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감당하기 힘든 문제를 만날때

Author
kgmcc
Date
2021-04-21 11:00
Views
377
본문 : 열왕기하 5장 6-8절

날짜 : 2021년 4월 18일

 

 

<열왕기 하 5장 6-8절>

6.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7.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8.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아람나라의 장군 나아만에게 어느날 갑자기 나병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나병은 나아만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권력과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흔들어놓았습니다. 하지만 나아만은 자기의 인생에 찾아온 이 나병을 통해서 겸손해질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아만의 인생에 찾아온 나병은 궁극적으로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에 어느날 갑자기 나병이 찾아올수 있습니다. 그것은 건강의 나병일수가 있고 재정의 나병일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나병일수도 있고 인간관계의 나병일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이 나병은 나에게 염려와 고통과 눈물을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순간을 잘 극복하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아만이 이렇게 고침을 받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일에 축복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사람은 바로 전쟁의 와중에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이었습니다. 이 어린 소녀는 가난하고 배운것도 없었지만 믿음이 있었고 성실했으며 그리고 긍휼을 베푸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의 가정과 아람나라에 축복이 되는 존재로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도 이 어린소녀와 같은 삶의 자세를 지니고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내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존재로 쓰임을 받을수 있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어린소녀로부터 이스라엘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게 되면 나병이 고침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나아만장군은 자기 왕에게 가서 이사실을 전합니다. 그리고 특별 휴가를 받아서 많은 재물을 실고 이스라엘에 옵니다. 그리고 나아만 장군은 아람왕이 써준 편지를 이스라엘 왕에게 줍니다. 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6.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주소서’ 한마디로 자기 신하의 병을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그당시 이 아람나라는 이스라엘 보다 군사력이 더 강한 국가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람 왕이 쓴 이 편지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강대국가로서의 우월감이 있다는것을 알수있습니다. 만일 그당시 아람나라가 이스라엘 나라보다도 약한나라 이었다면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써보낼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도 병나름이지요. 몸살 감기도 아니고 나병을 어떻게 고칩니까? 자기나라 의사들도 못고치는 병을 자기나라보다도 더 작고 약한 나라에게 고쳐달라고 말한다고 해서 고쳐지게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보면 이렇게 감당하기 힘든 문제를 만날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오늘 본문은 두 가지 종류의 반응을 보이고 있는 각각의 사람을 보여줍니다. 한사람은 이스라엘 왕이고 또 다른 한사람은 엘리사 선지자입니다. 이 두사람은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문제에 대한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두 사람이 보이고 있는 다른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엘리사 선지자와 같은 마음자세로 인생을 살아갈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 아람왕이 쓴 편지를 읽은 이스라엘 왕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7절입니다.

7.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이 내용을 보시면 이스라엘 왕이 세가지 반응을 보이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첫째는 분노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그글을 읽고 자기옷을 찢으며’ 그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기 힘든일을 만나서 그히 분노할 때 자기 옷을 찢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괴롭고 슬픈일을 만날때도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이 지금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그만큼 분하고 슬픈 감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입니다. 분노 하면서 옷을 찢었지만 그다음의 어떤 후속조치는 없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종종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범죄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얼마전에 일어났던 정인이 사건이나 구미에서 일어난 세 살난 아이가 죽은 사건들이 그렇습니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행동할수 없는 범죄를 보면서 모두가 다 분노하고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인터넷에 쓰여진 댓글들을 보면 감정적인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죽여라’ ‘그냥 죽이지 말고 굶겨죽겨라’ ‘지구를 떠나게 해라’ 저도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 분노가 일어나고 죽은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앞으로 이와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보다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후속 조치를 취하자고 하는 내용의 글은 찾아볼수 없습니다. 그저 흥분하고 열 받아서 하는 행동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이 자기옷을 찢고 하는 말과 행동이 서로 비슷한 것을 볼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내가 하나님이냐? 라고 반응 했습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이스라엘 왕은 자기 옷을 찢으면서 내가 하나님도 아닌데 어떻게 문둥병 환자를 고치라는 말이냐? 라는 반응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왕이 이렇게 고백한것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지 알고는 있다는 것입니다. 죽이고 살리고 병들게 하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이신줄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적인 차원에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살아가고, 반대로 불신자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살아가는 것을 볼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적인 예화중에 이런 내용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한 교회에서 자기 교회 주변에 있는 술집을 없애달라고 계속 기도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술집이 불에 타서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술집주인이 교회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습니다. 교회 성도들이 술집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자기가 운영하는 술집이 불이 났다라는 것이 소송을 건 이유 이었습니다. 재판 하는날 판사가 그 교회 목사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그 교회에서 이 술집에 불이 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습니까?” 그러자 목사가 대답을 하기를 “예 술집이 불이나기를 기도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판사님, 기도를 한다고해서 술집에 불이 나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술집 주인이 즉시로 항의를 합니다. “아닙니다. 틀림없이 그 교회에서 기도를 했기 때문에 불이 났습니다” 이거 지금 누가 믿음이 더 있는 것입니까? 때로는 믿는 사람들보다도 불신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더 믿고 있는 것을 볼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방나라 사람인 아람왕이나 나아만 장군은 포로로 잡혀온 어린소녀가 하는 말을 듣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이스라엘왕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지식적인 차원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지식적인 차원에서 믿음 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참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내가 사자굴속에 던져지고 불속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주실 것이다라고 믿는 믿음이 살아있는 참 믿음인 것입니다. 내게 순교할수 있는 힘을 주시든지 아니면 사자나 불이 어찌할수 없는 기적이 나타나시든지 해서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하실 것이다 라고 이렇게 믿는 믿음이 참 믿음인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이런 참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왕은 지금 아람왕이 전쟁의 구실로 삼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지금 이스라엘왕이 올바르게 판단하고 있습니까? 잘못 판단하고 있습니까? 잘못 판단하고 있습니다. 아람왕은 지금 나아만 장군의 병이 회복되는 것에 관심이 있지 전쟁을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왕이 왜 이렇게 잘못판단 하고 있습니까? 보이는 문제에 대해서 감정적으로만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을 지식으로만 알고 신앙생활 해왔기 때문입니다. 자, 이렇게 아람왕이 보낸 편지를 읽은 이스라엘 왕은 옷을 찢으며 분노하고 슬퍼했고 전쟁의 구실로 삼고 있는 것으로 잘못 판단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선지자가 보인 반응은 어떻습니까?

8절입니다. 8.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서 이렇게 전합니다.

 

첫째로 왕을 책망합니다.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이 말은 좋은 뜻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왕의 불신앙에 대한 책망하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왕의 신분에서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당연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지 어찌하여 옷을 찢습니까?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의 사람이 억울하고 슬픈일을 당할때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았던 것을 볼수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지 약 150년 후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남 유다의 히스기야 왕에게 항복하라고 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항복하라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는가?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이 너희를 이 앗수르 손에서 구원하여 주지 못하리라” 이러한 내용이 담긴 편지를 읽었던 히스기야 왕은 그 편지를 들고 곧바로 성전에 올라갑니다. 열왕기하 19장 14절 이하에 그내용이 나옵니다. ”14.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15.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16.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히스기야 왕은 성전에 들어가서 그 편지를 펼쳐놓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기도를 마칩니다. 19절입니다. ”19.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이 온 천하만국에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신임을 알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했지만 남 유다는 멸망당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 북 이스라엘 왕과 남유다의 왕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비슷하다고 생각할수 있는 편지를 읽었는데 그 반응이 너무 다른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많은 성도님들 중에도 이렇게 반응이 다른 것을 볼수 있습니다. 내 인생에 이해할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내 인생에 쓰나미가 다가올때 반응하는 모습이 곧 진정한 믿음이라 할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은 자기 옷을 찢고 분노하고 슬퍼하기만 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진심으로 도움을 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불신앙적인 모습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책망을 했습니다. 왜 화만내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 책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문제해결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여기서 그사람은 물론 나아만 장군입니다. 그당시 인간의 힘과 의술로는 고칠수 없었던 나병에 걸린 나아만을 내게로 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문제 해결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생길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있으면 문제 해결은 시간문제입니다. 마태복음 9장을 보시면 4명의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침대에 누이고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4명의 친구들은 구경꾼들이 많아 도저히 예수님 앞에 갈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를 가로막고 있는 구경꾼들 때문에 화를 내면서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문제 해결도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붕이 보인 것입니다. 이 네명의 친구에게 지붕이 보이게 된 것은 그들에게는 문제가 생겨도 그 문제가 해결될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세리장 삭개오도 마찬가지입니다. 키는 작은데다가 구경꾼이 많아서 지나가는 예수님을 볼수 없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해결될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삭개오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문제 해결의 길인 돌 무화과 나무(뽕나무)가 보였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문제는 생길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피할 수가 있는가가 아닙니다. 흥분하면서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길이 반드시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면 지붕이 보입니다. 그러면 돌 무화과 나무(뽕나무) 가 눈에 들어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문제 해결의 길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우선 나아만을 자기에게로 데려와야 한다는 해결의 첫단추가 보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문제를 주실 때 해답이 없는 문제를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해답을 가지고 문제를 주십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생길 때 문제의 크기를 보지마시고 이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남의 유익을 위한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행한 기적을 보면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위한 기적인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남의 유익을 위할 때 일어나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마시고 싶으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겠습니까?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니까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능력을 자랑하고 싶어서 병든자를 고치고 죽은자를 살리셨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중에서 가장 큰 기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기적입니다. 이 십자가의 기적을 통해 죽었던 저와 여러분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사망의 길을 가던 우리가 생명의 길로 옮겨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남의 유익을 위한 행동을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이스라엘 왕이 나아만 장군의 문제로 인해서 분노하고 괴로워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게 합니다. “그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왜요? 그사람이 바로 이스라엘 왕에게는 골치꺼리이고 문제꺼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남의 유익을 위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김경수씨가 쓴 '미쳤다는 말을 들어야 후회없는 인생이다‘ 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 책의 저자인 김경수씨는 서울 강북구청 7급 공무원입니다. 그리고 김경수씨는 시간이 있을때마다 국내외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를 해서 완주해온 아마추어 마라토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김경수씨가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고 하는 중국 고비 사막 마라톤 대회에 참석하기로 마음을 먹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마라톤 경기는 길이가 254km 로서 낮에는 섭씨 45도이고 밤에는 영하 5도가 되는 사막과 산을 6박 7일 만에 통과해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험한 마라톤 경주대회입니다. 그런데 이 마라톤 대회를 준비하는 김경수씨에게 하루는 이용술씨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전화 내용은 고비 사막 경주에 나와 같이 출전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용술씨는 젊은 청년시절 친구들 싸움판에 끼어들다가 각목에 눈을 맞아서 시력을 잃어버린 시각 장애자이었습니다. 이 사정을 알게 된 김경수씨가 그당시 마흔세살인 자기 보다 한 살이 더 많은 이용술씨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무엇을 믿고 저와 같이 뛰자고 합니까?” 그러니까 이용술씨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김경수씨 얼굴 모습은 볼수 없지만 선한 목소리는 듣을수 있습니다. 그 선한 목소리를 들어보면 선한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제가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에 김경수씨는 차마 거절을 하지 못하고 그날이후 퇴근해서 저녁마다 만나 같이 훈련을 했습니다. 한 개의 줄을 가지고 같이 묶어서 앞에서 김경수씨가 뛰고 뒤에서 이용술씨가 따라옵니다. 그리ㅗ 방울소리로 좌로 우로 스탑하고 전진을 하면서 발을 맞추는 연습을 오랫동안 합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중국 고비사막대회에 출전합니다. 두사람이 끈으로 한몸이 되어서 6박7일동안 뛰면서 김경수씨가 이용술씨에게 가장 많이 한말은 ”이형 나를 믿지“라고 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힘들어 하는 이용술씨를 볼때마다 김경수씨는 이용술씨에게 ’이형 나를 믿지‘ 이형 나를 믿지’라는 말을 수십번 수백번 되풀이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험하다고 하는 고비사막을 완주합니다. 그리고 완주를 하고 난후에 김경수씨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사실 시각장애자인 이용술씨가 아니었다면 중간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포기하고 싶을때마다 이용술씨를 보면서 나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저렇게 앞이 안보이는 이용술씨는 얼마나 힘이들까 생각을 하니까 그때마다 내가 가진 어려움을 이겨낼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용술씨가 아니면 포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이스라엘 왕처럼 불신앙적인 모습으로 살아갈때가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이용술씨처럼 내눈앞이 깜깜해지는 사건을 만나게 될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저와 여러분 주위에 김경수씨와 같은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저와 여러분은 중국 고비사막과 같은 험한 인생 광야를 믿음으로 완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나요?

또한 인생길을 가다가 보면 김경수씨처럼 나의 도움이 필요한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도움을 주는 시간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도움을 주시는 시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김경수씨가 “저는 사실 이용술씨가 아니면 도중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라고 고백한 것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이손이 예수님의 손이 되고 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 될 때 그리고 내 발이 예수님의 발이 될때 아버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그냥 두시겠습니까?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내눈에 보이는 것은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와 기적을 내가 경험하게 되는 축복의 순간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헙니다. 바라옵기는 이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와 같은 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의 역사를 볼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