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빌레몬서 강해3 명령보다 더 강한 사랑

Author
kgmcc
Date
2020-11-25 14:00
Views
163
본문 : 빌레몬서 1장 8-14절

날짜 : 2020년 11월 25일


 

<빌레몬서 1장 8-14절>

8.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오늘 본문은 빌레몬에게 사랑으로 간구하는 바울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으로 하지 않고 사랑으로 간구하고 있습니다. 8절과 9절 앞부분을 보시겠습니다. 8.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 간구하노라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수도 있으나’ 사실 바울은 마땅히 빌레몬에게 명령할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빌레몬보다 나이도 많았고 사도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빌레몬은 바울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던 영적인 아들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빌레몬에게 ‘빌레몬아 오네시모를 너에게 돌려보내니까 이제 너는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도록 해라’ 이렇게 마땅히 명령 할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사랑으로 간구합니다. 사실 빌레몬이 가진 믿음과 성품을 보면 바울이 그렇게 명령을 했을지라도 순종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하기보다는 사랑으로 간구합니다. ‘도리어 사랑으로 간구하노라’ 그래요. 사실 명령보다도 더 강한 것은 바로 사랑이라 할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움직이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명령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해서 입니다. 자식들이 변화가 되는 것은 부모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입니다. 부부가 변화되는 것은 바가지나 잔소리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입니다. 사실 똑같은 말을 한다고 해도 무엇을 말하느냐 하는 것 보다는 어떻게 말하느냐 하는 가가 더 중요합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틀린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친구를 잘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고 일어나야 한다’. 이렇게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충고는 다 맞고 옳은 말입니다. 아내나 남편이 자기 배우자에게 하는 말을 보면 다 맞는 말들을 합니다. 나가서 술마시고 늦게 들어오라고 하는 아내는 없습니다. 바람피워도 좋다고 말하는 배우자도 없습니다. 다 옳은 말을 합니다. 정치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틀리는 말 하는 사람은 없고 다 옳고 지당하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인간이 듣고 변하는 것은 이런 옳은 말보다는 정말 사랑으로 간구하는 말, 사랑으로 호소하는 말에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명령하는 말 보다는 사랑으로 권면하고 사랑으로 대화를 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자,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빌레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11.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전에 오네시모는 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도망간 사람입니다. 도망을 간 이유가 무엇인지 본문에 나오지 않아서 알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주인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못살게 굴고 학대해서 견디다 못해 도망간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 살펴보았지만 빌레몬은 인격과 믿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종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고 믿음의 교제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평안한 마음을 가지게 하고 기쁨과 위로를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이런 주인으로부터 재물을 훔쳐 도망갔습니다. 그러니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무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무익했던 사람이 이제는 유익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네시모는 예수를 만나기 이전과 예수를 만나기 이후의 삶이 너무나 분명히 달라졌던 사람입니다. 그래요. 우리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예수를 만나기 이전과 예수를 만난 이후의 삶이 분명히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바울은 이 오네시모에 대해서 '그는 내 심복이라' 고 12절 후반부에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복’ 이란 단어의 원래의 뜻은 '심장'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을 보시면 심복이란 단어를 'heart' 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쉬운 성경에서는 ‘나의 분신’ 으로, 표준어 성경에서는 ‘나의 마음’ 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심복은 심장처럼 아주 중요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심장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심장이 멎으면 건강한 사람도 살수 없게 됩니다. 오네시모는 이제 변화가 되어서 바울에게 있어서 자기의 심장과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분신과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도망간 도둑이었지만 이제는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바울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심장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무익한 자가 유익한 자가 된 것입니다.

또한 오네시모는 예수님을 만나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16절 중간부입니다. ‘16.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오네시모는 종의 신분에서 바울의 형제가 되는 신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성품도 바뀌었습니다. 겉모습만 바뀐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까지 바뀌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알수있습니까?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주인에게 돌아가라고 말할 때 오네시모가 거절하지 않고 순종했다는 것으로 알수있습니다. 옛날 주인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네시모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 선생님,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시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재물을 훔지고 도망쳐 나온 빌레몬 주인집에는 차마 못가겠습니다. 제가 거기에 가면 죽을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가지 않을려고 해도 우리는 이 오네시모를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당시에는 도망친 노예를 잡으면 그노예를 죽일수 있는 권한이 주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도망쳐온 그 주인집에 다시 간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서는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바울의 말에 순종하여 갔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는 오네시모가 성품이 완전히 변화된 사람인 것을 알수있습니다. 오네시모는 자기가 주인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빌레몬과 자기 동료들로부터 어떤일을 당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믿음을 가지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오네시모를 이렇게 변화시켰던 것입니까? 아니 어떻게 하면 우리도 오네시모처럼 변화될수 있겠습니까? 사실 제일 변화가 안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저는 얼마전에 책에서 이런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내자신이 종종 미워질때가 있다. 그때는 내가 변화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될 때이다’ 그래요. 우리 인간의 성품이 변화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오네시모가 변화 될수 있었던 것입니까? 간단합니다. 오네시모가 변화 될수 있었던 유일한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9절 중반에서 10절입니다. 9.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 이 표현에서 우리가 알수있는 사실은 바울은 자기가 감옥에 있던 중에 오네시모를 만나 예수를 전했고 그때 오네시모가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으로 인해 오네시모가 무익한 자에게서 유익한 존재로 변화되었던 것을 우리는 알수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문제의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십니다. 인생의 해답은 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의 해답은 사회적인 정책이나 제도를 바꾸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인생의 해답이 사회 제도와 시스템을 바꾸는 것에 있다면 사도바울은 노동운동을 하는 노동 해방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민중들아 일어나라’ 고 외치고 민중 봉기를 통해서 사회적인 제도를 바꿀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그렇게 노동운동을 하지 않아도 오네시모는 변했습니다. 인생의 문제의 모든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죄와 죽음의 법에 있던 사람들이 자유함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죄책감과 열등감에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실타래처럼 얽혀있고 섞여있는 문제들이 풀려지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설사 갇혀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나면 기쁨과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의 목적이 바뀌고 인생의 우선순위가 바뀌고 방황이 끝이 나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님을 만나면 사람이 변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무익한 사람이 유익한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피카소를 잘아실 것입니다. 피카소가 만든 작품 중에 황소머리라고 하는 조형물이 있습니다. 몇년전 런던의 경매장에서 이 황소 머리의 작품이 낙찰 된 액수는 한국돈으로 약 300억원 가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돈으로 따지면 3천만 달러, 30 밀리언달러입니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작품의 재료가 무엇인가하면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자전거입니다. 어느날 피카소가 길을 가다가 쓰레기장에 버려진 자전거를 우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자전거를 가져와서 앉는 안장과 손잡는 핸들을 떼어냅니다. 그리고 손잡는 그 핸들을 거꾸로 안장에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황소 머리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끝입니다. 재료는 버려진 자전거의 안장과 핸들입니다. 그 핸들을 거꾸로 붙여놓고 ‘황소머리’ 라고 제목을 붙입니다. 쓰레기 장에 버려졌던 자전거이었지만 피카소의 손을 거치면서 엄청난 가치가 있는 작품이 된 것입니다. 300 억원의 가치가 있는 이 ‘황소머리’ 작품은 오네시모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오네시모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종의 신분으로 밑바닥 생활을 살아가다가 주인의 재산을 훔치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이후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성경은 기록하지 않아서 알수 없지만 계속해서 무익한 존재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에 있던 바울을 만났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오네시모가 살아온 삶을 추측해볼수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마치 쓰레기장에 버려진 자전거처럼 더 이상 쓸모없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이후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아무 쓸모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가장 가치가 있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인생은 누구를 만나는가하는 것에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만남의 축복입니다. 내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내 인생의 가치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변화가 됩니다. 인류역사에 주님을 만나서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지역에서 우상을 섬기고 우상을 만들고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만나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의 도를 싫어하고 예수를 믿는 자들을 싫어하고 예수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주님을 만나고 난후에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오,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라고 믿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돈이 행복을 보장해준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난뒤에 모든 물질에서 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남에게 베풀어주는 넉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드온을 보십시오. 기드온은 마음이 여리고 조그만 일에도 두려워 떨고 살았던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 부르심의 소명을 받고 난 이후에는 세상이 감당할수 없는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300명의 용사로 13만 5천명이나 되는 미디안 군대를 대파한 용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만나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미국에  ‘조니 에릭슨’ 이라는 여자 수영 선수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소녀가 다이빙을 하다가 잘못 뛰어내려서 온 몸이 못 쓰게 되었습니다. 입을 제외하고는 온 몸이 손가락 하나 까딱할수 없는 전신마비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너무 절망적인 자신의 모습에 죽고 싶은 생각이 순간순간 떠올랐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니 죽고 싶어도 죽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듣습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이 하는 그 얘기를 듣고는 이 조니 에릭슨은 크게 화를 냅니다. "아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고작 이것입니까? 그렇다면 가서 당신의 하나님에게 전하십시오. 제발 날 사랑하지 말고 가만히 그냥 내버려 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 전도자는 그이후로도 계속해서 조니 에릭슨을 찾아와서 위로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실때 당신처럼 전신마비를 겪으셨을 것이라는 말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어떤 고통속에 있는지 너무나 잘알고 계실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자기처럼 온몸을 사용할수 없는 전신마비의 고통을 겪었을 것이라는 말에 이 조니 에릭슨은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그 복음 전하던 사람이 이렇게 한말에 이 조니 에릭슨은 변하게 됩니다. "당신이 만일 이 고통 속에서라도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아주 놀랍게 쓰임 받을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조니 에릭슨은 이렇게 결심을 합니다. "그래 좋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나는 이를 악물고 감사해 보겠다." 그때부터 이 조니 에릭슨은 정말 이를 악물고 하나님께 감사하기 시작합니다.

정말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계속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만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모든 일들이 절망스럽고 비관적이었던 마음이 다 사라지고는 마음이 평안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고 싶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움직일수 있는 입에 볼펜을 물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에게 소망을 주고 생명을 준 예수님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조니 에릭슨이 그림을 그리고 나면 그림밑에다가 'PTL' 이라고 적었습니다. 그 말은 "Praise the Lord!" "주님을 찬양하라!"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사용하는 펜이 질레트 컴퍼니 에서 만든 것인데 우연히 그 소문이 그 회사의 사장 귀에 들렸습니다. 절망 속에 빠진 한 소녀가 자기 회사의 펜을 악물고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 이 얼마나 감동적이겠습니까? 그래서 그 볼펜회사에서 조니 에릭슨에게 광고 요청을 합니다. ‘우리가 볼펜 광고를 만드는데 당신이 여기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때 ‘조니 에릭슨’은 이렇게 조건을 내겁니다. “내가 나오는 광고 밑에는 PTL이라는 영어글자를 써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나가겠습니다.” 그것이 허락이 되어서 그녀는 광고에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가 나가는 광고를 보는 사람들마다 위로를 받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광고밑에 나오는 PTL이 라는 글자가 ‘하나님을 찬양하라’ 라는 의미의 약자인 것을 알고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일이 일어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조니 에릭슨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복음전도자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남에도 불구하고 변화되지않게 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 한 일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라 할수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을 통하여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오네시모가 한번에 복음을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처음에는 빈정대다가 시간이 지나 가면서 점차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는지는 성경이 말씀하지 않아서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옥중에서 낳은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바울은 나이가 많았습니다. 9절 하반부를 보시면 ‘9.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이라 말합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그당시 바울의 나이가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 일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나이 60이 되어도 많은 것은 아니지만 바울당시에 60대이면 나이가 많았습니다. 제가 중 고등학교에 다닐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환갑잔치를 크게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환갑잔치가 사라졌다고 해요. 대신에 환갑이 되면 생일잔치를 조금 크게 한답니다. 요즘 60살이면 할아버지도 아니고 경로 우대증도 주지 않습니다만 바울당시는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취급 받았습니다.

자 바울은 이렇게 나이가 많았고 그리고 옥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롭게 행동할수 없는 환경에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결과 믿음으로 영적인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수있는 것은 예수님을 만난이후 바울의 관심은 잘 먹고 잘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오직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자기가 만나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영혼이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감옥속에서도 오네시모를 붙들고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교훈이 있다면 우리의 관심도 예수를 전하여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것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고 감옥에 있던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할수 있었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복음을 전하며 살수 있는 형편에 있습니다. 내인생에서 내가 만나게 되는 오네시모는 결코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닙니다.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으로 인해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시간이 날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사람이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사람이 믿고 변화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영역이지만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13절입니다. 13.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3절과 14절은 정말 귀한 원리가 있어서 다음주에 살펴보게 될것입니다만 이시간에는 한가지 단어만 을 생각해보고자 하는데 그것은 바로 ‘내 복음을 위하여’ 입니다. 그냥 복음을 위하여가 아닌 내 복음을 위하여입니다. 무슨의미가 있나요? 내가 경험한 예수 내가 지금 예수 안에서 누리고 있는 내복음이어야 합니다. 어떤 성도가 예수를 만나서 변화가 되고 기쁨과 평강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해나가고 있다더라 라고 전한다면 이것은 내 복음이 아닙니다. ‘내가 만났고 내가 경험한 예수’ 즉 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한 오네시모에게 내복음을 전할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직접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내가 지금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지금 평강을 누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평강 하라는 말을 담대하게 전할수 있겠습니까? 내가 화목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화목하며 살아가라는 말을 할수 있겠습니까? 물론 말을 할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을 변화시키지는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내가 직접 경험 해야 내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전한 그 오네시모를 통하여 우리보다도 훨씬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할 계획을 가질수도 있습니다. 이 보상의 원리는 다음주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우리가 주님앞에 섰을 때 오네시모와 같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일 때문에 그리고 그 오네시모의 사역으로 인해서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보상을 받을 수도 있음을 소망해야 합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내 주변에서 내가 만나게 되는 오네시모는 하나님이 나에게 붙여준 영혼이라는 사실을 믿고 시간이 날때마다 예수님이 구세주요 구원자가 되신다고 하는 복음을 전할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