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요나강해4. 기본 신앙의 원리 3가지

Author
kgmcc
Date
2021-01-27 13:36
Views
398
본문 : 요나 2장 1-10절

날짜 : 2021년 1월 27일

 

<요나 2장 1-10절>

1.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4.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5.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6.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7.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8.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10.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라디오 방송 설교자이자 신학교 교수이고 저술가이었던 J. 버논 맥기 박사가 쓴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기를 잡다가 큰 상어가 배에 부딪치는 바람에 배에서 떨어져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 장면을 본 주변의 사람들이 그사람을 구할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시체라도 찾기 위해서 하루종일 바다를 헤매다가 큰 상어를 찾게 되었고 그래서 그 상어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상어 배를 갈라 보니까 거기서 물에 빠졌던 사람이 산채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상어위장 속에 있다가 보니까 위산에 의해서 피부에 화상을 입고 머리가 다 벗겨졌답니다. 그래서 이 J. 버논 맥기 박사가 말하기를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요나도 틀림없이 대머리가 됐을것이다라고 그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상어는 다른 물고기와는 달리 상어의 위장은 거기에 음식을 넣고 소화시키지 않은채 저장하는 역할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어 종류중에 거대한 상어는 사람을 삼키고 그 뱃속에다가 사람을 산채로 얼마동안 보관할 수 있는 그런 기능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큰물고기가 상어인가 고래인가 아니면 또 다른 물고기인가를 따지는 것은 과학자들이나 신학자들에게 맡기는 것이 더 지혜로운 방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또 이 요나가 사흘동안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살게된 것이 사실이냐 허구이냐 를 따지는 것 보다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접근 방식은 이런 것입니다.

그 큰 물고기가 하필이면 그 날,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기다리고 있다가 요나가 물에 던져질때 삼켜버린 사건은 확률이 적을 뿐이지 있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동안 죽지 않고 살아있을 확률도 일억 분지의 일이요 천억 분지의 일일만큼 그 가능성이 적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확률이 작을뿐이지 있을수 있는 일이다 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일어날수 있는 보편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성경을 믿는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울만큼 아주 극히 희박한 일이지만 이 요나의 사건처럼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그런 일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라는 것을 믿을수 있는 것이 바로 성경적인 믿음의 자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개입 하셨다 해도 오늘 본문에 일어난 사건과 같은 일이 일어날 확률은 너무너무 적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한번만 나오는 것입니다. 이 요나의 사건은 인류 역사의 기록에 한번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이 믿고 주장하는 이론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요. 창조론을 믿지 않고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원시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 같은 것이 변하고 변해서 그리고 진화하고 진화해서 원숭이와 사자나 사슴 그리고 코끼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원숭이에서 수많은 진화 과정을 거쳐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 이론이 진화론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극히 적은 확률도 없는 불가능 한 것입니다. 사자나 사슴은 처음부터 다른 종류입니다. 이 종과 종 사이를 뛰어넘는 진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예는 지금까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종과 종 사이를 뛰어넘는 진화는 대진화라고 말하는데 이런 대진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진화론자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같은 종안에서 일어나는 진화를 소진화라 로 부르는데 진화론자들은 이 소진화에 대한 연구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진화에 대한 연구도 진화가 아닌 돌연변이로 인해서 변화가 되어지는 것을 예로 들고 있는 현실정입니다. 그러니까 종과 종 사이를 뛰어넘는 대진화인 종이 다른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되었다는 사실은 진화론자들 사이에서도 사실은 믿지 않는 이론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계속 진화되고 있는 중간층이 나와야 하는데 그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서 보다 인간에 가깝게 더 진화되고 있는 인간 원숭이가 나오고 보다 원숭이에 가깝게 덜 진화되고 있는 원숭이 인간이 지금도 보여져야 하는데 이 지구상에 그러한 존재는 지금까지 단한나도 발견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불신자들이 진화론을 믿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개입 하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동안 있었던 사건을 믿는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입니다. 그리고 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동안 있었던 사건은 바로 예수님이 사흘동안 무덤속에 들어가셨다가 부활하신 사건을 우리 인간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하나님이 개입하신 사건인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29절입니다. ‘29. 이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포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그러니까 우리는 요나가 사흘동안 물고기 배속에 있었던 이 사건은 바로 예수님이 무덤속에 계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보이기 위한 표적으로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극도로 아주 희박한 확률이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기 때문에 그때, 그 자리에서 어떤 일이 있을수 있었다 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리고 그것을 믿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어야 우리는 성경적인 믿음을 가질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가 기도를 하고, 이 요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응답을 하시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10절입니다. “10.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가 어떤 기도를 하였기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까?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 요나가 드린 기도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 요나처럼 응답을 받는 기도생활 할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요나는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3절입니다. “3.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그리고 후반부를 보시면 ‘주의 파도와 주의 큰 물결이’ 라고 요나가 기도를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바다에 던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바다 가운데 던지셨다는 것입니다. 큰 파도 와 큰 물결이 일어난 것도 주님이 파도를 일으키시고 주님이 큰 물결을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 모든일은 주님이 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모든 일은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고백은 우리가 응답을 받을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하셨다는 것은 그렇게 해야 하는 주님의 뜻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셨다는 것은 주님만이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해결은 내가 주님의 뜻에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이 하실 해결책을 바라보고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 요나의 모습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인간은 고통을 당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메어도프라는 신학자가 이런말을 했습니다. “이 큰 물고기는 요나에게 있어서 가장 훌륭한 기도학교이었다” 그러니까 조금 설명을 하자면 요나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위기를 만날 때 올바른 기도를 하는 존재라는 의미가 됩니다. 사실 우리가 고통이나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배우고 성숙할수 있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사랑에 대해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평생동안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나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타락한 심성을 가진 우리 인간은 대부분 어려움을 겪어야 그 기간에 배우고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이런식으로 배우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사랑을 베풀고 좋은 말 할때 배우기를 원하시고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도 요나처럼 막판에라도 부르짖을수 있는 사람은 축복입니다. 얻어터지고 막판에 가도 오히려 더 냉정하게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칠칠맞은 개를 키우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주인이 이 개를 집 뒷마당에 풀어놓고 키우고 있는데 이 개가 기회가 있을때마다 집밖으로 나가 동네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일을 저질러놓습니다. 그리고는 집도 잘 못찾아서 다른 사람이 데리고 옵니다. 이러한 일이 몇 번 생기게 되면 주인은 다시는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집 뒷마당에서 줄을 매달아 놓습니다. 줄을 매달아 놓는다는 것은 주인이 이 개에게 훈련시키는 것을 포기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 개는 학습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주인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학습능력이 있다는 것을 포기를 하신다면 우리가 배울 수 없는 존재라는 결론을 내리신다면 줄로 매달아 놓으시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개를 훈련시키는데 하이테크 방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먼저 전자 울타리를 만듭니다. 그러니까 개의 눈에는 울타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개의 목에다가 전자 목걸이를 매답니다. 그리고는 이 개를 그냥 풀어놓아둡니다. 그러면 이 개가 막 뛰어 다니다가 자기 집 뜰을 벗어나게되면 전자 울타리에서 나오는 전자파가 개 목걸이에 전달됩니다. 그러면 이 개는 마치 전기 쇼크를 받은 것처럼 깜작 놀라게 됩니다. 그래서 이 개가 몇번 혼나고 나면 절대로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않는답니다. 주인이 나가라고 해도 절대로 안나가는 착한 개가 된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개처럼 배우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해서 배우는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음으로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받아야 배우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을 훨씬 귀하고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신앙생활하게 하십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이 언제나 어떠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제일 먼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요나는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

4절입니다. “4.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회개라는 것은 단순한 뉘우침이 아닙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이 회개가 아닙니다. 그것은 뉘우치고 반성하는 모습입니다. 오늘날 회개를 뉘우침이나 반성하는 것으로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한일이 잘못되었다라고 깨닫고 인정하는 것은 뉘우치고 반성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돌아서서 가는 행동이 회개입니다. 다시스 방향으로 가던 요나가 주의 성전을 바라보며 가는 것이 바로 회개인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를 예를 들어 참회개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탕자의 비유에는 둘째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물려받은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리고 거지가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생활을 하면서 탕자는 그동안 자기가 해온일에 대해 잘못을 깨닫고 후회를 합니다. 하지만 이 탕자가 계속 뉘우치고 후회하기만 하면서 돼지가 먹는 음식을 찾아 다니는 생활을 계속했다면 이 사람은 회개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냥 뉘우치고 깨닫을 것 뿐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15장 20절에 이 탕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회개는 방향전환입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 먼나라 갔던 아들이 아버지 집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회개의 기도는 ‘내가 잘못했습니다‘ 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것을 잘못했으니까 이제는 저렇게 하겠습니다.’ 에 까지 가는 것에 있습니다. 이렇게 방향을 바꾸고 돌아서는 행동을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오늘날 교회 성도들이 하는 회개기도는 사실상 성경에서 말씀하는 회개 기도와는 거리가 많이 있습니다. 똑같은 죄를 계속해서 반복해나가면서 잘못했다고 기도만 하는 것은 회개기도가 아닙니다. 회개 기도가 아니라 뉘우침의 기도입니다. 반성하는 기도이지 회개기도는 아닙니다. 다시말해서 죄를 지은것을 슬퍼하고 애통하는 기도가 회개기도가 아니라 그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 참 회개기도 인 것입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향하던 눈을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으로 돌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분순종 했던 자리에서 순종의 자리로 돌아섰습니다.

사실 요나의 이 기도는 육지에 올라와서 드린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으로 부터 쫓겨났다고 느꼈을때 드린 기도입니다. 물고기 배속에 있을때 드린 기도입니다. 문제가 해결된 후에 드린 기도가 아니라 문제 속에 휘말려 있는 상태에서 드린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만을 바라보겠다’ 라는 마음으로 드린 기도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므로 하나님이 죽이시든 살리시든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회개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풀어주시고 내 이 문제를 해결하게 해주시면 이제 하나님만을 바라보겠습니다’ 라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하시든지 나는 주님만을 바라보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참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는 참 회개의 신앙생활을 할수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요나는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9절입니다. “9.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사실 따져보면 지금 요나에게는 감사할 조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이 살아날 가망은 없고, 주변 환경은 여전히 어둡고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이 요나가 감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한 가지인데, 그것은 바로 구원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만일 구원이 요나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이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해도 소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요나 자신이 죽으나 사나 상관없이 그 결과는 모두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나는 불순종의 삶보다는 차라리 순종의 죽음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지금 죽어도 아니면 내가 다시 살아난다고 할지라도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에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나에게 구원을 주신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믿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신앙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사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하신 일 때문 아닙니까?

마태복음 12장을 보시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앞에 나아가서 당신이 메시야 구세주인 것을 믿을수있는 표적(사인) 을 보여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12장 39절과 40절입니다. “3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요나처럼 사흘동안 지옥의 음부에 들어가셨던 것은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니느웨 사람들처럼 악하고 음란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있었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선하고 착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만 악하고 음란한 것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그 발걸음을 걸어가는 사람과, 여전히 그 악하고 음란한 속에서 지내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니느웨 성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전해준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행동을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돌아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시고 악하고 음란한 우리 인간의 죄를 다 담당하게 해서 십자가에 못박아 그 죄의 댓가를 치루시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드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마다 구원을 주셨습니다. 요나가 외친 메시지를 받아들인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것 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사람과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시다. 구원은 내 힘이나 내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는 것에 감사하십시다.

요나가 고난의 깊은 바닷속에 있었지만 감사의 기도를 할때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살려 주십니다. 10절 다시보시겠습니다. “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그러니까 내가 문제 속에 있고 고통 속에 있을때에도 감사의 기도를 해야합니다. 요나가 감사의 기도를 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물고기에게 요나를 뱉어내도록 명령하십니다. 감사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기도응답을 주십니다. 이런 감사는 믿음이 굳게 선 사람만이 할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7절입니다. ‘7.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감사함을 넘치게 할수 있는 사람은 믿음에 굳게 섰을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사를 할 때 우리에게는 은혜가 되고 하나님에겐 영광이 되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린도 후서 4장 15절입니다. ’15.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저와 여러분이 감사를 하면 나에게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넘칩니다. 우리가 은혜로운 생활을 하게 되면 그모습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지금 문제속에 있고 고통속에 있다 할지라도 내가 기도 할수 있는 것에 대해 감사를 하십시다. 그리고 그 문제가 비록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할지라도 응답하시고 구원해주시는 하나님게 감사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영광이요 저와 여러분에게는 은혜가 되는 삶을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