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마가복음12. 비유가 아니면

Author
kgmcc
Date
2021-09-01 01:55
Views
11
본문 : 마가복음 4장 26-34절

날짜 : 2021년 9월 1일

 

<마가복음 4장 26-34절>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30.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3.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종교개혁자인 루터가 이런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마치 아기 예수가 마구간에 있는 구유에 누워있는 것과 같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마굿간의 구유는 별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바로 아기 예수가 그 위에 누워 있기 때문에 소중하고 귀한 구유가 된 것 처럼 성경도 예수님이 그 중심에 계시기 때문에 소중한 책이 되었다는 의미 입니다.

이러한 원칙에서 생각해본다면 성경 전체 내용이 다 중요하고 귀중하지만 그중에서도 더 중요한 것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4 복음서라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4 복음서 내용 중에서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가장 중요합니다. 쉽게 예를 들어본다면, 우리 인간의 몸에 달린 각각의 지체들은 모두 다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손가락 하나만 다쳐도 고통스럽고, 머리카락 하나가 뽑혀도 눈물이 날 정도로 따끔 거립니다. 이렇게 우리 몸에 있는 각각의 지체들은 온전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내가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부득불한 경우에는 오른 손을 자를 수가 있고 또 머리카락을 다 밀어버릴수도 있습니다. 가장 귀하고 중요한 내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나는 그보다 덜 귀한 손을 자르거나 머리카락을 밀어버릴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나의 이 목은 잘라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원리로 성경의 내용은 모두가 다 소중하고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살펴보면 보다 중요한 내용들은 대부분 비유로 말씀 하신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곧 예수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시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을 말씀하시면서 겨자씨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본문 30절과 31절입니다. 30.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하실 때 비유를 참 많이 사용하십니다.

본문 34절 전반부입니다. “34.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정말 중요한 내용을 가르치실 때는 대부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시간에는 예수님께서는 왜 비유라는 방법을 통하여 말씀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비유의 말씀을 사용하시는 것입니까?

첫째로는,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은 하는 것은 차라리 말을 안한 것만도 못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잘 알아 듣을수 있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다. 말을 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을 해야 합니다.

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 인간이 예수님과 같은 영적인 능력과 지적인 수준이 있다면 예수님 일일히 말씀할 필요도 없이 한번에 보여주시고 그러면 우리는 한번에 다 알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그렇지 못하니까 사람이 알아들을수 있는 말씀을 주님이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원 한것에 대해서 시간적인 것으로 말씀을 해야하고, 초월적이고 경험 하지 못한 하늘나라를 우리 인간들이 이곳 세상에서 경험한 것으로 바꾸어 말씀 한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변을 가리키시면서 ‘저 들풀을 보라’ ‘저 공중의 새를 보라’ 그리고 ‘저 농부가 씨 뿌리는 것을 보라‘ 이런 식으로 주변의 눈에 보이는 것을 비유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다 듣는 사람들이 쉽게 알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비유의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비유를 사용하신 것은

알게 하기 위한 것 만이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모르게 하기 위함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4, 15절입니다. “14.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져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무슨 의미입니까? 마음이 열린 사람에게는 알게 하고 반대로 마음이 완악한 자들에게는 모르게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택한 사람들에게만 비유에 관하여 해석을 해주신 것입니다. 본문 34절입니다. 34.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이렇게 모르는 사람은 계속 모르는 상태에서 있게 하기 위해 예수님게서는 비유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눅 13장 32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여우에게 가서 말하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당시 헤롯왕의 별명이 여우이니까 헤롯왕을 두고 한 비유 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헤롯 왕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면 정치적인 문제에 걸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우에게 가서 말하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그럼에도 문제 삼을 수가 없습니다. ‘헤롯왕을 여우라 말했다’ 고 하면서 붙잡으면 오히려 그사람들이 힘들게 됩니다. ‘여우에게 가서 말하라’ 고했지 ‘헤롯왕이 여우이다’ 라고 말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여우이다’ 라고 해석하고 붙잡은 사람이 감옥에 들어가기 때문에 부득불 무시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튼 비유는 예수님에게 올무를 씌울려고 하는 마음이 완악한 자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비유는 알아 듣을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는 알게 하고 마음이 삐뚤어지고 완악한 자에게는 모르게 하기 위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살펴보았지만 4가지 비유의 밭을 말씀 하신후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 12절입니다. 12.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마태복음 13장 11절을 보시면 같은 내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1.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믿는 너희에게는 허락되어 알게 되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게 된다는 것’ 입니다.

그럼으로 허락된 사람에게는 알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모르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 께서는 비유의 말씀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진리를 구체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진리를 추상화하기를 좋아합니다. 인간의 사상이나 철학, 심리학을 공부하게 되면 굉장히 추상적인 개념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도대체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한때는 철학을 좋아해서 열심히 철학 사상을 가르치는 곳을 찾아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당시 아무리 열심히 들어도 와닿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제가 느꼈던 결론은 ‘진리를 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구나’ 이었습니다. 이렇게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단어들을 사용해서 어렵게 만들지만 예수님은 주변에 있는 사물을 사용하셔서 쉽게 진리를 설명하십니다.

유명한 신학 교수인 로저스 박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이 못알아 듣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그리고 주일학교 학생들이 못 알아듣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진리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진리는 평범한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매일같이 일어나고 그래서 경험하게 현상속에서 꺼집어 내어 구체화 하신 것입니다. ’꽃을 보라, 새를 보라, 씨를 보라 바다 물고기를 보라‘ 이런 비유를 사용하셔서 진리를 구체화 하신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동안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상황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시켜나가셔야 합니다.

 

네 번째로 비유의 말씀을 사용하신 이유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비유의 말씀을 들으면 잘 잊어버리지 않게 됩니다.

그 좋은 예가 목사님들이 하신 설교는 쉽게 잊어버려도 비유로 하신 예화는 잘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원리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나 듣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일상 생활속에서 일어나고 경험한 이야기를 비유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비유의 말씀을 사용하신 이유는

쉽게 실천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실천하게 되는 가능성이 많아지게 됩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시면 어떤 한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예수님에게 질문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강도를 만난 사람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서 거의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을 보고서도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사람을 피하면서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데려다가 자신의 비용을 들어가면서 치유를 했습니다. 그러시고는 질문을 한 율법사에게 되 묻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6절입니다. ‘36.네 생각에는 이 세사람중에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러자 율법사가 ‘자비를 베푼자니이다’ 라고 대답을 하자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0장 37절입니다.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것은 우리가 실천하느냐 실천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있을뿐입니다. 무엇을 실천할것인가? 언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라는 이런 문제로 고민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한 사마리아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은 실천을 쉽게 하게 하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로 비유의 말씀을 사용하신 것은 계시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말해 숨겨져 봉지 않는 진리를 드러내기 위함에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34, 35절입니다. "34.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 하셨으니 35.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창세부터 감추인 것을 (비유를 통하여) 드러내리라’ 계시는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감추어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비유의 말씀을 사용신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들판에 핀 꽃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입히신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를 보면서 "하나님이 먹이신다" 로 설명을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일상 생활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만이 비유는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생활 그대로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주시는 비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같다 라는 비유로 말씀 하십니다. 오늘 서론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겨자씨의 비유가 주는 교훈을 간단히 살펴보면서 같이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겨자씨 비유가 주는 교훈은

첫째로 작은 것에서 시작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31절입니다. 31.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지금도 유대인들은 가장 작은 것을 표현할때는 ‘겨자씨와 같다’ 라고 하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작다‘ 라고 말할때 ‘좁쌀만하다, 깨알 만하다’라고 하는 표현을 합니다만 사실 좁쌀보다도 더 작은게 겨자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작게 시작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는 작게 시작 되었습니다. 이천년전에 베들레헴 지역에 있는 어느 초라한 말구유에 아기 예수가 태어났습니다.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이 아기 예수의 탄생이 아주 작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이 아기 예수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기 예수를 통해서 우리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우리 인간의 역사는 예수님의 탄생과 탄생 이후로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역사의 주인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는 열두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셨는데 이 열두명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이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었고 세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데리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입니다.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하셨을때 그때까지 제자들은 팔레스틴 바깥으로 나가 본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앞에놓고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렇게 마음에 와닿지 않았을 것입니다. 갈릴리 유대 나라를 벗어 나본적이 없는 촌 사람들한데 무슨 재주로 세계로 나가라는 것입니까? 그리고 배우지도 못한 사람 들인데 ‘어떻게 제자를 삼아라‘ 라는 것입니까? 뭐 아는게 있어야 가르치고 제자를 삼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니까 그냥 듣기는 했겠지만 현실감있게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는 이러한 별볼일 없는 제자들로 시작해서 엄청난 능력이 일어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부가 성전에 바쳤던 것은 동전 두닢 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주변사람들보다 가장 많은 헌금을 하였다고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작은 것을 중요시합니다. 작은 것을 보면 큰 것을 알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작은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는 사실을 아시고 계십니다. 작은 것에 충성하는 자는 큰것에도 충성한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입니다. 작은 일은 아무에게나 주어집니다. 하지만 큰일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작은일에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일을 하는 사람에게만 큰일이 주어지는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작은일이라 할지라도 성실하게 하십시다. 사람들에 눈에 잘 보이지 않을만큼 작지만 하나님은 귀하게 보십니다. 바라옵기는 작은일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위대한 일을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겨자씨 비유가 주는 교훈은

둘째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32절 전반부입니다. 32.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겨자씨를 땅에 심으면 일년만에 3미터정도 까지 자라서 나무가 된다고 하니까 그 성장 속도가 아주 빠릅니다. 이러한 현상을 개인적으로 적용시켜본다면 겨자씨가 자라는 것처럼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다른 사람들 눈에 띄게 성장하는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언어가 달라지고 인내하고 겸손 하는 정도가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소리를 듣을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외형상으로 내가 꾸미고 체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마음속에 먼저 변화가 일어날 때 나의 외형적인 모습이 자연적스럽게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내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다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차이는 큰 차이가 아니라 작은 것에 있습니다. 작은 차이지만 그것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은 평생동안 열심을 다합니다. 얼마전에 일본에서 도코 올림픽 경기가 있었습니다만 육상경기를 보면 금, 은, 동 메달이 결정되는 것은 1, 2초 차이가 아니라 0.몇초 차이입니다. 그래서 선수들은 1, 2초 가 아닌 0.1, 0.2초를 단축하기 위해서 그렇게 몇 년동안 고된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아주 작지만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이라고 하는 큰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시험을 치는 수험생도 마찬가지입니다. 1, 2점 평균 점수를 더 올리기 위해서 정말 오랜시간동안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그렇게 노력해서 얻은 평균 1점, 2점의 차이가 대학 진학에서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짓는 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작은 변화를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기생 라합을 보십시오. 라합은 여리고 성에 살고 있었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 여리고 지역은 여호수아의 군대에 의하여 곧 멸망을 하게 될 운명에 처해있었던 성이었습니다. 그럼으로 라합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지역에 살았던 이방여인이었으며 그것도 웃음을 팔고 살아가는 기생이었습니다. 이렇게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기생 라합이 얼마나 위대하게 되었습니까? 살몬이라는 믿음이 신실한 유대인 족장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라고 하는 인품이 훌륭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다윗왕이 자기 고손자가 됩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이 자기의 혈통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에도 기생 라합의 이름이 나오고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에도 기생 라합의 이름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믿음과 행위를 본받으라고 나오는 인물은 아브라함과 라합 밖에 없습니다. 이만하면 정말 창대하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금 내가 처한 입장이 초라하고 볼품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다. 기생 라합이 왜 이렇게 크고 창대하게 되었습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도저히 인정받을수 없을만큼 너무 초라하고 비참한 신분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생 라합은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장하고 창대하게 되어지는 비결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겨자씨 비유가 주는 교훈은

셋째로 유익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32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32.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큰 가지로 인하여 누가 혜택을 보게 되었습니까? 공중의 새들이 혜택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곳마다 그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130 여년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전파 되면서 곳곳에 병원과 학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당시에는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는 돈을 주지 않고 배울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상놈과 천민 출신들이 자기 아들을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많이 보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는 백정 출신 아들 박서양입니다. 아시겠지만 그당시 백정은 천민 중에서도 천민이었습니다. 백정출신인 아버지 박성춘씨가 자기 아들만은 백정 소리 듣지 않게할려고 돈 안받고 공부를 가르쳐주는 예수 학당에 자기 아들 박서양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이 계속 공부를 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그당시에 평민들과 천민들 그리고 어린이들과 여성들이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작은 씨앗이 나무가 되어 풍성한 가지가 있을 때 새들이 둥지를 짓고 혜택을 보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복의 근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왜요? 우리가 축복을 받아야 남에게 나누어 줄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혼자 잘먹고 잘살아라고 축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에게 축복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내게 건강을 주신 것도 내게 생명을 주신 것도 내게 지혜를 주신것도 내가 남에게 축복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간단히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왜 겨자씨에 비유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겨자씨가 씨 중에 지극히 작지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생명이 있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으면 땅에 떨어져도 자라게 되고 그래서 마침내 그 나뭇가지에 새들이 와서 둥지를 짓고 살아가는 유익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보내시고 성자 예수님은 생명을 바치심으로 믿는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제 믿는 성도인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주님이 보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크고 위대한 능력이 있느나가 없느냐가 아니라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생명을 주신 예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남은 평생 주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고 기뻐하시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