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마가복음3. 갈릴리에 오신 이유

Author
kgmcc
Date
2021-06-30 11:08
Views
336
본문 : 마가복음 1장 12-15절

날짜 : 2021년 6월 30일

 

<마가복음 1장 12-15절>

12.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4.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시고 난후에 복음을 전파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기뻐하는 자라.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성령 충만 받은 상태에서 광야에 가시게 됩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을 보시게 되면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 데, 예수님이 사탄으로부터 세가지 종류의 유혹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탄이 유혹하는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첫째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로 떡 덩어리가 되게 하라’ 하는 것이고 둘째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하나님이 보호해주실 것이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유혹은 ‘네가 나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세상 만국을 너에게 주겠다’ 는 것 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이 세가지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볼 내용은 예수님이 왜 시험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나온 내용을 가지고 대답을 하자면 성령 때문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12.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이 장면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먼저 마태복음 4장 1절입니다. 1.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그리고 누가복음 4장 1절입니다.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태복음에서는 ‘성령에게 이끌리어’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는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 마가복음이 다른 복음서보다 더 원색적이고 생동감이 있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성령은 저와 여러분을 부드럽고 온유하게 이끄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몰아붙이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몰아내셨다‘ 는 의미는 바로 모든 환경과 조건이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건은 사도바울에게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시면 사도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사도바울은 서북쪽에 위치한 큰 도시인 비두니아로 갈 계획이 있었는데 성령님이 그 길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막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7절입니다. 7.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예수의 영 즉 성령이 허락하지 않으시는 바람에 사도바울은 비두니아 지역으로 가지 못하고 남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래서 무시아 지역을 지나 드로아 지역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날 밤에 마게도냐 사람이 손짓하면서 ’이리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 라고 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세웠던 계획을 버리고 유럽으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사건을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을 쓴 저자라고 한다면 이렇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성령에게 이끌리어 유럽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마가복음을 쓴 저자라면 이러한 사건을 이렇게 기록할 것입니다. ‘성령이 사도바울을 유럽으로 몰아 내셨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았던, 아니면 성령이 우리를 몰아내셨던지 간에 그표현 방법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첫째로 어떻게 하면 성령충만 받을수 있습니까?

지난주에 성령충만에 대해서 술 취함과 비교해서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만 충만이란 ‘무엇에 의해서 지배를 당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래서 술 취한 사람이 술에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것처럼 성령 충만 한 사람은 성령에 의해 내 마음이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려고 할 때 지금 내가 성령으로 충만한지 아니면 내 생각과 내 욕심으로 충만한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종종 우리가 성령 충만을 생각할때 성령 충만하게 되면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나는 아무생각이 없고 무아지경으로 빠져 행동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성령충만은 유기적인 영감으로 나타납니다. 유기적인 영감이라는 말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 경험과 재능 등 이러한 모든것이 총동원 되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지식이나 재능이나 성품 이 모든 것을 다 참조해서 가장 정확하고 가장 올바르게 결정할수 있도록 하신다 라고 믿는 것이 바로 유기적 영감이라 할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을 받게 되면 우리가 술 취한 사람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평상시보다 나의 이성과 분별력이 더 뛰어나게 되고 더 초롱초롱 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결정할때를 정확하게 알고 그리고 그 결정을 단호하고도 확실하게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 주변사람들이 뭐라고 말해도 내마음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는 성령님이 내가 가진 지식과 내가 가진 재능과 내가 가진 성품을 총 동원하셔서 결정을 내리시도록 나를 몰아넣으셔서 결정을 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손익계산을 해서 결정을 내렸다면 내 주변에 서 나에게 말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결정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손익계산을 해서 내린 결정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몰아세우셔서 하신 결정이기 때문에 확신있게 신앙생활을 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말에도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내리는 결정은 결코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와 말씀으로 충만해 져야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기도와 말씀과 찬양으로 성령 충만해 진 후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신앙생활 해나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내용은

성령님이 인도하셨지만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기도와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떤 결정을 내렸다고 가정하십시다. 그렇다면 그 결과가 모두 만사형통한 것입니까? 사실 그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13절입니다. 13.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그래요. 예수님은 분명히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고 갔습니다. 성령이 예수님을 몰아내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가나안이 아니라 광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곳에서 40일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는 굶주림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춥고 낮에는 뜨거운 환경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잘못하면 들짐승에게 잡아 먹힐수도 있는 위험한 환경이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갔는데 그 장소가 좋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으로 편안하고 좋은 길이 내앞에 놓여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받지 않았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길을 갔는데 오히려 일이 더 잘 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요나가 니느웨 성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갈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다시스로 가기위해 욥바 항구에 가니까 때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길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냥 배를 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일이 잘 풀려 질때가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구름기둥을 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착한 곳은 홍해 바다이었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군사들이 쫓아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갈수도 없고 뒤로 물러 설수도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갔지만 그곳에 시련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수도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일이 잘 풀리고, 잘 풀리지 않는 것을 보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받지 못했다 라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비록 그곳이 광야이고 홍해 바다 앞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광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더욱 느끼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광야이기 때문에 가나안땅이라고 하는 목적지를 바라보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홍해바다 앞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다가 갈라지고 그 바다를 마른 육지처럼 건너게 되는 기적을 경험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랐다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곳이 얼마나 좋으냐 그곳이 얼마나 편안하고 안전한 곳이냐 하는 것보다 비록 환경이 좋지 않다 할지라도 이곳으로 나를 인도하신 주님의 뜻이 있다고 믿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바라옵기는 성령의 인도하신 곳이 비록 견디기 힘든 환경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뜻이 있다고 믿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시험은 테스트가 될 수가 있고 또 유혹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13.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사십일을 광야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낸 40년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만약에 애굽에서 400 년이 넘게 종살이를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의 광야 생활을 하지않고 곧바로 가나안땅에 들어갔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도 노예 근성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가나안땅에 들어가서도 독립하지 못하고 종살이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40년 동안의 거친 광야 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땅에 들어간 이후에 가나안 부족들과 싸우면서 약속한 땅을 쟁취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광야생활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는 동안에 가졌던 마음 자세에 있습니다. 광야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지냈습니까? 감사하고 순종하면서 지냈습니까? 아닙니다. 원망과 불평하며 지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광야의 역사는 또 다른 말로 원망과 불평의 역사라고 표현할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하면서 넘어졌지만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어 내십니다. 하나님은 시험하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테스트가 될 수 있고 동시에 유혹이 될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니‘ 라고 할 때 그 시험은 ’페이라스모스‘ 라는 헬라어 단어가 사용되어졌습니다. 이 ’페이라스모스’ 의 단어에는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test이고 또 다른 하나는 temptation입니다. 시련(trial) 이라는 뜻도 있다는 분도 있지만 시험을 주는 주체에서 생각해보면 크게 Test 와 Temptation 이 두 가지입니다. 다시말해서 ‘페이라스모스’ 하는 분이 하나님이실때는 시험 test의 의미가 있고 사탄 마귀 일때는 test가 아니라 temptation 유혹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시험하실 뿐입니다. 하지만 사탄 마귀는 인간을 시험하지 않습니다. 유혹할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시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더욱 성숙시키시고 강건하게 하시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복 받을 대상이 되게 하셔서 복주시기 위함에 있습니다. 하지만 사탄이 주는 유혹은 사람의 믿음을 파괴하고 망하게 하기 위함에 목적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입니다. 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시험은 영어성경을 보시면 temptation 유혹으로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보다 시험 이라는 단어 대신에 유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더 정확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유혹을 받을때에 내가 하나님께 유혹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유혹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유혹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것이 더 정확한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 13절 말씀도 13.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에서 시험대신에 유혹을 사용해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시며’ 라고 하는 것이 더욱 정확한 의미가 됩니다. 또 주기도문을 보시면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Lead us not into temptation) 여기에서 영어성경을 보시면 템프테이션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유혹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라는 의미가 더 정확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사탄이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페이라스모스(시험)’ 으로 의도하신 것을 ‘유혹’ 이 되도록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입니다. 선악과는 시험이 될수 있고 유혹이 될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니신 의도는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면서 이 우주만물과 에덴동산과 인간을 지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먹을수 있고 마음대로 할수 있지만 먹지 못하는 선악과를 보면서 아담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이 모든 복을 누릴수 있는 피조물임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선악과는 시험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선악과를 유혹으로 변질시켰던 것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 이렇게 유혹한 것입니다. 욕망을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광야에서 일어난 사건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Test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예수님을 세가지 내용으로 유혹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수없는 시험을 만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육신의 질병으로 시험이 올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시험이 될수가 있고, 사탄의 유혹이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질병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이 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에서부터 멀어져가는 유혹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Test가 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물질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유혹이 되기도 합니다. 가정의 문제, 사업의 문제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문제 이 모든 것은 시험이 될수 있고 유혹이 될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옵고’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할 때 이겨낼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실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광야로 인도하셨다면 그 분이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을 받아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도우시고 힘주신 것처럼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그 고통의 순간들을 이겨내게 하십니다. 야곱처럼, 여호수아처럼, 다윗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이 사회에서 겪고 있는 이 모든 시험에서 이겨낼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픔이고 지금은 고통이라 할지라도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사탄의 유혹이 아닌 주님의 시험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보이고 들리는 환경만을 보면서 원망하고 불평하며 지냈습니다. 물이 없다. 물이 쓰다. 고기가 먹고 싶다. 옛날이 좋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해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리고 날마다 하늘이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게 되는 일에 감사하면서 지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도 좋고 그들에게도 좋은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언제나 성령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시험이 올 때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서 그것이 시험이든 유혹이든 감사하면서 이겨낼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본문 14절을 보시겠습니다. 14.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요한이 왜 잡히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본문에는 없습니다. 나중에 마가복음 6장을 보시면 요한이 잡힌 이유와 그후에 요한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사실을 아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의 시대는 끝났고 예수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알리는 것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구약의 시대가 끝나고 신약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메시지를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구약시대때부터 이어져 오던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어져가고 있는 것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자,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십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그리고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그런데 왜 갈릴리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 오셔서 복음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갈릴리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입니다. 이 갈릴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왕으로 있을 때 이 갈릴리 땅을 두로의 왕 히람에게 주었습니다. 유대인의 땅이 이방인의 땅이 되어버린 아픔이 있는 마을이 갈릴리 땅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갈릴리 사람들은 자기나라 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이후 유대인들은 이 갈릴리를 ‘이방의 갈릴리’ 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5절입니다. 15.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이방의 갈릴리여’

자기 나라 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서러운 역사가 있는데 그이후로도 이방나라의 취급까지 받아야 했던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갈릴리는 역사적으로 볼 때 아픔과 슬픔이 있었던 땅입니다. 이 갈릴리지역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탓에 주변의 강대국들이 패권 다툼을 할 때마다 전쟁에 휘말리고, 점령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갈릴리는 점점 더 가난하고 소외된 땅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중심지로 부와 권력이 집중된 도성이었다고 한다면, 갈릴리는 정말 찢어지게 가난하고 소외된 그리고 아무런 소망이 없는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저마다 다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아픔과 상처가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본문 15절입니다. 15.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이방의 갈릴리’ 와 같은 저와 여러분을 찾아와 주신 확실한 증거는 바로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런 저런 죄악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우리는 죄악된 삶을 살아왔음을 고백하고 회개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그럼으로 우리는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향해 내 지은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이시간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는 ‘이방의 갈릴리’ 와 같은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하십시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까지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앙 생활해 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