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요나 강해6. 하루 동안 다니며

Author
kgmcc
Date
2021-02-10 12:15
Views
26
본문 : 요나 3장 4-10절

날짜 : 2021년 2월 10일

 

<요나 34-10>

4.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6.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지난 1월 20일 바이든 미 대통령 취임식때 가장 주목을 받았던 인물은 노란색 코트를 입고 빨강색의 머리띠를 한 채 자작시 ‘우리가 오르는 언덕’ 을 낭독한 22살난 어맨다 고먼 이었다는 것에 대부분 사람들이 동의를 합니다. 고먼이 시를 리드미컬하게 손짓을 사용하면서 시를 낭송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시 낭송중에 손짓을 사용하는 탓에 유난히 오른손가락에 낀 새장 모양의 반지가 눈에 띄기도 하였는데 그 반지는 이날 같이 착용한 귀걸이와 함께 오프라 윈프리 가 선물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선물한 반지와 귀걸이었다는 기사를 보면서 저는 잠시동안 잊고 있었던 오프라 윈프리 를 생각했었습니다. 사실 오프라 윈프리는 현재 미국에 사는 여성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오프라 윈프리는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미시시피주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9살 때 삼촌에게 처음으로 성폭행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후에도 몇 명의 친척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되고 그래서 14살의 나이에 아이를 낳기까지 합니다. 그 아이는 몇 개월만에 죽었고 그후에 마약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때는 비만증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프라 윈프리는 이 모든 상황을 극복하고 지금 미국인의 정신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중이 한사람이 된 것입니다. 성경속에 나오는 모세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고 있다 라고 고백을 한 적이 있는 이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이 쓴 자서전 “이것이 사명이다” 라는 책에서 네 가지 사명을 말합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명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프라 윈프리는 철저하게 사명을 따라 살아왔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오늘 본문을 보시면 요나가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째로 사명을 받아서 니느웨로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3장 1절 2절입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그리고 요나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따라 순종한 결과가 오늘 본문 마지막 10절에 나옵니다. 10절입니다. “10.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이 요나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보냄을 받아서 이땅에 온 존재들이다' 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보내신 분의 뜻이 있다는 의미가 있고, 그러니까 당연히 보내신 분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명자로서 이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도 요나처럼 처음에는 불순종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처음부터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제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보면 처음부터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한 아들들은 없기 때문입니다(마 21:28-31, 눅 15:11-32). 하지만 믿는 성도들은 둘째 아들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인생을 점점 알게 되고 그래서 자기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사명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다시한번 사명자의 기회를 가지고 사역을 하는 요나의 모습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준비 해놓으셨던 일을 생각해보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얻을수 있는 교훈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첫째로 다시한번 사명자로서의 기회를 가지게 된 요나가 사역을 하는 모습입니다.

3절입니다.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런데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사명을 주셨을때 요나의 모습을 보시겠습니다. 1장 3절입니다.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을때와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을때 반응을 한 요나의 모습이 다릅니다. 첫 번째는 요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했지만 두 번째는 피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갔습니다. 물론 요나 개인적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었기 때문에 가야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고싶어서 가는 사람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길을 가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아마 우리들중에는 요나처럼 바닷속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죽다가 살아나게 되어 정신이 번쩍들어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나처럼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상당한 아픔과 눈물의 인생길을 겪고 난후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 요나처럼 나중에라도 깨닫고 순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축복입니다. 끝까지 깨닫지 못하고 단단한 껍질 안에 갇혀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이제 사명자로서의 길을 가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도에 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3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니느웨 성은 3일동안 걸어야 한바퀴를 돌수 있는 큰 성읍이었습니다. “니느웨는 사흘동안 걸을만큼 하나님앞에 큰 성읍이더라” 무작정 걸어서 삼일이 걸린다고 한다면 메시지를 전하면서 걷는다면 삼일보다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메시지를 전하다보면 당연히 주변사람들로부터 이런 저런 질문을 받게 될 것이고 그때마다 반응을 하다 보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단지 하루 동안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 마저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4절입니다. “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이것이 요나가 전한 메시지 내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메시지 내용은 구원과 심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심판의 메시지만을 전한 것입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사실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은 죄인이 회개를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지 심판하고 멸망시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이땅의 선교사로 오신 예수님께서 맨 처음에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전하였던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러니까 본래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이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에 있지 심판하고 멸망시키는 것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 자동적으로 심판을 받고 멸망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천국에 대한 내용은 수없이 말씀을 하셨지만 지옥에 대해서 하신 내용은 얼마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선포한 메시지를 보면 구원에 대한 메세지 내용은 없습니다. 심판에 대한 메시지 내용만이 있습니다. 요나는 그냥 걷기만 해도 3일이 걸려야 할 길을 하루만에 행하였고 그리고 메시지 내용도 구원이 아니라 심판에 맞추어서 전했습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그러니까 요나의 순종은 온전한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기가 싫었으니까요. 순종을 안하면 또 얻어맞을까봐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는 갔습니다. 그리고 하루동안 메시지는 전한 것입니다. 순종의 모습을 갖춘 최소한의 순종을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시면 주인이 하인들에게 다섯달란트 두달란트 그리고 한달란트를 맡기고 먼 나라로 떠나는 비유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중에 집에 돌아온 주인이 다섯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아서 갑절의 이윤을 남긴 종들에게 이렇게 칭찬합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입니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여러분 지금 저와 여러분이 하는 일은 그렇게 큰일이 아닙니다. 적은 일입니다. 최소한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큰일로 착각합니다. 많은 일로 착각합니다. 왜요? 내가 그일을 하기 싫으니까요. 그일이 귀찮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큰일이 아닙니다. 많은 일이 아닙니다. 요나가 자기 친척집 마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면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 내내 힘든줄 모르고 열심히 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니느웨로 가는 길과 그 니느웨에서의 하루는 요나에게 굉장히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봉사를 하는 것 그렇게 큰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일이 내게 귀찮고 부담스러우니까 그 일이 내게는 큰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적은 일입니다. 최소한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게 힘들고 귀찮고 하기 싫으니까 그일이 태산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한번 순종할 기회를 주실때는 우리가 큰 순종을 할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고 있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순종이라도 하시기를 기대하십니다. 요나는 자기가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자기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죽기보다 하기 싫은 일을 한시간, 두시간도 아니고 무려 하루종일 한 것입니다. 요나의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요나의 행동은 지금 저와 여러분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온전한 순종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요나는 이를 악물고 원수의 나라인 니느웨에서 하룻동안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래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일은 하나님이 보실때는 원하는 양이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이 요나가 전한 온전하지 못한 반쪽 메시지를 전해들은 니느웨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9절입니다. “9.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누가 알겠느냐...’ ‘누가 알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니느웨의 모습을 보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그 마음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요나가 ”회개를 해서 구원을 받아라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아 멸망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온전한 메시지를 선포했다면 이 니느웨 왕은 ‘누가 알겠느냐’ 라고 하는 자신없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해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고 구원을 받자“ 이렇게 확신있게 백성들에게 말을 했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요나의 모습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사역의 현장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도 하지만 내가 원하는 일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도 나타내지만 내 뜻도 같이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긍휼이지만 우리는 거룩을 외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이지만 우리는 정의를 외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구원이지만 우리는 심판을 외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부족함을 덮어두는 것이지만 우리는 부족함을 드러내는 행동을 합니다. 니느웨라고하는 사역의 현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을 반씩 섞어가면서 요나처럼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감사해야 할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일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반쪽 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온전한 뜻을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

 

이제는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시겠습니다.

본문 5절 6절입니다.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6.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온전하지 않은 요나의 순종과 메시지 내용에도 불구하고 니느웨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금식하며 회개를 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최소한 두가지 종류의 기록을 보면서 그 대답을 얻을수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적인 기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성경에의 기록입니다.

첫째로 역사의 기록을 통해서 대답을 얻을수 있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요나가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를 방문한 시기가 주전 약 760년경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앗수르가 처한 상황이 요나가 전하는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일만한 분위기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앗수르는 국가적으로 매우 힘이 약해져있던 시기이었습니다, BC 768년경에 아스르단 왕이 통치를 하고 있었는데 이 왕이 통치하는 기간에 앗수르는 국력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이 왕이 다스리고 있을때인 주전 765년경에는 니느웨 성에 큰 전염병이 일어나서 수많은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인 BC 763년 6월 15일에는 ‘대낮이 밤중처럼 캄캄해지는 완전 일식이 임해서 백성들 사이에 큰 두려움이 있었다‘ 라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서 그당시 니느웨 사람들은 자기들이 신의 큰 심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두려워하는 분위기 이었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때에 요나가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고 이것을 전해들은 니느웨 사람들은 왕을 위시해서 모두가 다 두려움 속에서 회개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대답을 얻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대답을 얻을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30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세대에 그러하리라”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이 말씀에 대해서 많은 신학자들은 요나와 함께 배를 탔던 사람들이 요나에 대한 소문을 내었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요나가 큰물고기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니느웨로 간 것은 아닙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탓에 상했던 육신과 마음을 추스르고 회복이 되어서 다시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 성경은 그 시간의 갭을 생략하고 계속 문장을 연결시키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 기간동안에 요나에 대한 소문이 니느웨까지 전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에 빠져 죽은 줄 알았던 그 요나가 살아서 니느웨 성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는 거두절미하고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라고 외친것입니다. 이러한 요나의 메시지를 듣었을때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를 하나님의 표적으로, 하나님의 사인으로 생각했다고 예수님께서 해석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당시 니느웨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풍랑을 만났고 그래서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 밥이 되어 죽다가 살아나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으면 요나처럼 심판을 받고 멸망 받게 될 것이다. 요나처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자” 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니느웨 사람들에게 있어서 요나의 표적입니다.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을 하며 회개를 하는 행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두가지 배경 즉 역사적인 배경과 성경적인 배경을 통해서 요나가 니느웨 성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치 못한 요나의 순종을 통해서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의 온전하지 못한 순종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일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온전한 순종을 하지 않아도 좋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하지 못한 순종이라할지라도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순종이라도 하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를 볼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순종할때까지 배우면서 성장하겠다고 생각만 하지 마시고 지금 당장 최소한의 순종이라도 하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의 발만 내디디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준비 작업을 다 해놓으셨다 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최소한의 순종을 할 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오늘 이 본문에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교훈입니다.

10절입니다.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사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정하시고 작정 하신일은 바꾸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하시겠다고 하신 일은 반드시 행하십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시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실때는 축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가 벌을 주겠다고 뜻을 바꾸신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심판을 하고 멸망시키시기로 작정하셨다가 용서를 하시는 것에는 뜻을 바꾸시는 것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이세상 마지막 심판때에 일어나는 장면을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장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의 기도를 했을때 용서하시고 살려주셨던 하나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니느웨 사람들이 그 요나의 표적을 바라보며 회개를 했을때 뜻을 돌이키시고 용서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요나보다도 더 크신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믿고 신앙생활하는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구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시편 23편 6절 말씀을 보시면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수 있습니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내 평생에 선한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평생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가지시고 나를 따라다니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사이의 숨바꼭질 놀이는 계속 되고 있습니다. 애굽의 궁전에서 도망을 해서 40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모세를 시내산 가시덤불에 까지 따라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배를타고 도망가는 요나를 바다에까지 따라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물가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면서 목이 마르고 고통스러운 길을 가는 동안 내내 따라와 마침내 뜨거운 한 대낮 우물가에서 부르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고기를 잡으러 고향으로 돌아갔던 베드를 끝까지 따라가서 부르신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따라오시는 분이십니다. 숨어도 반드시 찾아내시는 주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평생동안 따라오셔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여주십니다. 그 하나님은 내 자동차의 타이어에 바람이 빠졌을때 친절을 베푸시는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수도 있습니다. 뜨거운 한 여름 대낮에 불어오는 시원한 산들바람을 통해서 오실수도 있습니다. 빨갛게 물들인 아름다운 저녁노을의 모습으로 오실수도 있습니다. 내가 일하고 있는 가게에 온 손님의 미소를 통해서 오실수도 있습니다. 위로를 해주는 친한 친구의 대화중에서 오실수도 있습니다. 이제 태어난 아기의 모습을 통해서 오실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배 중에 말씀으로 내마음에 오실수도 있습니다. 지금 내 상황에 딱 맞아 떨어지는 말씀을 들으면서 그리고 상황에 맞는 위로를 받고 도움을 받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낄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감사할일은 요나의 표적보다 더 큰 표적인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이 예수님을 믿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돌이키시고 우리가 구원받고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수 있다는 교훈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얻을수 있습니다.

이제 정리힙니다.

오늘은 요나가 한 일과 하나님이 행하신일 그리고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요나는 온전하지 못한 순종을 했습니다. 삼일동안 해야 할 사역을 하루 동안만 했고 구원과 심판의 메시지 중에서 심판의 메시지만 전했습니다. 이 요나의 모습은 현재 우리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순종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도 완벽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역사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미리 준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구원할 사람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고 천국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얼마든지 자신의 뜻을 바꾸어서 긍휼을 베푸시고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에 대해 늘 감사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의 온전하지 못한 순종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생각하시면서 감사함으로 신앙생활 해나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