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룻기 강해7 약속한 말씀을 붙잡아라

Author
kgmcc
Date
2020-10-21 15:01
Views
32
본문 : 룻기 2장 17-23절

날짜 : 2020년 10월 18일

 

<룻기 217-23>

17.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20.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21.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

22.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23.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지난주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것을 더하신다라고 하는 관점을 가지고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한다고 해서 현실이 금방 더 나아지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려고 하는 그 행동 때문에 치루지 않아도 될 댓가를 치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해도 될 일을 해야 하고,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게 되는수가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교회서 바자회를 여는 경우입니다. 교회서 바자회를 하게 되면 얼마나 많은 말들을 듣게 됩니까? 음식맛이 있니 없니, 값이 비싸니 싸니. 그리고 수익이 많이 나면 나는대로 서로 자기 자랑을 하고, 반대로 수익이 별로 없으면 사람만 고생했다느니...., 이런 저런 말이 많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해서 일을 하다보니 수반되어지는 현상입니다. 주님을 위한 섬김과 봉사를 하지 않으면 이런말, 저런말 들을일도 없고 마음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갈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굉장한 힘과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받는 이 경험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가면 좋겠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힘들고 어려울때는 잘 견디어 나가다가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좀 살만하다 싶으면 마음이 풀어지고 교만해져서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를 보십시요. 노아는 홍수가 있기전에, 그리고 홍수가 있을때는 참 신실하게 믿음의 생활을 해나갔습니다. 하지만 홍수가 끝난후에 노아와 그 가족이 방주에서 나오고 난 이후부터는 마음이 풀어지면서 넘어집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사울왕으로 부터 도망 다니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때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왕이 죽은이후 다윗이 왕이 된이후 성안에서 편안한 생활을 계속하게 되니까 그만 넘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계와 심판을 만나 믿음의 사람들이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다시 붙잡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개입으로 또 다시 회복이 되어지게 되는것을 봅니다. 이러한 사이클이 사사기 기간동안 계속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지난번에 살펴본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믿는 성도들의 인생을 보면 이러한 사이클이 평생동안 되풀이 되어지는 것을 봅니다. 차이가 있다면 어떤 사람은 징계를 받고 살아가는 기간이 길고 또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기간이 길다고 하는 점이 다르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될 때 이 은혜를 보다 오랫동안 지속 할수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감사하면서 생활해 나가는 길이라고 할수있습니다. 감사는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하게 하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이미 감사를 하고 있는 성도에게는 사탄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원망과 불만이 있어야 사탄이 그마음을 이용해 넘어뜨리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반문 할 수가 있습니다. “아니 뭐 감사하면 좋은줄 모릅니까? 다 압니다. 하지만 지금 감사할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아닌데 어떻게 감사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신앙이 성숙한 사람들은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감사한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수있습니다.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뻐하라 감사하라’ 입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서는 사도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쓴 옥중서신서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와 룻도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나오미와 룻이 감사할수 있는 상황이 되어서 감사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고 룻은 젊은 나이에 자기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미와 룻에게는 자식도 없고 지금은 남의 밭에가서 이삭을 주워먹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도 없는 암담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감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8절입니다. “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의 뜻은 감사할수 있는 환경이 되면 감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범사에, 즉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것’ 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감사하는 것도 훈련입니다. 우리가 억지로라도 감사를 하면 감사하는 마음이 되어집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말씀 앞에 있는 16절과 17절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16.항상기뻐하라 17.쉬지말고 기도하라“ 기뻐할수 있는 상황이던, 아니던간에 기뻐할려고 애를 쓰면 기뻐하는 마음을 가질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중간에 기도를 하라는 명령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내가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는데 지금 상황은 참 힘들고 어렵습니다. 내 기분과 내 감정으로는 기뻐하고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기뻐하고 감사할수 있는 마음을 부어주세요.’ 이렇게 쉬지 않고 매일 기도를 하다보면 이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것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소망으로 인해 감사하는 마음과 기쁜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고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 할수 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나오미와 룻이 감사하였더라‘ 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것을 우리는 알수있습니다. 룻기 2장 17절입니다.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본문 17절에 룻이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털어보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한 에바는 약 30파운드 되는 양인데 그당시 하루 종일 이삭을 주우면 1파운드에서 2파운드이니까 30 파운드라면 상당히 많은 양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룻이 그것을 가지고 나오미에게 갑니다. 18절에서 19절입니다.

18.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룻이 보리 이삭을 가져온 것을 보면서 나오미는 ‘어디서 주었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라고 묻고 그 대답을 듣기도 전에 축복부터 합니다.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룻이 그날 일하게 된 것이 보아스의 밭이었다고 말했을 때 나오미가 그 보아스를 축복합니다. 20절입니다 20.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그가(보아스가) 여호와로부터 복받기를 원하노라” 라고 축복합니다. 나에게 감사한 마음이 있으면 이렇게 다른 사람을 축복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이렇게 남을 축복할 수가 있지만 반대로 축복을 하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억지로라도 다른 사람들을 축복해주는 생활을 하다보면 내 마음이 감사로 가득차게 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축복해주심으로 말미암아 감사할 수가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절 후반부입니다. ’20.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그가(보아스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여기서 살아있는 자는 나오미와 룻이고 죽은 자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을 의미합니다. 보아스는 그 옛날 엘리멜렉과 두아들이 살아있었을 때에도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던 것을 우리는 알수있습니다.

나오미는 그 보아스가 누구인가를 룻에게 이야기 합니다. "그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가까운 친척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보아스는 우리의 친척이니까 우리 기업을 무를수가 있다” 라고 나오미가 말합니다. 여기에 ‘기업 무를 자' 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룻기에 13번이나 나타납니다. 그만큼 룻기에서 이 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중요합니다. ’기업을 무를 자‘ 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을 잃게 되었을 때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대신 찾아주는 제도를 의미합니다. 그당시에 기업이라고 하면 크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땅‘ 이고 또다른 하나는 ’자식‘ 이 그당시 대표적인 기업입니다. 그러니까 ’기업을 무른다‘ 고 하면 두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는 어떤 일로 인해서 땅을 잃어버리게 되면 친척중에 돈이 있는 한사람이 그땅을 사서 그사람에게 돌려줄때 ’기업을 무른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결혼을 했는데 자식이 없이 남편이 죽게 되면 죽은 자의 형제가 그 여자와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고 죽은 형제의 대를 잇게 해줄 때 ’기업을 무른다‘ 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내용이 율법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내형제나 내 친척중에 이러한 일들을 당하게 되면 내가 이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잃어버린 땅을 찾게 해주든지, 아니면 결혼을 해서 후손을 가지게 하든지, 이 두가지를 할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바로 보아스이다‘ 라고 나오미가 말한 것입니다.

이제 나오미에게 있어 마지막 남은 소망은 기업 무를 자격이 있는 보아스 이었습니다. 보아스만이 나오미가 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에게 추수가 끝날 때까지 보아스의 밭 외에 다른 밭으로 가지 말 것을 지시합니다. 이전까지 소망이 없었던 나오미가 이제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오미가 소망을 가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보아스때문입니까? 아니죠. 보다 더 근본적이고 신앙적인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던 나오미는 룻으로부터 ‘보아스’ 라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그래 맞다. 우리에게 기업 무를 자가 있었지. 기업 무를 자는 기업을 잃어버린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야. 그러므로 내가 붙잡아야 할 것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기업 무를 자가 되는 보아스를 붙잡는 길인것이야." 나오미와 룻의 축복은 바로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을 가지게 하고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시편107:19-20절입니다. "19.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20.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그가(하나님이시죠)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사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 도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축복이 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 주변에 만일 믿지 않는 가족이 있다면 이런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 말씀입니다. “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아버지 제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그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주시옵소서.‘ 이렇게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날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기도를 할 때 저희 가족들이 모두가 다 믿음의 생활을 하게 되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족중에서 마지막으로 저희 형님이 교회에 나가지 않았는데 미국에 계시던 저희 아버님이 한국으로 되돌아가시면서 응답을 받았습니다. 주일이 되어 저희 아버님이 큰형님에게 “교회에 가자” 고 하시니까 그말에 순종해 교회에 나가신 것입니다. 자기 아내의 말도 자기 아들의 말도 자기 며느리 말도 듣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한마디로 “야 교회에 가자” 그러니까 두말하지 않고 “예” 그래서 교회에 다니더랍니다. 이제 저희 부모님은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천국에서 자녀들을 만난날을 소망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날마다 기도할 때 그약속의 말씀을 지키시기 위해서 역사하십니다. 제 아버님을 구원하시기위해 며느리를 통해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가신 아버님을 통해 마지막으로 저희 형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를 해서 쉬지 않고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런 저런 모양으로 기도에 응답을 해주십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입니다. “6.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럼으로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할 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에서 23절까지 말씀을 보면 룻이 나오미에게 이런식으로 말을합니다. “어머니, 보아스가 추수가 끝날때까지 다른밭에 가지말고 자기 밭에 와서 이삭을 주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룻에게 보아스의 말에 순종하고,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몸조심을 하라고 이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룻이 보아스 밭에 가서 양식을 얻을수 있게 허락된 것은 축복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생명의 양식을 얻을수 있는 있게 허락이 된 것도 축복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힘들어 하는 것을 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주일이 될때마다 교회를 가기 싫어하고 귀찮아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그아들에게 교회가기 싫은 이유를 물어봅니다. “얘야 너 왜 그렇게 주일날이 되면 교회에 가기싫어 몸살을 하니?” 그러자 그 아들이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제게 교회에 가기싫은 이유는요 첫째로 교회에 꼴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그래요, 그리고 둘째는 교회 성가대가 부르는 찬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교회에 가면 나에게 너무 많은 일을 시키고 큰 부담을 지워요. 그래서 교회에 가기가 싫어요” 그러자 엄마가 그 아들에게 교회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얘야 아무리 꼴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도 사람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 가야 한다. 그리고 둘째도 마찬가지 이유다.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들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기 때문에 교회에 가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에게 교회에서 너무 많은 일을 시키고 부담을 지워서 교회에 가기 싫다고 하지만 그래도 네가 그 교회 목사가 아니냐. 그런데 네가 교회에 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니?" 이렇게 목사 어머님이 아들 목사에게 교회에 반드시 가야한다고 권유했다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만큼 교회에 다니는 일이 쉽지 않고 편안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일수도 있겠습니다. 요즘은 특히 코로나 19으로 인해 교회에 다니는 일이 예전보다는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보이는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 두 종류가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는 교회 건물을 의미하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 자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보이는 교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교회입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성도들이 보이는 교회건물만을 너무 중요시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진작 더 중요한 보이지 않는 교회인 성도들을 소홀히 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 코로나 19을 허용하실수도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는 교회인 나자신과 성도들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해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죄와 허물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구원해주시는 구세주로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본질적으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의 의미입니다.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cclesia)' 인데 ‘불러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이 불러내주신 교회입니다. 지금처럼 코로나19으로 인해 예전보다 보이는 교회에서 모이는 것이 쉽지 않을 때 우리 믿는 성도들은 교회가 해야할 일을 마음에 담아 각자가 행동해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성도들에게 영생을 위한 양식과 상급을 위한 양식을 날마다 먹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미가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나온 양식으로 살아가듯이 우리 믿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성도들을 통해서 하늘의 양식을 주변 사람들에게 먹이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아스를 통해 나오미와 룻이 양식을 얻고 살아가게 된것과 마찬가지원리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나오미와 룻의 위치를 넘어서 보아스의 역할을 할수 있는 축복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에게 영적인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보아스와 같이 나를 통해 영적인 양식이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누어질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살아가시길 죽원합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아담의 후손인 우리 인간들은 그 낙원에서 쫓겨나 그 땅에서 살수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업을 무를자로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어야 기업을 무를수 있는 자격이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재산으로 기업을 물렀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드림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업을 우리에게 물러주십니다. 그러니까 나오미나 룻에게 기업을 무를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보아스가 있었듯이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기업을 무를수 있는 자격이 있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보이는 교회이던 보이지 않는 교회이든 관계없이 교회는 예수님께서 이땅위에 남겨놓으신 축복의 장소입니다. 우리가 이땅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의 양식을 먹을수 있도록 허락하신 축복의 장소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나 천국에서 혼인잔치를 벌릴때까지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이 은혜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룻은 보아스와 훗날에 결혼 잔치를 벌리게 될 때까지는 이사람 저사람 밭에 가지 않고 보아스의 밭에만 가서 양식을 구했습니다. 나오미와 룻에게 베풀어진 축복의 시작은 보아스가 약속한 말을 그대로 지켜 생활해나간것에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랑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신랑을 기다리는 정숙한 신부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위에 남겨주신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인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고 있는 이 심령을 지켜나가십시다. 그리고 다시 오마 하신 신랑 되신 예수님을 기다리며 살아가십시다. 세상일과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 모두가 다 정숙한 신부의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오실 신랑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