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마가복음1. 마가와 침례 요한 배경

Author
kgmcc
Date
2021-06-16 10:52
Views
22
본문 : 마가복음 1장 1-7절

날짜 : 2021년 6월 16일

 

<마가복음 1장 1-7절>

1.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2.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침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5.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6.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이번주 수요일 부터 마가복음 강해를 시작하게 됩니다.

종교개혁자인 루터가 이런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마치 아기 예수가 마구간에 있는 구유에 누워있는 것과 같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마굿간의 구유는 별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바로 아기 예수가 그 위에 누워 있기 때문에 소중하고 귀한 구유가 된것처럼 성경도 예수님이 그 중심에 계시기 때문에 소중한 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이나 신약을 볼 때 언제든지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이야기, 모리아 산에 독자 이삭을 바칠때도 예수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는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속에서 예수를 만나니까 중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속에서 나오는 하나 하나의 사건마다에서 예수를 찾아야 하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때 예수님의 얼굴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복음서 라 할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우리 인간의 몸이라고 한다면 복음서는 바로 얼굴 부분이라 할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로마서를 썼다 할지라도 복음서에 비할바는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그 사역을 보다 더 잘 이해할수 있기 때문에 로마서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4복음서 중에서 이 마가복음은 물론 마가가 성령 감동을 받고 기록 하였습니다. 이 마가 복음은 4 복음서중에서도 그 내용이 가장 짧습니다. 군더더기나 수식하는 내용이 별로 없다가 보니까 내용이 빨리 진행되어지는 속도감을 느낄수 있습니다. 그래서 4복음서 중에서 가장 큰 생동감과 박진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4복음서 중에서 최초로 기록된 복음서가 바로 마가복음입니다.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했으니까 마가를 예수님의 제자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만 이 4 복음서중에 마가와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마태와 요한만이 예수님의 제자이죠.

 

이제 마가가 살아온 배경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입니다. 골로새서 4장 10절입니다. 10.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생질이 누구입니까? 생질은 누이의 아들을 의미하죠. 그러니까 바나바의 누나나 바나바의 여동생의 아들이 바로 마가입니다. 아무래도 그당시 마가가 어린아이가 아니고 청년이니까 바나바 여동생 보다는 누나의 아들일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해봅니다.  마가의 외삼촌인 바나바는 사도행전에도 나오지만 신앙이 아주 좋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가의 어머니도 역시 아주 신앙이 좋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마가는 신앙이 아주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사도행전 12장 12절입니다. 12.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여기서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유대식 이름입니다. 우리에게는 마가라는 이름이 더 많이 알려졌는데 이것은 그당시 이방인들의 전도를 위해서 로마식 표현인 마가가 더 많이 사용 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마가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성경이 알려주지 않아서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만 마가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인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했던 곳이 바로 이 마가의 집입니다. 사실 마가의 집이라기 보다는 그 어머니 마리아의 집인 것이죠. 우리는 마가의 다락방 이라고 말합니다만 사실은 마가 어머니 마리아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시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난 이후에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를 하다가 오순절날 성령강림하시는 사건을 맞이하게 됩니다. 120명이 모일수 있는 다락방이니까 굉장히 큰 저택이었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가는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신앙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부러워하는 ‘엄친아‘에 속했던 사람이 마가이었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시게 되면 바울과 바나바가 1차전도 여행을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마가도 같이 따라 갑니다. 13장 5절입니다. 5.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여기서 요한은 좀전에 살펴보았지만 마가 요한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할때 마가 가 같이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 아마 삼촌 바나바가 조카인 마가에게 ‘마가야 너도 같이 가자’ 라고 권유를 해서 따라나섰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마가가 전도여행 도중에 중도 하차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13절입니다. 13.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여기서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전도여행 도중에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버린 것입니다. 마가 요한이 왜 중도에 하차를 했는지 그이유를 우리는 확실히 알수 없습니다. 아마 부유한 환경에서 살다가보니 힘들고 낯선 전도여행이 힘이 들 수도 있었을 것 입니다. 아니면 향수병에 걸렸든지 혹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돌아갈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추측이 있었지만 성경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서 확실히 알수 없습니다. 어쨌튼 2년이 넘는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에 왔다가 다시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하였습니다. 그때 마가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15장 37-41절 입니다. 37.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바나바는 사람 중심적으로 사역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바울은 주로 일 중심적으로 사역을 하는 사람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할수도 있지 않는가 마가에게 다시한번 기회를 주자’ 라고 주장하였고 바울은 ‘못데려간다. 왜냐하면 마가를 데리고가면 전도 여행에 차질이 올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데리고 가자 안된다’ 라고 하다가 바울과 바나바가 아주 크게 다투고 갈라져서 각자 전도여행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랬던 마가가 나중에는 신앙이 성숙하게 된 모습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디모데 후서 4장 11절입니다. 11.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마가는 이제 바울에게 부담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유익한 사람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마가가 이렇게 바뀌게 되었을까요? 바나바의 영향을 받았을까요? 그럴수도 있겠지만 바나바는 2차 선교 여행후 얼마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을 초대교회 여러 기록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 마가는 그후 베드로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게 됩니다. 벧전 5장 13절입니다. 13.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내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여기서 베드로는 마가를 내아들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아들이라는 것이죠. 초대교회 당시 문서를 보면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관의 자격으로 수행했던 기록들이 여기 저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가는 베드로를 따라다니면서 베드로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신앙이 성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잘아시다시피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적이 있는 제자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실패와 넘어진 사람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실패의 경험을 가진 베드로가 마가의 마음을 얼마나 잘 이해했겠습니까? 이 베드로를 통해 마가는 상처와 아픔이 있던 신앙이 회복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이제 마가가 복음서를 썼을 때 그당시 사회적 배경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AD 64년 7월달에 유명한 로마의 대화재 사건이 있었습니다. 일주일동안이나 불이 계속되었던 불길은 로마시 3분지 2이상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당시 로마황제인 네로가 로마시를 새로 재건하기 위해서 불을 질렀다고 하는 소문이 시민들 사이에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분노하고 있는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네로 로마 황제와 로마 정부는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당시 신흥종교이었던 그리스도인들이 불을 지른 방화범이라고 하는 소문을 냈던 것입니다. 그이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방화범으로 체포되어 로마 경기장으로 끌려가 사자밥이 되거나 화형에 처해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를 떠나 소아시아로 흩어져 동굴속에서 숨어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숨어지내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소책자들이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가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좀전에 살펴보았지만 이 마가복음은 4복음서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책으로서 그 내용이 가장 짧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 연대는 로마 대화재가 일어난 그다음해인 AD 65년도에서 67년 사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마가복음은 그당시 박해를 피해 숨어지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진 최초의 복음서이자 소망의 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소책자로 된 이 마가복음을 읽었을 때 얼마나 큰 기대감으로 가득차 있었겠습니까? 이 마가복음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1.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렇게 시작되는 마가복음을 보면서 그당시 숨어지내던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은 소망으로 가득차 있었을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도 이렇게 소망의 마음을 가지고 마가복음을 대할수 있으시길 소망합니다.

그러면서 곧바로 소개하는 인물이 바로 침례요한입니다.

이 침례요한은 예수님 보다 6개월 일찍 태어나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사역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입니다. 본문 5-7절을 보시면 침례요한이 행한 사역이 나오고 있습니다. 본문 5-7절입니다. 5.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6.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본문은 침례요한에 대해 세가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의 소명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7.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가(침례요한이죠) 전파하여 이르되’ 무엇을 전파하였나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 분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기 힘들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당시 신발끈을 푸는 일은 종이 하는 일중의 하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침례 요한은 예수님의 종으로서 해야 할일을 감당하기도 버겹다 할 정도로 예수님을 높이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요.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자기 소명이 무엇인지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수 있습니다. 아무리 잘먹고 잘살고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소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육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루 하루 생명을 이어가는 생물학적인 존재인 것 밖에 없습니다.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와 가야할 목적지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침례요한처럼 자신의 소명을 알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침례 요한은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6절입니다. 6.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당시 낙타털옷과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살아간 것은 그만큼 평범하고 단순하게 살았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석청은 야생 꿀을 말하는데 이 메뚜기와 석청은 그당시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구할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침례요한이 살았던 장소는 광야이었습니다. 이렇게 침례요한은 정말 단순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침례요한이 이렇게 살았던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가신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입니다. 침례요한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단순한 삶을 살아갈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뭔가 자꾸 늘어나고 불어납니다. 왜그렇습니까? 부르심에 대한 소명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 시간이 흐를수록 삶이 복잡해지고 군더더기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요즘엔 인터넷으로 인해서 우리는 너무 복잡한 사회 커뮤니케이션 체제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 는 ‘이 현대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비만 상태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정보, 과학, 문화. 경제 모든 면에서 풍요롭다 못해 팽창해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정보가 풍요롭다 못해 넘쳐흐르고 있고 스마트폰, SNS 등에서 진실과 거짓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4월달에 한강 공원에서 친구와 술을 마신후에 숨진 대학생 손정민 사건에 대해서 서로 상반되는 정보가 너무나 많이 흘러나옵니다. 손정민의 친구가 죽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는 영상이 유투브에 홍수처럼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반대로 손정민 학생이 실수로 익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는 영상들도 쉽게 접할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는 이 커뮤니케이션의 체제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혼돈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사순절 기간동안 만이라도 일주일에 하루는 스마트폰 금지 하는 날을 정하기도 하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라도 해서 한번쯤은 단순한 삶을 살아볼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는 광야의 빈들에서 살면서 소명자의 사역을 감당했던 침례요한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침례요한은 들러리 인생을 살았습니다.

5절입니다. 5.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그당시 많은 사람들이 침례요한에게 가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어떤 학자는 그당시 요한에게 침례를 받은 사람이 약 30만명 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교회 목사님이라 할지라도 침례 요한만큼 침례나 세례를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침례요한은 그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존경을 받던 침례요한 가까이 예수님이 등장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할수 있습니다. 침례 요한이 교회를 세워서 한창 부흥되고 있는데 그 근방에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침례요한이 세운 교회를 떠나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로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침례요한의 마음한 구석에는 여러 지역중 하필 내가 있는 이 근방에 교회를 세우시나 라고 하는 섭섭한 마음이 생길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침례요한의 제자들이 침례요한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선생님 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로 오지 않고 예수가 세운 저 교회로 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니까 저희들 마음이 참 섭섭하고 허전하네요’ 그때 침례요한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한복음 3장 27절에서 29절입니다. 27.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러니까 신랑이 신부를 맞이해서 기뻐하는 것을 곁에서 보는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기뻐하는 것처럼 침례요한은 그렇게 기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침례요한은 신랑인 예수님 들러리로서의 삶을 살면서도 기뻐하고 만족하였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침례요한을 사용하셨습니까?

누가복음 3장 1,2절입니다. 1.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자 본문을 보시면 많은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보통사람들이 아닙니다. 황제가 등장하고 총독이 등장하고 분봉왕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본문은 1절 2절 전반부를 다 생략하고 2절 후반부만 기록해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이렇게만 소개해도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구태여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이유는 바로 그당시 세상의 권력자들인 황제나 왕들에게서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 지도자나 종교 지도자들 중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광야의 빈들에 살고 있던 침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화려한 궁궐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크고 화려한 성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초라하고 메마른 빈들에 서있던 침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명예나 직분의 유혹에서 벗어나 오직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빈들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가진 것 없고 자랑할 것이 없는 빈들에 서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었습니다. 소리의 사명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있습니다. 메시지를 전달한 다음에는 무엇을 합니까? 그다음에는 침묵 하는 것 입니다. 왜요? 침묵을 해야 소리를 듣은 사람이 내용을 생각하고 깨달을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리는 외치고 난 다음에는 침묵하는 것입니다. 침례요한은 소리를 외치고 침묵했습니다.

'외치고..., 침묵하고..., 외치고..., 침묵하고...,'

이렇게 침례요한은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무대에 오르자 침례 요한은 세상 무대뒤로 퇴장한 것입니다. 영원히 침묵한 것입니다. 잘 아시다 시피 침례요한은 분봉왕 헤롯에 의해 목베임을 당하게 됩니다. 한 여인의 요청에 의해서 침례요한의 목은 잘려져서 소반그릇에 담겨지게 됩니다. 세상사람들의 눈에 침례요한의 마지막은 너무나 비참하고 처참한 죽음으로 보일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평생을바쳤지만 그의 마지막은 너무 처참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높이는 삶을 살아가는것에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은 계속적으로 낮아지다가 생을 마감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살았기에 그는 축복된 인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내가 있는 환경이 화려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광야와 같은 빈들이라 할지라도 내가 지금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위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의미가 있고 축복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내가 지금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남들에게 자랑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할지라도 나를 구원해주시고 영생을 가지고 해주신 예수님을 높이는 일에 기쁨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