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마가복음6. 모두 다 놀랐지만

Author
kgmcc
Date
2021-07-21 10:57
Views
314
본문 : 마가복음 2장 1-12절

날짜 : 2021년 7월 21일

 

<마가복음 2장 1-12절>

1.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크게 세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집니다. 지금 스크린을 보시게 되면 이렇게 북쪽에 갈릴리 가 있고 그밑에 사마리아 그리고 제일 아래 남쪽에 유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셨던 이 갈릴리 지역은 여기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사람이라고 말하면 이 갈릴리 호수 주변에 위치한 여러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가버나움, 가나, 나사렛, 디베랴, 벳세다 이런 마을들이 갈릴리 호수 주변에 위치해 있었고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통틀어 갈릴리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세미나에서 강사가 전국에서 온 훈련생들을 교육시키는 도중에 ‘여기 있는 분들중에 경상도 출신들은 한번 손을 들어보십시요’ 라고 말했다고 하면 부산, 대구, 경주, 울산, 마산 이런 지역 출신의 사람들이 손을 들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수 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마을에서 성장하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활동을 하시면서부터 그 무대를 갈릴리 나사렛 마을에서 갈릴리 가버나움 마을로 옮기십니다. 그당시 가버나움은 갈릴리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고 번화한 도시이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 앞부분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수 일후에...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수일전에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수있습니다. 어떤 사역을 하셨습니까? 지난 몇주동안 살펴보았습니다만 안식일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회당 예배를 마치고 시몬 베드로 집에 가시게 되었는데 거기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십니다. 이날 해가 져서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시몬 베드로 집에 몰려온 병든 자와 귀신 들린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는 사역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그다음날 이른 새벽에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를 하시는데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마가복음 1장 37절입니다. 37.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전날 밤늦게까지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셨는데 이제는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시몬 베드로 집에 몰려온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8절입니다. ‘38.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그리고 난 이후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떠나 갈릴리 지역 여러 회당을 다니시면서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39절입니다. 39.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그리고는 며칠후에 다시 가버나움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난리가 났겠죠. ‘예수님이 다시 오셨다’ 라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온 것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2.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이 많은 사람들 중에는 며칠전 아침에 베드로 집에 갔다가 예수님이 다른 마을로 가시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사람들은 이번에는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을 받으리라 굳게 다짐을 하고 왔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이 사람들이 많이 모였던 것입니다. 그때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맨 네명의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본문 3절입니다. 3.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하지만 너무 사람들이 많아 이 네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앞에 데려갈수가 없었습니다. 4절 전반부입니다. 4.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무리들 때문에’ 예수님앞에 갈려고 했는데 무리들 때문에 갈수가 없었습니다. 장애물을 만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네 명의 사람들은 포기 하지 않고 그 집 지붕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줄로 매달아 예수님이 계신곳 앞으로 내립니다. 그래서 이 중풍병자의 병이 낫게 되었다는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략적인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이 중풍병자의 병이 낫게 되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바로 이 중풍병자를 데려온 네명의 사람들이 가진 믿음 때문이었다 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5절 전반부 입니다.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 여기서 그들은 물론 중풍병자를 데려온 네명의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척일수도 있고 아니면 마을사람이나 친구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 중풍병자를 데려온 네 사람이 가진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도 이 네사람이 가진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회복되고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네명의 사람이 가진 믿음은,

첫째로 같은 목표를 가진 믿음입니다.

3절입니다. “3.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자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네 사람들중에 아무나 한사람을 붙잡고 이렇게 물어보았다고 가정해보십시다. “지금 당신들이 여기에 왜 왔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네사람이면 네사람 모두 가 다 똑같은 대답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중풍병자의 병을 고칠려고 여기에 왔습니다”. 이 네 사람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이 중풍병자를 데려왔던 것입니다. 그래요. 목표가 없는 행동은 우리를 쉽게 피곤하게 만들고 쉽게 포기하게 만듭니다. 권태롭게 만들고 방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목표의식이 분명한 사람들은 쉽사리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에 부닺치게 되어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까? 평범한 사람이지만 목표가 있는 사람입니다. 평범한 사람이지만 목표가 있는 사람은 위대해질수 있습니다. 하지만 목표만 있다고 해서 다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죠.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가 가진 다른 목표 때문에 힘들고 지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네 명의 친구들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에 성경에 나올만큼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시면 네 사람이 힘을 합해 한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한사람이 한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이 쉬울까요? 아니면 네 사람이 한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이 쉽겠습니까? 네사람이 한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지만 사실은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한사람이 그 한사람을 데리고 오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됩니다. 하지마 네사람이 한사람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서로 서로 시간을 맞추어야 합니다. 서로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시간과 그 외 여러 조건들을 다 맞추기 위해서는 서로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서 네 사람중 한 두사람은 자기에게 알맞는 시간이나 자기에게 좋은 여러 조건들을 양보하고 희생을 해야 네 사람이 같이 행동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같은 목표를 향해 서로 양보할 것은 양보하면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귀합니다. 이렇게 같은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의 힘과 의지만으로는 힘듭니다. 오래가지 못합니다. 성령님이 함께 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이라고 하는 확신속에 거할때만 같은 마음을 품고 인내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먼저 주님의 뜻을 찾고 그 주님의 뜻 안에서 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이 네명의 사람들에게는 문제 해결을 찾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4절입니다. “4.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인생을 살아가면서 문제를 만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식문제, 배우자 문제, 직장문제, 사업문제 건강문제, 경제문제, 신앙의 문제 이렇게 여러 가지 문제를 만나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문제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를 가지고 그만둘 핑계와 변명으로 삼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네 명의 친구들도 얼마든지 핑계를 댈수 있는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도저히 데리고 갈수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네 사람중에 어느 한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야 오늘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안되겠다. 다음에 다시 오자” 만약에 한사람이라도 이런 말을 했다면 분위기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분위기는 전염이 됩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분위기는 전염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긍정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한사람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네 사람들이 가진 믿음을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정하는 믿음은 문제점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문제 해결책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문제를 해결할수 없었던 핑계와 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극복할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는 믿음을 예수님은 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네명의 친구들은 모두가 다 한마음으로 문제 해결책을 바라보았습니다. 한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귀한데 이 네사람들은 모두가 다 같은 마음으로 문제 해결책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법을 생각해낼수가 있었던 것이죠.

지붕위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는 일은 한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나올수가 없는 일입니다. 왜요? 자기 혼자 힘으로 이 중풍병자를 어떻게 지붕위로 데리고 올라갈수가 있겠습니까? 네 명의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생각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 모두가 다 문제점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같이 문제 해결책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갈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그들은 문제를 예수님에게 맡기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3절에서 5절까지 말씀입니다.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여기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예수‘입니다. 3절 마지막 부분에 ’예수께로 올새‘ 4절 전반부에 ’예수께 데려갈수 없으므로‘ 5절 전반부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각절 마다 ’예수‘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자 이제 네명의 친구들은 자기들이 할수 있는 일은 다했습니다. 같은 마음, 같은 목표를 가지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문제를 만났지만 포기하지 않고 문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같이 지붕위에 올라갔고, 같이 지붕을 뜯어내었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네 모퉁이에 줄로 매달아가지고 똑같이 내려놓았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한쪽이 조그만 기울어져도 그 중풍병자는 침상에서 떨어질수도 있습니다. 어느 한사람이 한눈을 팔고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게 되면 그 중풍병자는 큰 부상을 당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중풍병자를 안전하게 예수님 앞에 내려 놓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병이 들었던 한 친구를 살리기 위하여 이 네명의 친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예수님을 감동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중풍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이 네 사람이 가진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이 행동을 해나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만나게 되면 문제 해결책을 찾아서 같이 행동을 해나가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행동할수 있는 믿음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는 궁극적인 해결책은 주님이 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역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할수 있는 일을 다하고 난후 그리고 내가 할수 없는 일에 대해서 주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을 다 하지 않고 주님께 맡기는 것도 문제가 있고 내가 다 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병을 낫게 하는 것이나 죄를 사해 주는것 은 우리가 할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문제 해결에 결정적으로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주님이 인정해주시는 일을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 외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네명의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에게 맡겼을 때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중풍병자가 행한 은밀한 죄까지도 용서해주십니다. 5절입니다. 5.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중풍병자는 네 사람의 도움으로 예수님 눈앞에 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중풍병자는 누운채 당연히 예수님쪽으로 눈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눈이 맞추치는 순간 그분의 입에서 ‘네가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을 듣는 순간에 중풍병자는 처음에 굉장히 놀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었던 그 어둡고 은밀한 죄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쁨과 감사가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자신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했던 은밀한 죄이었겠습니까? 그 죄로 인해 사탄으로부터 괴롭힘과 정죄함을 받아온 탓에 이 중풍병자는 자기 마음에 평강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던 죄이었지만 예수님은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눈이 맞주치는 순간 용서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는 죄 사함에 대한 선포를 받아들이자 마자 그동안 가슴속에 꽉 막혀있던 응어리가 확 풀리게 되면서 마음에 평강과 생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 죄사함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만 경험하는 감격스런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이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 앞에서는 그 어떠한 죄라도 용사하심을 받을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치루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치셨는데 어떻게 용서하시지 못할 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많은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는 데는 관심이 없고, 단지 병 고침을 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 하실때는 사람들에게 아무 감동이 없습니다. 오히려 수군수군 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7.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런데 예수님은 이 무리들이 기진 생각을 아시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본문 8절과 9절입니다. 8.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어느것이 쉽겠느냐’ 어느것이 쉽겠습니까? 뭐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믿음이 충만하신 여러분앞에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있다고 하십시다. 그 맹인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믿기만 하면 당신이 지은 그 어떤 죄라도 다 용서해주십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예수님 이름으로 말하노니 지금 당장 보게 될지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쉽겠습니까? 말하기는 전자가 훨씬 더 쉽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은 그 어떤죄라도 용서하십니다!’ 이렇게 말하기기 훨씬 더 쉽습니다.

맹인이 눈을 뜨고 안뜨는 것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만, 죄를 용서받고 받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거야, 죄 사함받았다!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쉽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 증명할수 있겠어. 나도 그 말은 할수 있겠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대답은 안했지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일어나 네 상을가지고 집으로 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10절과 11절입니다. 10.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중풍병자가 침상을 들고 일어나 나갑니다. 본문 마지막 12절입니다. 12.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앞에서 나가거늘’

이 중풍별자가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다 놀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 교훈

이 사건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놀랐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들으면서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라는 말씀 후에 중풍병자에게 일어난 모습을 보면서 많은 무리들은 놀라워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게 부딪치게 될 때 우리는 놀라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이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평가하게 됩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대할때 늘 나 자신에게 향한 것이라고 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3절과 24절입니다. 23.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여러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거울입니다. 거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함에 있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이 나 자신에게 하신 말씀인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놀라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많은 무리들이 그렇게 했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한가지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중풍병자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죄사함을 받았습니까?‘ 그들은 중풍병자가 일어나 자기 침상을 가지고 가는 것을 보면서 놀라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죄사함을 받았습니까? 모두 다는 아니겠지만 훗날에 죄사함을 받게 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으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용서함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해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주시는 것에 있습니다. 이일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10절입니다. ‘10.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그리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전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9절입니다. 9.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어느것이 쉽겠느냐’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이 질문에 맞는 대답을 하는가를 알아볼려고 하는 것에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병을 낫게 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죄사함의 권세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질문 하신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도 죄사함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 도중에 지은 죄가 있다면 그때 그때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 평강의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십시다. 그리고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네 사람이 가진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또 다른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일에 같은 마음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최산을 다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불신자 일수도 있지만 가정일수도 있고, 가게 일수도 있고 신앙공동체 일수도 있고 건강일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주님에게 맡기는 일입니다. 거기까지 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하실수가 있으신 주님에게 내게 맡겨진 내 이웃의 문제, 내 가정의 문제 내 직장의 문제 내 신앙 공동체의 문제 내 건강의 문제를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네 사람처럼 저와 여러분에게 맡겨진 중풍병자가 무엇이든지 간에 같은 마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예수님앞에 맡기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해결함을 받게 되는 역사를 경험할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