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마가복음8. 어느것이 옳은가

Author
kgmcc
Date
2021-08-04 02:27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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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가복음 3장 1-6절

날짜 : 2021년 8월 4일

 

<마가복음 3장 1-6절>

1.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3장입니다. 이 마가복음 3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는 세번 그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논쟁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 주실 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데 어떻게 인간이 죄를 용서한다고 할 수가 있느냐?’ 라고 하면서 그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문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논쟁은 세리이었던 마태를 제자 삼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당시 유대인들은 세리와 창녀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죄인 취급을 했는데 예수님께서 세리를 제자 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는 일을 한다고 시비를 걸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으로서 안식일에 대한 논쟁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대한 논쟁은 지난주에도 살펴보았습니다. 마가복음 2장 23절입니다. 23.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손으로 잘라서 손바닥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왜 먹었을까요? 마가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태복음을 보시면 배가 고파서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걸었던 것입니다. 2장 24절입니다. 24.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안식일에 하지 못할일을 하나이까?’ 제자들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제자들이 도둑질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신명기와 레위기를 보면 배가 고플 때 밭에 들어가서 손으로 이삭을 따서 먹는 행위는 허용하고 있습니다. 곡식에 낫을 대고 자르면 도둑질이 되지만 손으로 따서 먹으면 도둑질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한 행동은 도둑질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안식일에 노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당시 이스라엘은 안식일에 추수 노동과 탈곡 노동을 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손으로 밀을 딴 것은 추수 노동이요, 손으로 비빈 것은 탈곡 노동이라고 시비를 건 것 입니다. 이런 비판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구약에 다윗과 제사장 아히멜렉 에게 있었던 한 사건을 예를 들어 답변하십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전에 자신을 죽일려는 사울왕을 피해 아히멜렉 제사장이 있는 곳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때 다윗과 그 일행은 삼일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히멜렉 제사장을 만나자마자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 드렸던 진설병 떡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그 일행은 제사장과 그 자손들만 먹을수 있었던 그 진설병 떡을 다같이 나누어 먹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실제로 일어난 이 사건을 예수님은 예로 드신 것입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규례와 율법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질이다’ 라는 것입니다. 본질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살리는 것이 본질입니다. 우리가 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그것은 구원을 주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본질과 핵심은 바로 생명을 살리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윗과 아히멜렉 제사장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말씀한 것은 바로 생명을 살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에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규례가 있고 율법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는 것이지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정리를 해주십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마가복음 2장 28절입니다. 28.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이말씀은 내가 곧 안식일을 만든 하나님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는데 이것이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3장 1절 보시겠습니다.

1.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한쪽 손 마른 사람이 회당에 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십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고 있다가 안식일날 해야 할일과 하지말아야 할 율법의 내용을 들고 나오면서 또 문제 삼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절입니다. 4.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것이 옳으냐, 어느 것이 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하느냐?’ 이것이 예수님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규례나 형식보다는 본질이나 내용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에게 휴식을 주어서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당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죽이는 악한 일을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그당시 바리새인들이 가진 문제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본문을 살펴보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동안 바리새인들이 가진 것과 같은 문제가 있지는 않는지 한번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자, 안식일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가진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1.악을 행하는 일입니다.

4절 전반부입니다. 4.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어느것이 옳으냐... 예수님이 이렇게 물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보시기에 바리새인들은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악한 행위인 것입니까? 두가지로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첫째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늘 비판과 정죄하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 16절 보시겠습니다. “16.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바리새인들은 지금 잔치집에서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잔치집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먹고 있으면 일단은 좋은 말로 시작을 해야 정상적이고 상식입니다 “야 음식을 많이 준비하셨네요.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일단 이렇게 말을 덕스럽게 시작 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이 모든 절차를 생략하고 던진 첫마디가 정죄하는 말 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이 얼마나 냉정하고 날카롭습니까? 그리고 그다음 24절을 보십시다. “24.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사실 아이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인데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밀밭사이를 지나가면서 이삭을 그냥 손으로 잘라 먹었겠습니까? 그것도 안식일에 말입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동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먼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야 너무 배가 고팠던 모양이구나. 참 안되었다” 이런 생각이 먼저 들어야 정상인 입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쳐 버릴수 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나 주변 환경은 다 무시해버리고 말로 정죄를 한 것입니다. 물론 때때론 올바른 신앙적인 질책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남을 정죄하는 식으로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악한 일인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의 차이는 평상시에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 달려있습니다. 잠언을 보면 미련한 자는 칼로 찌르는 것 같이 함부로 말을 하지만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요. 우리는 모두가 다 지혜로운 말 선한 말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말을 사용하며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행동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악했던 것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2.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손마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면서 보고 있었습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말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신에 행동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알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회당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관심이 있는 것은 누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나? 에 있었습니다. 심판자나 감독자의 모습을 가지고 회당에 온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감독자의 마음을 가지고 교회 여기 저기 비판하고 평가를 하고 다니는 성도들을 볼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행동은 모두 악한 행위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예수님께서는 악하게 보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진 문제점은

두 번째로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한 것입니다.

4절 후반부입니다. 4.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당시 바리새인들은 규례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해왔습니다. 6절 입니다. 6.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여기서 헤롯당은 헤롯왕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헤롯당은 친 로마적인 경향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유대주의 자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반 로마적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헤롯당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서로 마음을 같이 했던 것입니다. 그들중에서도 바리새인들이 훨씬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예수를 죽이는 일에 앞장서서 행동하고 있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실 이 바리새인들은 본래 부터 나쁘고 악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구약과 신약시대에 약 400년 동안의 중간기가 있었습니다. 이 400년 동안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고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이 중간기 시대에 하나님의 율법을 철처하게 지키면서 살아가는 ‘하시딤’ 이라고 불리워지는 집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시딤의 후예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다고 많은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올바르게 살아갈려고 노력을 하는 선한 사람들이라 할 수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선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동안 규례와 형식에 얽매이면서 살아가다보니까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규칙과 형식에만 매어서 살아갈 때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남을 죽이는 행동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이 사람을 죽일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한다고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구하는것과 죽이는 것 어느것이 옳으냐?’ 예수님이 이렇게 질문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바리새인들이 사람을 죽이는 행동을 하며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까? 두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5절 전반부입니다. 5.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이 '완악하다' 라고 하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 자기만의 생각으로 굳어진 마음의 상태를 성경은 '완악하다' 라고 말씀 합니다. 이렇게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 때문에 주변사람들이 유쾌하지 못하고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을 경험하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완악한 마음은 공동체를 무너지게 하고 교회와 가정을 무너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완악함 즉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생각이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독단적인 신앙태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더 심각한 문제 이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영어로 dogmatism이라 합니다. 이 독단적인 신앙은 주로 어떤 특별한 신앙체험을 한사람 중에서 많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환상을 보거나 기적을 경험하거나 아니면 40일 금식 기도를 한사람 들중에 이런 도그마티즘이 많이 나타납니다. 특별한 신앙체험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동안에 특별한 신앙체험을 하는 일이 사실 필요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와 똑같은 신앙체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독단적인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도그마티즘 입니다. 오늘날 오순절파 계통인 순복음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신앙생할을 하고 있는 성도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감리교에서는 예수를 믿고 물 침례를 받고 난이후 다시한번 성령 침례를 받지 않으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침례를 다른 교파에서는 성령 충만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인하는 것이 아니죠. 그리고 장로교에서는 캘빈이 주장한 5대 강령을 믿지 않으면 올바른 신앙인이 아닌것처럼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각 교파들이 주장하는 교리들은 성경에 있는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자기들이 내세운 교리를 절대화시켜 버리는 것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만든 교리의 틀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당시 바리새인들은 독단주의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안식일의 핵심은 안식일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하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셨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 인간의 축복과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나의 축복과 나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일날 교회에 나아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제하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축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안식일을 지킬수가 있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십계명중 제 4계명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하게 지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 라고 하는 규례가 나오게 된 것이죠. 이 규례는 객관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다 적용이 가능합니다. ‘안식일날 집에서 몇 미터이상 나가면 안된다. 몇 파운드 이상을 들면 안된다. 허리를 몇도 이상 굽히면 안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일을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해서는 안된다‘ 이런 식으로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바리새인들이 만든 이러한 규례가 그다잇 모두 234개 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새로운 케이스가 생길때마다 언제든지 더 늘어날수도 있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날 유대인들이 무엇인가 할려고 하면 이것이 안식일에 해도 돠는 일인가? 하지말아야 하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 얼마나 스트레스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휴식과 회복을 위해서 안식일을 주셨는데 바리새인들은 이 234개의 규례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따지면서 사람들을 얽어매고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규례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규례는 구체적인 내용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시킬수 있어서 아주 공평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규례를 절대화시켜서 지키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얽매고 생명 마저도 죽이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당시 종교적인 풍습중에 장로들의 유전이 있었습니다. 그중의 하나인 ’고르반‘ 은 매우 신앙적인 동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림‘이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물질을 소유하고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목적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신앙적인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일체 그 물건에 손댈 수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첼로 연주자가 있다고 하십시다. 그 연주자에게는 여러 가지 첼로가 있는데 그 첼로 악기 중에서 가장 비싸고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한 첼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때만 사용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 그 첼로는 ’고르반‘ 이 되어서 하나님께 예배드릴때만 사용지는 것입니다. 다른 세상 음악이나 파티에는 그 첼로를 사용할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주 신앙적인 동기에서 ’고르반‘ 제도가 시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본래의 의미가 시간이 흘러갈수록 변질이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나이가 들어 일을 못해서 끼니를 거르고 살아간다면 자식이 부모님을 먹이고 봉양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자녀의 도리입니다. 자식이 부모님에게 필요한 의식주 해결을 하면서 봉양해야 하는데 자식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라고 말하면 부모 봉양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렸다는데 부모님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냥 죽이나 먹고 살아가셔야죠.

이렇게 우리가 교리나 형식을 너무 절대화 해서 신앙생활 해나가면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것입니다. 오늘날 이곳 미국에서도 교리적인 내용을 너무 절대화 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살리는 일보다는 교리나 신앙적으로 너무 쉽게 정죄하고 손가락질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은 어떠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5절 후반부입니다. 5.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여기 본문에 나오는 손마른 사람은 태어날때부터 손마른 사람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손이 마비가 되어 사용할수가 없게 된 사람입니다. 누가복음을 보시면 이사람은 오른 손이 마른 사람이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외경에 속하는 히브리 복음서를 보게 되면 이 손마른 사람은 돌을 깍는 석공 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일을 힘들게 하다가 오른 손이 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고 가장이 일을 못하게 되니까 그 가족들이 먹고 살아가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형편에 처한 손마른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도 역시 이 손마른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는 마음이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2절입니다. “2.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바리새인들은 손마른 사람을 고치면 율법을 어겼다고 고발하기 위해서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지신 마음과 얼마나 다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불쌍한 손마른 사람의 손을 회복시켜서 그사람 뿐만아니라 그 사람에게 딸린 식구를 살리는 것에 있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복음 이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이 복음입니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복음입니다. 얽매인 자를 자유하게 하고 살리게 하는 것이 복음적인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살아간다고 하면서 복음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율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판을 하는일을 하면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2장 22절입니다. 22.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새포도주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낡은 가죽부대는 율법과 교리를 의미합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하는 힘이 아주 강해서 낡은 부대에 담으면 발효하는 힘에 의해서 부대가 터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복음은 살아서 운동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율법이나 교리의 그릇으로 담을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한일과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복음을 담고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새 부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오랜 한 사람일수록 바리새인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목에 힘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입만 열면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면서 살아가다가 결국은 낡은 가죽부대가 터지게 되듯이 말년에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남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손 마른 사람은 물론 그 사람의 손에 달린 가족들의 인생도 살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일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아 붙잡히시고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범한 이단자로서 그리고 신성모독죄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셔야 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때문에 오늘날 저와 여러분도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기 보다는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라옵기는 남은 생애돌안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기 보다는 예수님처럼 남을 살리고 회복시키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며 신앙생활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