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요나 강해2. 사명 감당하지 않을 때

Author
kgmcc
Date
2021-01-13 13:08
Views
139
본문 : 요나서 1장 4-10절

날짜 : 2021년 1월 13일

 

<요나서 14-10>

4.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5.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7.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8.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9.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 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저버릴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내가 감당하지 않을때 내 주변에 일어나게 되는 현상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하나님게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내가 감당하지 않게 될 때 일어나는 현상은

1.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게 됨

한 사람 때문에 그 주변의 이웃들과 공동체가 태풍을 만날 수가 있고, 또 반대로 평온한 바다를 항해할 수도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반대방향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바다 한가운데 있을때 어떠한 일이 벌어집니까? 본문 4절입니다. 4.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여호와께서 큰바람을 바다위에 내리시매’ 그래서 그 큰 바람으로 인해 큰 폭풍이 일어나게 되어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던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길을 가도록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가질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요나를 순종하게 하실려면 배가 떠나기 전에 큰바람이 일어나게 하시든지 아니면 배가 고장이 나게 해서 배가 떠나지 못하게 하시지, 왜 배를 떠나게 하시고 배가 바다 한가운데 있을때 그제서야 큰바람을 보내시고 폭풍이 일어나게 하십니까? 그래서 이 요나 한 사람 때문에 그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같이 고생을 하게 합니까? 그리고 그 배에 있는 수 많은 물건들을 바다에 내던져 손해를 입혀야 하는것입니까?’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 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요나가 배를 탈려고 할때 ‘요나야 그 배를 타지말고 니느웨로 방향을 바꾸어라’ 이렇게 큰소리로 한마디 말씀만 하셔도 요나가 순종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배를 타서 바다한가운데까지 가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반문을 해볼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정도는 그 이유를 알수 있습니다. 8절을 보시면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요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8.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많은 질문 내용이 있지만 간단히 요약을 하면 ‘너는 무슨일을 하는 사람이냐 그리고 어느나라 사람이냐?’ 라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에는 ‘내 직업은 무엇입니다. 그리고 나는 어느나라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요나는 자기의 직업이나 자신의 나라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요나는 자기의 신앙으로 대답합니다. 사실 이러한 고백은 아무나 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9절 입니다 “9.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그 당시에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라고 하는 표현은 ‘나는 택함을 받은 백성입니다“ 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신앙적인 표현입니다. ’나는 유대나라 사람입니다‘ 라는 말을 하지 않고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라고 한것은 이렇게 말한것과 비슷합니다. ’나는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는 대신에 ’나는 불교인입니다‘ 라든지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라고 대답을 한 모습과 비슷합니다. 다시말해 신앙적으로 표현 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요나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이렇게 요나는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사실 그배에 있던 사람들은 신앙에 대한 질문을 한 것이 아닌데 요나는 신앙으로 대답 한 것입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예를 들어본다면 내 이웃집에 어떤 사람이 이사를 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사람한테 가서 내 소개를 하고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과 직업과 어디서 오셨는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사람이 자기소개를 자신의 직업이나 어디서 왔다는 내용으로 말하지않고 ”나는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챤입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만유의 주가 되시고 만앙의 왕이 되시는 창조주 이십니다“ 이렇게 대답을 한것과 마찬가지의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자 이것은 어떻게 보면 엉뚱한 대답을 하는 동문서답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그만큼 요나의 신앙관은 확실했고 강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종종 요나가 가진 신앙을 과소평가를 해왔습니다. 요나의 신앙이 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요나가 가진 신앙은 그누구도 바꿀수 없을 만큼 확실했고 강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너무 확실하고 강해서 하나님의 뜻마저도 요나가 가진 신앙을 바꿀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나가 가진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거짓과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느웨에 살고 있는 인간들을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나가 가진 정의 이었고 가치관이었고 열정이었고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가 행한 불순종은, 주일 예배에 빠진다든가 성경읽기와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는 그런 차원의 불순종이 아닙니다. 죄악을 짓고 살아가는 자는 그 뿌린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신앙관에서 나온 불순종이었습니다. 내 몸 하나 편하기 위해서 나온 불순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신앙을 가진 요나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신앙을 가진 요나가 하나님이 지니고 계신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알고 사역을 하길 원하신 것입니다.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해야 마땅할 니느웨에 있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알게 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의 배를 타고 떠나는 것을 허락을 하시고 불순종의 바다 한가운데에 있을때 큰 바람과 폭풍을 보내서 요나뿐만 아니라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을 힘들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요나 너 한 사람의 신앙관이 확실하다고 해서 그것이 다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관에 대한 확실한 것 보다도 사명에 대한 순종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고 심판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시면 사명 감당을 그 한사람으로 인해서 한나라가 구원을 받고 형통하게 되는 모습이 여러군데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반대로 사명을 저버린 그 한사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멸망하게 되는 모습도 여러 군데서 볼수 있습니다. 사명을 저버린 사람들을 보면 저마다 다 이유는 다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연약하기 때문에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반대로 너무 분명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불순종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 요나가 가진 신앙이 없거나 약했다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사명을 맡기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시면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병자가 고침을 받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주의 사자가 이 빌립 집사에게 말씀하십니다. “빌립아 지금 네가 하는 일을 그만두고 광야로 가라” 지금 빌립이 사역하는 그 사마리아에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이 없는 광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빌립은 광야로 가라고 하는 말에 거절할수 있는 이유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 여기 지금 이 사람들을 보세요. 구름떼 같이 모인 이 사람들을 보세요. 지금 이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그만두고 왜 사람이 없는 유대 광야로 가라고 하십니까?’ 하지만 빌립은 이런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순종해서 유대 광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 길에 가서 누구를 만납니까? 에디오피아 나라의 국고를 맡고 있는 간다게 내시를 만납니다. 이 빌립 집사의 순종으로 인하여 간다게 내시는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에디오피아 간다게 내시의 순종으로 인하여 아프리카 에디오피아는 기독교 국가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 빌립 집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사명을 받게 되었을때 그 당시 자신의 생각으로 사마리아에 계속 있었다면 에디오피아 간다게 내시는 구원을 받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 원리에서 그 에디오피아 간다게 내시가 빌립집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을때 그 사명을 저버렸다면 그나라는 기독교 국가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이 에디오피아 간다게 내시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수있습니다. 이와같이 한 사람이 사명을 감당하고 감당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주변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느냐 구원을 받지 못하느냐라고 하는 교훈을 우리는 얻을수 있습니다.

성도 한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저버리게될때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같이 불행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교훈으로 얻을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실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내가 감당하지 않게 될 때 일어나는 현상은

2.이웃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 둔감하게 되어짐

5절입니다. “5.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큰 바람이 불고 폭풍이 일어나서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각 자기들이 섬기고 있는 신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또 배 무게를 가볍게 하기위해 배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할수 있는 일은 다 한 것 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 누워 깊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배의 선장이 잠을 자고 있는 요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6절 전반부입니다. “6.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이 말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선지자가 한 말도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이 한말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선장이 와서 한 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와서 책망을 한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너는 어떻게 잠을 잘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상식의 차원입니다. 믿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인간이라면 남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잠을 자서는 안되는 행동입니다. 오늘날 믿는 성도들이 믿지 않는 불신자들로부터 지적을 받게 되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식의 문제입니다. 불신자들은 믿음의 내용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도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믿는 자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가 아니라 상식의 눈으로 보고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는자여 깨어나라’ 라고 믿지 않는 사람이 믿는 사람에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정인이‘ 사건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그리고 더 기가 막히고 심장이 막힐일은 ’정인이‘를 입양한 양부모가 목사 사모라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제 아내로부터 알게 된 이후로 차마 저는 더 이상 그 뉴스를 듣고 볼수가 없었습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의 양심을 깨우치고 가르쳐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오히려 지탄을 받고 정죄를 받아야 하는 이런 짓을 저지를수 있습니까? 해도 해도 정말 인간으로서는 할수 없는 짓을 그 사람들은 저질렀던 것입니다. 오늘 요나에게 일어난 사건도 이와 비슷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와서 요나에게 ’왜 자고 있느냐‘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내가 저버리고 살아가게 될 때 일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내가 가지 않을려고 하면 마음을 모질게 먹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보면 내 감정이 메말라지고 강퍅해지게 되어집니다.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에 있으니까 당연히 내 주변의 사람들의 고통이나 기쁨에는 둔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내마음이 열려 지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에는 아주 민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정인이를 입양했던 그 양부모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마음속에서 오래전부터 거절하고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저와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내용은 내게 주어지는 사명을 내가 저버리고 살아갈때는 나는 비 인간적이고 비 상식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되어진다고 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내가 감당하지 않게 될 때 일어나는 현상은

3.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수 있는 길이 없게 됨

5절입니다. 5.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배안에 있는 사람들은 각각 자기들이 믿고 있는 신을 불렀습니다. 그럴때 선장이 요나에게 가서 자고 있는 요나를 깨웠습니다. 요나를 깨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도 다른 사람처럼 네가 믿고 있는 신을 불러라” 라는 것입니다. 6절 다시 봅니다. “6.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여기서 선장이 말하는 하나님은 물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은 아닙니다. 많은 신 들중에 하나의 신으로 말한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말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망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하나님이든 무당이 믿는 신이든 부처이든, 알라신이든, 어짾튼 내가 망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 입니다. 이것이 다신교입니다. 무엇을 믿든지 내가 잘되고 우리가 잘되면 아무 신이나 믿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신이라도 상관이 없이 다 허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마땅히 우리를 심판하시고 멸망시켜야 하지만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독생자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습니다. 이러한 일을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교회를 키워서 사회에 영향력을 키울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를 잘해서 기독교 국가를 만들려는것도 목적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는 한 영혼을 구원하는 그 길을 전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하라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2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뭐라고 외치라는 것입니까? ‘당신은 죄인입니다. 당신의 범죄와 사악함이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그 범죄와 죄악으로 인해서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당신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돌아오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용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구원의 메시지를 외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메시지가 바로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면 죄사함받고 구원받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내용이 바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중심적인 메시지입니다. 이런 메시지를 전해서 천하보다 귀한 영혼 하나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게 맡겨진 사명을 내가 저버리게 되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그냥 수많은 신 들중에 하나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믿음의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옛날에 그 누군가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순종하여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한사람의 순종으로 인해서 여러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1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 옛날 아담이 순종을 해야 할 사명은 맛있어 보이는 선악과를 먹는 것이 아니라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었습니다. 땅을 정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일이 아담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명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을 하고 사명을 감당 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신 예수님의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의인이 되어 구원을 얻을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이일을 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가 아닙니다. 이일이 내게 이해가 되느냐, 안되느냐도 아닙니다. 일단 내게 그 사명이 주어졌다면 내가 얼마든지 거절하고 받아들일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감당해나가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정리합니다.

요나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저버릴 때 다시스로 가는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의 생명과 물질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저버릴때 요나는 남이 고통을 겪고 있는 아픔을 보면서도 둔감한 메마른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명을 저버리게 될 때 죄악속에 살아가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나에게 사명이 맡겨질때 그 어떤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새기고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