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요나 강해7. 분노하는 이유

Author
kgmcc
Date
2021-02-17 14:01
Views
19
본문 : 요나 4장 1-5절

날짜 : 2021년 2월 17일

 

<요나 4장 1-5절>

1.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선물 가운데 하나가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입니다. 희노애락이 무엇입니까?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이 희노애락의 의미입니다. 기뻐할 때 기뻐하고, 노여워해야 할 때 노여워하고, 슬퍼해야할 때 슬퍼하고, 즐거워해야할 때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쁨과 즐거움만이 좋은 감정이고 슬픔과 노여움은 나쁜 감정으로 생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 자체가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누가 언제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좋고 나쁜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해도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이 고통의 눈물을 흘리고 아파한다면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좋은 감정일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화를 내고 슬퍼하지만 그로 인해 억눌리고,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 분노와 슬픔의 감정은 결코 나쁜 감정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희노애락의 감정 가운데서 우리 인간이 가장 관리하기 힘든 감정이 분노의 감정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감정이 희노애락중에서 분노입니다. 그래서 영어 속담에 ‘분노와 위험은 한 글자 차이다‘(Anger is only one letter short of danger)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분노는 나와 내 주변 환경을 위험에 빠트릴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희노애락의 감정중에서 분노에 대해서는 늘 특별관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분노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하면서 살아갈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시면 요나가 분노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요나가 그냥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심히 싫어하고 성내고 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요나가 왜 성내고 있는 것입니까? 자기가 매우 싫어하는 일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분노할 때 그 이유를 살펴보면 대부분 내가 굉장히 싫어하는 일을 겪게 되었을 때인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성을 내고 화를 냅니다. 그리고 분노하게 되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까? 분노가 터지기 시작하면 평상시와 달리 말을 막 쏟아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고 내 말만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하는 내 말과 내 논리는 절대적입니다. 타협이 되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가 됩니다. 요나가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중에서 2절이 제일 깁니다. 요나 전체가 4장으로 되어있는데 이 4장중에서 본문 2절 내용이 가장 깁니다. 본문 2절입니다. “2.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요나가 분노의 말을 막 쏟아냅니다. 아마도 요나는 숨을 쉬기 위해서 잠시 멈추는 것을 제외하고는 쉴새없이 따발총처럼 쏘지 않았을까 제 개인적으로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전해 들었던 이야기 입니다마는 어느 교회서 두 성도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언성이 높아지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주변 성도들이 말립니다. 그러자 싸우던 그 성도중에 어느 한분이 씩씩거리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내가 너를 참아야 천국에 갈수 있다면 나는 차라리 천국에 가지 않을 거야. 나는 천국에 못들어가도 좋아‘ 이렇게 분노가 올라오면 상대방이나 하나님도 눈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결론도 자기가 내려버립니다. 본문 3절입니다. “3.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그래요. 내 말만 주장하고 난 이후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을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내가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에게 어떻게 설득의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상대방을 가장 속터지게 하는 방법입니다. 내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상대방이 무엇인가 말을 할려고 하면 그냥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요나가 이런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저와 여러분에게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때 분노를 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 라거나 그래도 분노가 생길 때는 이렇게 해보라 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배울수 있는 교훈은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산다고 하면서 때로는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하나님께 화를 내고 하나님의 속을 썩게 만드는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본문에서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요나가 왜 그렇게 하나님께 분노를 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없이 신앙생활 해 나갈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나가 그렇게 분노한 이유는

첫째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본분을 망각했기 때문이죠.

2절 전반부입니다. “2.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때에’ 요나가 왜 이런 표현을 했습니까? 니느웨성에 가서 메세지를 전하라고 하는 사명을 받기 전까지 요나는 고국에서 지내왔습니다. 그러니까 요나가 그동안 보고 듣고 그래서 배우며 성장했던 장소는 고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나를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신 이유는 단 한가지이었습니다. 어떠한 죄를 진 죄인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신다는 메시지를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자기를 부르신 가장 중요한 사명을 망각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잊어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사명보다 덜 중요한 것을 붙잡았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조국과 동포에 대한 사랑입니다. 물론 조국과 동포에 대한 사랑은 중요합니다. 조국의 발전과 동포의 안전을 위해서 사역을 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신 사명보다 더 우위에 두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하면 당신 자신의 뜻을 돌이키시고 어떠한 악인들이라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겠다고 하는데 요나는 자기 조국에 대한 사랑이 더 앞섰던 것입니다. 우선순위가 뒤바뀐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도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조국을 위해 기도를 하고 섬김의 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요나를 특별히 구별하시고 택하신 것은 용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보다는 고국 사랑과 동포 사랑을 붙잡은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천국 복음을 위해서 부른 사람이 있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정치 지도자로 부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자기 나라 백성들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니느웨 성 같은 데 신경을 쓰면 안됩니다. 그들의 사명은 나라를 지키는 것이고 백성을 보호하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을 위해서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그 근본적인 핵심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이유중의 하나는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목적은 바로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의도 중요합니다. 거룩함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용서의 메시지는 더욱 더 중요합니다. 이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저와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라옵기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이 근본적인 사명에서 벗어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해나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나가 분노했던 두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의 영광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예가 자신의 명예 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물론 요나가 하나님의 영광이 나의 영광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믿는 성도 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중요한가 자기의 영광이 더 중요한가 물어보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영광이 더 중요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답이 이론과 머리에서 그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실제로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3절입니다. “3.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죽이고 살리는 문제는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물론 요나가 이 사실을 모를리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분노를 하니까 죽이는 권한을 가진 하나님 보다 자기가 더 위의 자리까지 간 것입니다. 죽이라고 명령을 한 것입니다. ‘내가 원하니까 당신은 내 원하는 대로 그렇게 하라‘ 는 것입니다, 요나가 왜 이렇게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어떻게 외쳤습니까?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40일 후에 이 성이 멸망하게 될 것이다 라고 전했는데 니느웨 온 백성사람들이 왕과 함께 금식을 하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바꾸셔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결국 거짓 선지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선지자로서의 자신의 권위가 손상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속이 상하고 화가 난 것입니다.

우리가 직분을 가지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손가락질을 한다고 가정 해보십시다. 저 친구가 무슨 집사야 사기꾼이지, 저 친구가 무슨 장로야 도둑놈이지, 저 친구가 무슨 목사야 삮군 목사지. 이런 소리를 듣게 되면 우리는 굉장히 열을 받고 화가 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다른 목사, 다른 장로, 다른 집사, 다른 권사 욕하고 손가락질 하면 괜찮지만 나를 욕하고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면 우리는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보면 그럴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시다가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면서 온갖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셨는데 우리도 당연히 자존심 상하는 일을 겪게 되어있습니다. 그럴때마다 내가 분노하고 교회를 떠나버리면 이세상에 있는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왜 자존심이 상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왜 기분이 상하지 않으셨고 속이 쓰리지 않으셨겠습니까? 예전에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본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시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하던 사람들의 이빨과 혓바닥을 다 뽑아버리시고 난후에 다시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아버지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텐데 라고 생각했을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수님께서 계속 그냥 십자가에 매달려 그대로 계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하나입니다. 사람들의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판단이 훨신 더 중요하고 올바르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내 자존심이 상하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내 이미지가 상하고 내 속이 조금 상하게 된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하나님의 자존심이 상하게 되는 것에 있습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이 좀 망가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보상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럼으로 내 속이 상하고 내 이미지가 망가지는 것을 이겨 낼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태어났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일이 가장 지혜롭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럼으로 이땅에서 저와 여러분이 가장 지혜롭게 살아가는 길은 내 자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존심을 살리는 일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바라옵기는 내 자존심이 상하고 내 이미지가 떨어진다 할지라도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수가만 있다면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도 그길을 갈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나가 분노했던 세번째 이유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망각해서 입니다.

2절 후반부입니다. “2.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신 하나님, 그리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지금 요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잘알고 있는 요나가 지금분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받은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은혜롭고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뜻을 돌이키사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그 하나님’ 께서 요나 자신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고 자신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그리고 뜻을 돌이켜서 자기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요나는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나 니느웨 성에 사는 사람들이나 하나도 다를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가 필요한 존재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아담과 화와가 타락한 이후 우리 인류 역사에 첫 번째 살인 사건이 바로 가인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가인 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얻음’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창세기 4장 1절입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과 화와는 불순종의 죄로 인해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아들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담과 화와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름을 ‘가인‘ 이라고 지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의 이름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태어났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인이 이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자 분노하고 그 분노로 인해 살인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이사실을 요나가 망각하자 분노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은혜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되이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살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누리게 된 이 은혜를 잊으며 살아갈 때 우리는 쉽게 분노하며 살아가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8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종은 임금으로부터 만달란트라고 하는 큰 액수의 빚을 졌습니다. 한 달란트가 6천 데나니온 이니까 만 달란트이라면 6천만 데나니온이 됩니다. 그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니온니니까 노동자가 6 천만 일동안 일을 하고 모두 모아야 벌수 있는 액수입니다. 6 천만 일을 년수로 계산하면 약 16 만년이 더 됩니다. 우리 인간이 100살을 산다고 해도 1600번은 죽었다가 살아나서 평생 일하고 모아야 벌수 있는 액수입니다. 이곳 미국 하루 일당을 100불로 환산하면 60억 달라가 되는 액수입니다. 그러니까 이세상 그누구라도 그 빚을 갚을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의미가 바로 만달란트라는 단어가 주는 상징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돈을 벌수 있는 직장이나 사업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은혜가 가장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60 억 달러 가량의 의빚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 인생을 대신해서 생명으로 갚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되면 메마르고 강퍅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명심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용서의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디모데 후서 2장 1절 입니다. “1.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기도속에서 강하고’ ‘성경 공부 속에서 강하고’ 가 아닙니다. 은혜속에서 살아갈 때 강한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다는 은혜를 망각한 그 종은 길거리에서 백 데나니온 빚을 진 친구를 만나게 되자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하면서 그 친구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도 임금에 의해 감옥에 갇히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친구는 용서하지 못할 행동을 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도 용서받지 못할 행동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용서할수 없는 그 친구에게 작은 은혜라도 베풀며 살아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내게 주어진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요나가 잘한 점이 있다면 요나는 사람들에게 분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분노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내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못하고 그래서 도저히 참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앞에 내가 가진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가인이나 가룟 유다의 불행은 분노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나 가룟유다에게 일어난 가장 큰 비극은 그들이 하나님앞에 분노를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에게 분노를 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살인 사건이 생기고 자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앞에 분노를 터트렸습니다. 분노를 해서는 안되지만 정말 참을수 없을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앞에 솔직하게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었던 모습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바라옵기는 정 힘들고 참을수 없을 때 사람들에게 가 아니라 하나님앞에 솔직하게 표현할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정리합니다.

오늘 본문은 분노를 다스리고 진정시키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왜 분노를 하는가를 알게 해줍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이유는 첫째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보다는 조국 사랑이나 동포 사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다보니 분노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요나가 분노를 한 것은 자신의 자존심이 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예보다 자신의 명예가 떨어지게 된것에 기분이 상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거짓 선지자로 판단 받게 되는 것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게 되면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이 높여주신다는 진리를 명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요나가 분노한 이유는 예전에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인생을 살아가다가 남들이 던지는 가시로 인해 내게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될 때 분노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십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은혜를 생각하십시다.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이 화가 나서 정말 참기 힘들 때 아들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에게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승리의 신앙생활 해나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