로 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설레는 길이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의 경우는 설레는 마음 보다는 착잡하고 서글픈 마음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착잡하고 서글픈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는 나오미에게 고향 마을사람들의 반응은 두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떠들었다는 것입니다.
19절 후반부입니다. 19.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우리말 성경으로는 그 의미를 잘알수 없지만 성경 원어로 보시게 되면 ’그들은’ 여성들임을 알수 있습니다. ‘여성복수 대명사’ 로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들, 여인들’ 이 원어에 더 정확한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까 보다 정확한 표현은 “베들레헴에 이를때에 온 성읍이 그녀들로 말미암아(여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입니다. 쉽게 말하면 여자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나오미가 왔다고 떠들어 대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고향 마을을 떠났다가 돌아온 나오미를 보고 그 옛날 친구들이나 동네 아줌마들이 온 동네 마을을 다니면서 “나오미가 돌아왔다. 옛날 큰 흉년이 일어났을 때 남편과 두아들하고 마을을 떠났던 나오미가 다시 돌아왔다“ 이렇게 떠들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일이든 소문을 내는일에는 여인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더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여인들로 인해 순식간에 온 성읍에 나오미가 고향에 돌아온 소식이 알려지게 됩니다.
고향 마을 사람들의 두 번째 반응은 질문입니다.
”19.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네가 나오미냐? 네가 정말 나오미가 맞느냐?” 마을 사람들이 너무 기쁘고 반가와서 믿기지 아니하는 마음으로 저마다 물어봅니다. 이 모습을 통해 고향사람들이 얼마나 나오미 가족을 사랑했고 만나기를 기다려 왔는지 우리는 느낄수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오늘 본문처럼 온 성읍이 떠들었던 구절이 두 군데 나옵니다. 그런데 두 군데 다 기쁘고 즐거웠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사무엘상 4장 5절을 보시면 블렛세 사람들에게 빼앗긴 언약궤가 이스라엘에 다시 돌아오게 될 때 온 성읍이 외치며 떠들었다라고 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그리고 열왕기상 1장 45절을 보시면 솔로몬이 왕위로 올랐을때 온 성읍 사람들이 떠들고 외쳤다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45.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이 기혼에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솔로몬을 왕으로 삼고 의미) 무리가 그곳에서 올라오며 즐거워하므로 성중이 진동하였나니 당신들에게 들린 소리가 이것이라” 이렇게 성경은 기쁘고 즐거울때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향 마을사람들이 기쁘고 흥분이 되어서 떠들었고 그리고 반가워서 네가 정말 나오미냐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마을사람들은 기쁘고 반가웠지만 이 나오미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정 반대입니다. 20절입니다.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룻이 하나님 앞에 헌신을 했던 사람의 모델이라고 한다면, 나오미는 하나님앞에 솔직하고 진실한 사람의 모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룻과 나오미를 사용하셨던 것은 룻의 헌신과 나오미의 솔직하고 진실함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 만났던 많은 사람들앞에서 어느정도는 자신의 모습을 적당히 가릴수 있었을 것입니다. 기뻐하고 반가워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대충대충 적당히 넘어갈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는 고생을 했습니다마는 지내다가 보니까 아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고, 고향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정을 붙이고 지낼만 했습니다‘ 이렇게 적당하게 말할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나오미는 그 자리에서 그냥 솔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놓습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다오.‘ 유대사회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삶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 사람이 그 이름대로 살지 못하면 이름을 바꾸어 살았습니다. 그사람이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주변사람들이 이름을 바꾸어 부르기도 했습니다. 본래의 그 이름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이 시몬이라는 뜻은 “갈대”라는 의미가 있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역에 기초가 되고 반석이 되라고 하는 의미에서 반석이라는 의미가 있는 ’베드로‘ 로 이름을 바꾸어 줍니다. 이렇게 유대 나라에서 이름은 그냥 이름이 아니라 그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리장인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 줄때까지는 그 누구도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삭개오는 “깨끗한 사람 순수한 사람“ 이라고 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세리가 된 이후부터 그리고 시간이 지나 세리장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그누구도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이름대로 살아가지 못하면 그당시 유대사람들은 그이름을 불러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뽕나무위에 있던 삭개오를 보면서 ’삭개오야 이리 속히 내려오라‘ 라고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깨끗한 사람아 이리 속히 내려오라‘ 깨끗하게 살아가지도 않는 세리장에게 이름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삭개오가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삭개오는 자기가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이후 그 누구도 불러주지 않았던 이름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이름이었습니다. 그누구도 자기 이름을 불러줄것이라는 소망은 전혀 가지지 못하고 살아왔던 삭개오 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삭개오는 너무나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그 뽕나무에서 내려오자 마자 ”주님. 내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남의 것을 훔진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습니다“ 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렇게 그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름은 그사람의 삶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마을 사람들을 만나자 마자 자기 이름을 바꾸어서 불러달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아라 나를 마라라고 불러라” 이 말의 뜻은 나의 삶은 나오미 이름처럼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지 못하고 마라처럼 괴롭고 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는 것을 솔직하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그동안에 일어난 일을 보다 구체적으로 솔직하게 말합니다. 21절입니다.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사실 따지면 풍족하게 떠난 것은 아니죠. 그옛날 흉년이 들었고 그래서 나오미 가족은 먹을것이 없어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에 비하면 풍족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요. 지금 내게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남편과 자식이 있으면 그것이 풍족한 것입니다. 남편이 떠나고 두 아들이 다 떠나버린 지금 나오미는 풍족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나에게 사랑하는 배우자가 있고 자식이 있으면 풍족한 것입니다. 엣날에는 가진 것이 너무 없었기 때문에 고향땅 베들레헴을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때가 풍족했다고 생각하는 나오미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선교사들이 선교 보고를 하는 모임에 갔었는데 거기가서 그 목사님이 가장 은혜를 받았던 것은 성공적인 선교를 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보고가 아니었습니다. 선교지에 가서 실패를 했다고 보고를 하던 어느 선교사님의 고백에서 자기가 제일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얘기를 제가 들었습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성공을 통해서 역사를 하시기도 하지만 그 성공보다는 훨씬 더 많은 실패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역사를 하십니다. 그러니까 나의 어떠한 실패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저와 여러분이 솔직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니까 실패를 했다고 솔직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게 됩니다. 그래서 선교사도, 목회자도, 성도도, 과학자도 역사가도, 정치인도 솔직해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날 이렇게 과학 문명이 발달하게 된 것도 사실은 많은 실패를 통해서입니다. 그 실패에 대한 통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장한 것입니다. 연구하다가 실패를 하면 그다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해나갑니다. 그런데 또 실패를 하면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또 다른 방법으로 실험을 해서 마침내 성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또 업그레이드가 되고 또 업그레이드가 되고 하는 이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만일에 실패를 했는데 그냥 그대로 그 자료를 없애버리고, 덮어버리고, 숨기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을 한다면 백년, 2백년이 되어도 과학은 제자리 걸음 입니다. 많은 실패와 실수의 자료를 가지고 그것을 피해서 연구를 하고 또 연구를 하다가 이렇게 우주를 다녀오기도 하는 과학문명이 여기에 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나의 실패에 대해서 솔직해야 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수술대에 들어가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리고 의사에게 보입니다. 그래야 의사가 치료를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앞에 나 자신이 솔직해야 하나님께서는 치유하실수가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나오미는 사람에게 솔직했을 뿐만아니라 하나님앞에서도 솔직했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께 대한 섭섭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합니다.
시편을 보시면 다윗도 힘들게 피신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 대하여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을 그대로 고백한 내용들이 자주 나옵니다. 시편 22편 1절입니다. ‘1.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다윗이 힘들고 어려울때 자신이 지닌 그 감정을 이렇게 하나님께 그대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중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도 다윗이 고백한 이 시편 22편 1절에 있는 내용을 예수님이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육신이 죽어가실 때 자신이 지닌 감정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도 힘들고 어려울때 하나님께 그대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었습니다.
하지만 그냥 떼를 쓰고 원망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를 지켜주시는 분이시다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배신하겠다는 불신앙의 마음으로 원망하고 하소연 한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시편 22편에서는 하나님께 대하여 자신의 섭섭한 마음을 표현했지만 그바로 다음 장 시편 23편을 하나님께 대해 가장 아름다운 내용으로 찬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받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십니다. 비가 온뒤에 땅이 더 굳어지는 것처럼 어려움과 아픔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가까워지게 되고 더욱 의지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나오미처럼 솔직한 마음으로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시는 사람은 솔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투명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라옵기는 힘들면 힘들다고 마음이좋지 않으면 좋지 않다고 하는 솔직한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습관이 필요함을 나오미의 모습을 통해 배웁니다. 바라옵기는 솔직하고 투명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앞에 살아가심으로서 말미암아 나오미와 같은 축복을 받으실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