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빌레몬서 강해1 은혜로

Author
kgmcc
Date
2020-11-11 15:09
Views
28
본문 : 빌레몬서 1장 1-3절

날짜 : 2020년 11월 11일


<빌레몬서 1장 1-3절>

1.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3.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번 주부터 한달동안 빌레몬서를 강해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빌레몬서는 사도바울이 로마의 옥중에 있을때 빌레몬에게 보내는 서신서입니다. 그래서 이 빌레몬서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와 더불어 옥중서신서 입니다. 이 빌레몬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의 서신서 가운데 가장 짧은 1장이라는 사실입니다. 1장 25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교리를 다루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대신에 바울의 개인적인 성품을 잘 알수있는 서신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들어와서 기독교계가 교리의 틀안에 갇혀서 세상에서 그 영향력이 점점 약해져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교리는 물론 중요합니다. 교리(Doctrine)를 사전적인 의미로 살펴보면 종교상의 이치나 원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치나 원리를 알려주는 교리 공부를 하게 되면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데 큰 유익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수학의 공식이나 원리를 알게 되었을 때 수학문제를 쉽게 풀어나갈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교리 공부를 하면 성경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해나갈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교리를 가르치신 분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교리가 아닌 진리와 생명을 가르치신 분이십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마가복음 2장 27절의 말씀입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구약의 율법과 계명도 모든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을 엮어 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에서 본격적으로 성경내용으로 교리화 하는 작업을 시작해왔습니다. 교리라는 것은 사람들이 올바른 인간생활을 할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교리를 따라가고 교리내용에 엮어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으로 보다 성숙한 신앙인은 성경말씀을 교리로 믿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형석 연세대 신학교수 같은 분은 이런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교리는 기독교를 위해 있지만 진리는 인간을 위해 있다’ 교리가 기독교안에서 살아가는 것에는 문제가 없지만 세상에서 진리를 나타내기에는 영향력이 너무 미미한 현실을 말한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제 미국에서 선거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동안 이런 저런 문제로 인해서 미국민들 사이에 생긴 상처의 아픔과 분열을 치유해 나가는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두쪽으로 분열되어진 현 상황에 대해 서로 화합하고 화목하는 일에 믿는 성도들이 모본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원수가 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자신의 생명을 바쳐 하나가 되고 화목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사이를 막고 있는 담을 허시고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입니다.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한다면 이싯점에서는 교리를 넘어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화목과 화합하는길에 힘써야 할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싯점에서 기도하면서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할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빌레몬서가 교리보다 인간의 자유와 화합을 중요시하는 내용를 가르친다는 점이 지금 이싯점에 적합할듯해서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빌레몬서가 가진 특징은 자기 자신을 갇힌자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대부분의 서신서에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빌레몬에서는 ‘갇힌자 된 바울은’ 이라고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빌레몬은 사도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때 그당시 골로새에 살고 있던 빌레몬이 바울을 통해서 예수를 믿고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빌레몬은 그당시 사회지도층에 속한 사람이었고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던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집에 있던 종들가운데 오네시모라는 종이 도망을 쳤습니다. 오네시모가 왜 도망을 쳤는지 성경은 그이유를 말하지 않아서 정확히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다시 보내면서 ‘만일에 오네시모가 너에게 빚진 것이 있다면 내가 갚아주겠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씁니다. 빌레몬서 1장 18절입니다. ‘18.그가(오네시모죠)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이 내용을 가지고 신학자들은 아마도 이 오네시모가 주인이었던 빌레몬의 재물을 훔쳐 도피자금을 마련해서 도망을 갔을 것이다 라고 설명합니다. 어쨌든 그당시 주인집에서 도망친 오네시모는 로마로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가운데 이 오네시모가 로마에서 바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때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지난날 자신의 신분과 그리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다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나는 사실 빌레몬 집의 종의 신분이었는데 이러 이러한 죄를 짓고 주인에게서부터 도망을 쳐서 여기 로마까지 왔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회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때가 되자 바울은 이 오네시모를 다시 주인인 빌레몬의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작정합니다. 돌려보낼 때 그냥 오네시모만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편지 한통을 써서 보내는데 그 서신이 바로 이 빌레몬서입니다. 그러니까 빌레몬서의 주된 내용은 이제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서 따뜻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에 있다 할수 있습니다. 자 1절을 보시겠습니다. 1.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자 된 바울‘ 조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바울이 쓴 서신서의 내용을 보게 되면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가장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나 바울은‘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때로는 교리를 말하여야 되고 때로는 그들이 가진 문제를 교훈하고 책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사도로서의 권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빌레몬서에서는 자신의 사도됨을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옥에 갇혀있는 자신을 강조‘ 합니다. 왜요? 두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왜 갇혀있습니까?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고 있는 것처럼, 빌레몬 너도 희생정신을 나타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여달라’ 는 의미가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당시 도망친 노예는 주인이 죽일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자신을 사도라고 표현하지 않고 ‘갇힌자 된 바울’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렇게 감옥에 갇혀있지 않느냐? 너도 힘들겠지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면 좋겠다’. 물론 이말을 잘못 적용하면 안됩니다. ‘내가 희생을 했으니, 너도 좀 희생을 해야지‘ 라고 해석하면 이것은 율법이지 은혜가 아닙니다. 지금 바울이 빌레몬에게 요구 하는 것은 ’내가 희생을 했으니 너도 좀 희생을 하라‘ 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다같이 희생을 해서 오네시모라는 사람을 한번 살려보자' 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네시모를 살려내기 위해서 얼마든지 자기 자신을 주장할수 있는 사도의 권리를 내려놓았습니다.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할때는 그렇게 사도의 권위를 주장하던 바울이 개인적으로는 자기가 주장할수 있는 사도의 권리마저도 포기하고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왜요? 오네시모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요 사람을 살리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영혼을 살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사도의 신분이나 목회자의 신분이나 집사 권사 장로의 신분보다도 영혼 살리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을 살리는 일에 가장 비중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바라옵기는 영혼을 살리는 일에 가장 가치를 두고 그 외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희생할 수가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때문에 갇힌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은 죄를 지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복음을 위해 살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바울이 옥중에서서 쓴 빌립보서를 보게 되면 더 분명하게 알수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라고 하는 단어가 17번이나 나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가장 많이 기뻐하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8절을 보게 되면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빌립보서 4장 4절을 보게 되면 ‘주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여러분 세상적으로 보게 되면 고난과 기쁨은 함께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고난이 오면 기쁨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고난과 기쁨이 공존할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보십시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잘못한 일이 뭐가 있나요? 그들은 복음을 전한 것 밖에 없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갔지만 그들은 그날밤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을 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은혜가 밀물처럼 파도처럼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밀려오는데 도저히 견딜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깊고 어두운 감옥속에 있었지만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령할 때 귀신들린자를 자유하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허물이 많고 부족한 자신들이었지만 예수님 이름으로 명령할 때 귀신이 물러가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도구로 사용되어 졌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기뻤던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에 있었지만 너무나 기쁘고 감격해서 찬양을 불렀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매임과 자유함은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매여있는데 무슨 자유가 있습니까?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매임도 자유함도 같이 공존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매임을 당하면 당할수록 힘들고 짐이 되는것이 아니라 더욱더 큰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매임을 당하면 당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자유함을 누립니다. 이것은 경험해본자만이 알수가 있습니다. 죽음과 생명은 같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죽음과 생명도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지면 생명의 법이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합니다. 내가 죽어지면 죽어지는 만큼 그리스도께서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안에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지금 바울은 자기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바라옵기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갇혀있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죽을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희생을 하고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마가복음 8장 38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38.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일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고 손가락질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된 사실에 대해서 기뻐해야 합니다. 자랑스러워 해야 합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시기 때문입니다. 며칠전에 조용기 목사님이 몇 년전에 하신 설교를 우연히 유튜브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서 힘들어 할 때 하루는 이런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다가 그만 고장이 나서 멈추었답니다. 문도 열리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그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떻게 할수 없어서 발만 동동 굴리고 있었는데 주님이 나타나시더랍니다. 그러면서 ‘나만보고 따라오라’ 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뒤만 따라갔는데 엘리베이터 바깥이었답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고장난 엘리베이터 안이었는데 예수님뒤따라 가니 순식간에 엘리베이터 밖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조용기 목사님이 ‘예수님 엘리베이터 바깥이네요. 이제 살았습니다’ 라고 말하니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평생 잊어지지 않는 다고 합니다. ‘내가 길이다’ 그순간 조용기 목사님이 갑자기 깨닫음이 왔는데 ‘그래, 예수님이 길이시지. 예수님 뒤만 따라가면 사방이 막혀있는 엘리베이터 안이라 할지라도 나갈수 있는 길이 되시는 것이야’ 그러면서 사방이 막혀있던 그 순간을 예수님뒤만 따라가면서 극복할수 있었다는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길과 진리가 되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진리되신 예수님때문에 감옥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바울의 눈에 비친 빌레몬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입니까? 1절 후반부입니다 ‘1.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우리의 사랑을 받는자요’ 그러니까 바울의 눈에 비춰진 빌레몬은 ‘사랑을 받는자‘ 이었습니다. 이말은 헬라어로 보게 되면 ’아카페토스‘입니다. 우리말로 정확한 표현은 ’사랑을 받을만한 자‘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빌레몬은 하나님과 사람들앞에서 ’사랑을 받을만한 자‘ 였습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바울이 주변 사람들을 언급할 때 ’아카페토스‘ 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누가, ‘두기고’, ‘에바브라’ ‘빌레몬’ 정도입니다. 어느 모임에든지 가보게 되면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사랑받는 학생이 있고 회사에서는 사랑받는 회사원이 있습니다. 선생이나 학생으로부터 그리고 상관이나 동료들부터 사랑받는 자로 인정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빌레몬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도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랑을 받는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바울은 빌레몬을 향하여 우리의 동역자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어떤 사람이 동역자입니까? 무조건 같은일을 한다고 해서 동역자는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동업자와 동역자를 혼동할때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동역자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수고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같이 일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추구하는 목적이 다르면 그사람은 동역자가 아니라 동업자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서로 서로 동역자이어야 합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 다 하는 일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도 다릅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도 다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르고 은사가 다르고 목표가 다르지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인생의 목적은 동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 목표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목표와 목적을 혼동할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정치인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것은 목표입니다. 계장 과정 부장 사장이 되는 것도 목표입니다. 선생이 되고 교수가 되는 것도 목표입니다. 목적이 아닙니다. 목적을(goal) 이루기 위해서는 목표가(target) 필요합니다. 하지만 목표만 위하여 살아가다보면 목표가 이루어지고 난후에는 허무한 마음으로 살아가거나 타락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럼으로 목적이 이끄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동역자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나간다고 하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바로 방향에 있습니다. 열심히 사는데 방향이 다르면 그만큼 허비하는 시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빌레몬은 ‘사랑을 받는자요 그리고 동역자’ 이었습니다.

2절입니다. 2.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편지하노니 편지 수신자가 빌레몬 이외에 또 누구입니까? ‘자매 압비아 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 입니다. 여기서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이고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일 것이라고 많은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했습니다. 이 교회는 골로새 교회를 의미하죠. 자 사도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빌레몬 뿐만아니라 빌레몬 가족들까지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까지 이 서신서가 다 읽혀져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받아들여 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오네시모를 세심하게 배려하는 바울의 마음을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편 빌레몬 가족이 믿음이 있는 아름다운 가정인갓도 알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는 이 빌레몬의 가정이 믿음이 있는 아름다운 가정인 것을 알수 있습니까?

그것은 첫째로 빌레몬의 집이 예배의 처소로 사용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자 바울은 교회를 언급하면서 그냥 교회가 아니라 ‘네 집에 있는 교회’ 라고 말합니다. 이말은 너희 집에서 모이는 교회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그당시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초대교회는 대부분 가정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 집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마가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먼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집을 예배처소로 내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이 자기집을 예배처소로 내놓았는데 그일이 쉬운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빌레몬은 자기의 집을 예배처소로 내놓을만큼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왜 멋지고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입니까 가족 전체가 영적인 전우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은 사랑을 받는자요 동역자로서 쓰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압비아도 아내로서 헌신을 했습니다. 하지만 부부는 같이 헌신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부부 뿐만아니라 그 아들 아킵보에 대해서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  '병사' 그러니까 이 아킵보는 정말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서 어둠의 세력과 치열한 영적인 전투를 감당 해나갔던 것입니다. 아킵보는 믿음의 전사이었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의 자녀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세상 유혹에 넘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둠의 세력에 제대로 한번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넘어지거나 도망가버리는 자녀들이 많은데 이 아킵보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빌레몬이 거주하는 집은 밥만 먹고 잠을 자는 집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나가는 교회이었습니다. 빌레몬의 집에는 성도들이 모였고 빌레몬의 가족은 믿음의 전사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입니까?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의 가정도 빌레몬의 가정과 집처럼 될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절입니다.  3.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잘 아시겠지만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은혜’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구원만 받은 것이 은혜가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은혜이고 앞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평강은 히브리말로 샬롬이죠. 히브리사람들의 인사말입니다. 우리가 이땅위를 살아가는 가운데 누릴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축복은 바로 평강의 축복이라 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땅위를 살아가는 동안에 아무리 많은 이런 저런 복을 받아도 평강의 축복이 없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의 복을 받고 정말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 마음에 평강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순서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항상 은혜와 평강의 순서로 말씀합니다. 평강과 은혜의 순서가 아닙니다. 왜요? 평강은 은혜의 열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 곧 평강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지 못하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평강 샬롬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와 평강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아무리 인생을 열심히 살고 착하게 산다 할지라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은혜와 평강은 얻을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기 위해 고행을 하고 세상의 그 어떤 종교를 찾아가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은혜와 평강의 축복을 누릴수가 없습니다. 이 은혜와 평강의 축복은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와 주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염려와 불안의 환경속에 있을 때 극복할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와 평강을 받아야 함에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언제나 말씀과 기도로 살아가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부터 주어지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면 신앙생활을 해나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