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하기 힘든 요소들
<열왕기하 5장 9-12절>
9.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유태인들이 즐겨보는 지혜의 책인 탈무드를 보시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루는 어느 제자가 선생 랍비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부자와 현자중에 누가 더 위대합니까”
그러니까 선생 랍비가 당연히 이렇게 대답을 하겠죠. "그거야 물론 현자가 더 위대하지." 그러자 그제자가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 부잣집엔 학자도 현자도 많이 드나드는데 어째서 현자의 집에는 부자들이 드나들지 않는 것입니까?" 이 제자의 질문에 랍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현자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부자는 돈만 알았지 지혜도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야."
자 오늘 본문을 보시면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만 지혜는 별로 없는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사람이 바로 아람 나라 장군 나아만장군 입니다. 이 나아만은 부자일뿐만 아니라 권력과 명예까지도 가진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세상 부러울것이 없는 사람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아만에게 어느날 갑자기 나병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자기집에서 일을 하던 이스라엘 출신인 어린 소녀의 말을 듣고 선지자를 만나 나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와서 왕을 만납니다. 이때 엘리사 선지자는 하인을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서 나아만 장군을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전달합니다. 그래서 이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가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9절 말씀입니다. 9절입니다.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지금 나아만이 자기 병을 고치러 엘리사에게 가고 있는데 말들과 병거들을 데리고 갑니다. 나아만이 말들을 데리고 가는 이유는 우리가 이해 할수 있습니다. 많은 양의 금은 보화와 의복들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것을 실고 갈 말들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군병들까지 엘리사가 사는 마을에 데리고 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나아만은 병 고치러 가는 것이지 전쟁을 하러 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 하고 싶어 하는 나아만의 마음을 엿볼수 있습니다. 지금 이 나아만은 나병에 걸려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양의 금은 보석과 군사들을 데리고 다님으로서 나병에 걸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감추어볼려고 하는 심리를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얼마나 가졌는가 내가 어떤 신분에 있는가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에스겔서 46장을 보시면 성전에서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왕이라고 해서 따로 특별히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백성들과 똑같이 드렸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계급과 신분을 보시는 것이 아니고 심령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눈에는 모두가 다 똑같이 죄인들입니다. 자기 죄를 대속할 숫양 한마리를 가지고 하나님앞에 가서 죄사함을 받아야 할 죄인일 뿐입니다. 에스겔서 46장 10절 입니다. “10. 군주가 무리 가운데에 있어서 그들이 들어올때에 들어오고 그들이(무리들이죠) 나갈때에 나갈지니라” 그러니까 제사를 드릴때는 군주라고 해서 특별히 대우해주지 않고 백성들과 똑같이 행동을 하게 했습니다. 요즘에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옛날에는 대부분 교회에서는 장로님들이 앉는 자리가 따로 있었습니다. 다른 교회는 모르겠지만 제가 다녔던 교회에서는 교회 강대상 오른쪽에 장로님 석이 있었고 왼쪽에는 성가대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배를 드릴때 성가대석과 장로님석을 볼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가대석쪽을 보면 그래도 은혜가 됩니다. 하얀 가운들을 입고 있어서인지 천사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석을 보면 기도하시는 지 묵상을 하시는지 아니면 주무시는 지 대부분 눈을 내리깔고 앉아계십니다. 도대체 그 자리에 앉으셔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 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앞에 나아갈때는 내가 가진 신분과 직분이 필요없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아야 할 죄인들입니다. 지금 나아만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솔직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많은 말들과 군사들과 함께 가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나아갈 때 주시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 쉽지 않다고 하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을 할 수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순종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할지라도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경험할 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요소는
첫째로 자존심인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 10절입니다.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나아만이죠)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이 나아만장군은 엘리사가 보낸 하인을 통해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라고 명령을 들었습니다. 아니 이 나아만이 누구입니까? 그당시 강대국가인 아람나라의 제 2인자인 군대장관입니다. 그렇다면 미리 나와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환대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나아만 자기가 그냥 빈손으로 왔습니까? 굉장히 많은 양의 금은 패물과 귀한 의복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환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줄 것은 주고 받을것은 받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두가 다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나아만은 문전 박대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화를 내고 돌아갈려고 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엘리사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그가(엘리사이죠) 내게로 나와 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치유 기도를 한후에 자기 병이 난 자리에 손을 대어서 고쳐줄 줄 니이만 장군은 알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보지도 못하고 하인의 입을 통해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시오’ 라고 하는 명령을 들은 것입니다. 혼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많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푸대접을 받으니까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그래요.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바로 자존심입니다. 상한 자존심은 나를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합니다. 사실 나병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듣게 된 것은 얼마나 복되고 기쁜 일 입니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기만 하면 병고침을 받을수 있는데 가서 씻으면 되잖아요. 뭐 돈이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이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것 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환대하여주지 않고 내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들에게 더 집중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더 귀를 기울이게 하고 관심을 가지게 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되지 않도록 분위기를 유도 합니다. 어떤사람은 은혜로운 말을 해도 그사람을 알기 때문에 은혜가 안될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은혜로운 말을 하면 그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아멘하고 은혜를 받을수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은 들어라 하지만 이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본받지 말아라” 그러니까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경에 맞는 말을 하고 은혜로운 말을 하면 아멘 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보다는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그사람이 어떤 약점이 있다면 그사람이 성경에 맞는 말을 해도 자신의 귀를 닫아버리는 행동을 할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지혜롭고 성숙한 사람은요, 메신저 보다는 선포되는 메시지 내용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그사람의 삶이 문제가 있고 또 그사람이 내게 섭섭한 행동을 했다 할지라도 지금 그사람 입에서 올바른 말과 성경적인 말이 나올때는 아멘 하는 것이 바로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그래야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해나갈수 있습니다. 그사람의 삶은 그사람의 문제 이고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자존심의 문제에 걸려 더 크고 가치있는 일을 하지 못해서는 안됩니다.
마태복음 15장을 보시면 가나안 여인이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앞에 데려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보통때 같으면 그정도 상황이면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면서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예수님께서 그렇게 행동을 하지 않으십니다. 이 가나안 여인보고 무엇이라 합니까? “자녀들에게 줄 음식을 개에게 주는 것은 마땅하지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가나안 여인 보고 개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말씀입니까? 자기 딸이 귀신 들린것만해도 부끄럽고 상처가 되는 데 거기에다가 개라고 말씀을 하시니까 이 여인의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되고 자존심이 상하겠습니까?
자존심이 상하고 상처가 되었지만 이 가나안 여인은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럴때 예수님께서 이 가나안 여인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여러분 큰 믿음은 오래된 믿음이 아닙니다. 직분에 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믿음도 아닙니다.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씀도 그대로 받아들일수 있는 믿음이 큰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행하시는 기적을 볼수 있습니다. 자존심을 극복한 사람이 삭개오처럼 돌무화과 나무(뽕나무) 위에 올라갈수가 있습니다. 자존심을 극복한 사람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이라도 씻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발가벗김을 당하고 침뱉음을 당하고 조롱거림을 당해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을 세우는 결과와 순종의 결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종하심으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실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자존심을 극복하고 생명을 바치시면서 까지 순종을 하신 그 십자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어 천국에 살아갈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정말 자존심이 상하고 견디기 힘드는 일이 생길때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래서 자존심을 극복하고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실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므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요소는
둘째로 내 생각인 것을 본문은 말씀합니다.
11절입니다.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내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와서....’ 내생각에는 나아만 장군은 자기가 이 시골마을에 도착을 하면 엘리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환대하여 줄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서 두손을 들고 하나님을 향하여 치유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자기 병이 난 부분을 만지면서 낫게 해줄줄 알았다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아니겠습니까? 자기가 그냥 맨손으로 온 것도 아니고 정말 귀한 금은 보화를 많이 가져왔잖아요.
그런데 우리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순종을 통하여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의 역사에는 반드시 순종이라고 하는 재료가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순종을 통해서 역사를 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맞는 경우에 순종을 잘합니다. 그래서 내 생각과 하나님이 생각이 맞으면 순종하는 일에는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의 생각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아만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자기생각과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내생각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경 말씀에 그렇다고 한다면 내 생각을 내려놓을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요소
세째로 환경인 것을 보여줍니다.
12절입니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이 나아만이 순종하지 못하고 화를 내고 떠났던 또 다른 이유는 환경에 있습니다. 자기나라에는 이 요단강보다 훨씬 더크고 더 깨끗한 아바나강과 바르발강이 있다는 것입니다. 강물에 씻어서 내몸이 깨끗하게 된다고 한다면 차라리 훨씬 깨끗하고 훨씬 더 아름다운 우리나라 강에 가서 몸을 씻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요단강은 폭이 좁고 수심이 얕고 흐름이 빠릅니다. 그래서 물이 맑지 못하고 물이 좀 흐립니다. 그러니까 흙탕물이 흐르는 그 요단강물에 몸을 씻지 못하겟다는 것입니다. 그당시 애굽 사람들은 아람나라에 있는 아바나 강과 바르발 강 이 두강을 보고 너무나 아름다워서 황금의 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나아만은 좋은 환경에 있는 두 강을 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좋은 환경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는데 방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요. 좋은 환경이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힘들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옛날 30-40년 전 보다는 훨씬 더 좋은 환경에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더 좋은 교회에 다닐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귀찮으면 집에서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수가 있습니다. 참 좋은 환경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 좋은 환경이 순종을 어렵게 합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모양만 성도인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좋은 환경에 있기를 원하는 것 아니라 저와 여러분을 순종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그리스도인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주민의 90퍼센트이상이 기독교인 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전라도 신안군 증도라는 곳입니다. 이섬에는 섬마다 있는 굿하는 집이나 점치는 집이나 사찰이 없습니다. 그리고 주말 오후가 되면 모든 식당이 문을 닫고 주일날 교회에 갈 준비를 합니다. 전체 주민 2300여명이 거의 대부분 교회를 가는데 11개 교회중 6개 교회가 자립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섬을 천국의 섬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문준경 여자 전도사님 때문이라고 모든 주민들이 고백을 합니다.
문준경 전도사님은 1891년도에 전라도 신안군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나이 17살에 이 증도로 시집을 오게 됩니다. 하지만 혼례를 치루는 첫날밤부터 남편에게 소박을 맞게 됩니다. 이미 남편에게는 사귀고 있었던 다른 여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20년동안 남편에게 버림을 당하는 생과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루는 우연히 자기 집을 찾아온 전도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이후 가까운 지역에서 이성봉 목사님이 강사로 오신 부흥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서울에 있는 경성 성서 학원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지금 서울 신학교 전신이죠. 그리고 공부를 마치고 다시 고향 신안에 와서 나룻배를 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을 합니다. 그당시 크고 작은 섬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부탁을 받아 짐꾼의 역할도 하고 우체부 역활도 하고 약사 의사 노릇을 하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 일년에 아홉컬레씩 고무신을 갈아 신을 정도로 이섬 저섬 돌짝발을 돌면서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 같이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때 이 문 전도사님의 영향을 받아 목사님이 되신 분 중에는 대학생 ccc를 창립하신 김준곤 목사님을 비롯해서 이만신 목사님 정태기 목사님 이봉성 목사님등 30여명의 목회자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문 전도사님의 나이 59세가 되던해 6.25사변을 만나게 됩니다. 교인들이 북한 공산당 군인들에게 잡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사람들이 말리는데도 그 사람들을 놓아달라는 말을 해야 한다며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공산당 군인들에게 몽둥이로 매를 맞고 난후 총탄에 맞아 순교를 하게 됩니다. 이 문 전도사님의 장례식에는 그당시 가장 큰 장례였던 김구 선생의 장례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섬은 민족의 성지가 되었고 90퍼센트 이상이 예수를 믿는 천국의 섬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시간 현재 교회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영상 끝난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환경이 좋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리시기까지 순종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문준경 전도사님이 계신 환경이 좋아서 순교를 하면서 까지 순종을 하신 것도 아닙니다. 좋은 환경이 순종을 더 잘 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환경이 중요할수도 있지만 하나님 눈에는 하찮은 것입니다. 환경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바꾸실수 있으십니다. 환경을 더 힘들게 할수도 있고 더좋게 할수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저와 여러분이 순종할수 있는 마음이 되어 있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내 자존심, 내 생각, 그리고 이 환경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체험할 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