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14. 떠나길 요청한 이유
<마가복음 5장 1-20절>
1.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6.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지난주에 살펴보았지만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자”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항해하는 도중에 큰 풍랑을 만나게 되어서 배안에 물이 가득히 차게 됩니다. 그래서 배가 침몰할 지경에 이르게 되자 제자들은 그때까지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제서야 일어나신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십니다. 그래서 배가 무사히 바다 건너편에 도착할 수가 있게 된 것이죠. 이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자’ 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모든 책임을 다 지신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이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풍랑과 고난을 만날때마다 우리는 나를 이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자 오늘 본문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인 거라사 지역에 도착하고 난 직후에 일어난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서 나오시자마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본문 1, 2절입니다. 1.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거라사 마을에 살고 있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리고 이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난후에 배를 타고는 다시 되돌아가십니다. 그리고 정신이 온전하게 된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그 지역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내용으로 오늘 본문은 끝이 납니다. 그래서 이시간에는 거라사 마을의 배경과 이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상태와 그리고 거라사 마을 사람들의 모습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1. 거라사 마을 배경
먼저 이 거라사 마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지도 참조). 스크린에서 보시는 것처럼 이 거라사 마을은 갈릴리 호수 동쪽에 있는 도시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 있는 서쪽지역에서 배를 타고 이곳 동쪽지역에 위치한 거라사 마을로 오신 것입니다. 이 거라사 마을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살고 있던 지역입니다. 본문 20절을 보시게 되면 이 거라사 마을은 데가볼리 행정 구역에 속해있는 도시인것을 알수있습니다. 20절 입니다. 20.그가(귀신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데가볼리’ 란 헬라어로서 데카(Deca) 와 폴리스(Polis) 라는 단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여기서 데카는 10(열)을 의미하고 폴리스는 도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데가볼리는 열 개의 도시가 있는 행정 구역 인것입니다.
이 데가볼리는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시기에 세워진 10개의 도시로 이루어진 행정 구역입니다. 그러니까 이 거라사 마을은 데가볼리 행정 구역안에 있는 열 개의 마을 중 한 마을 이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이 거라사 마을 사람들은 그당시 유대인이 불결하다고 여기고 싫어하는 돼지를 많이 키우고 있었습니다(11, 12절). 또한 이 지역에는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이방 문화와 로마 군대가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거라사 지역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 거라사 마을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리고 이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시고 난 이후에 다시 배를 타고 돌아가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거라사 지역에 오신 것은 단 한가지 목적 때문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거라사에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시는 일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거라사 지역에서 귀신들린 이 사람의 상태가 어떠했기에 예수님께서 만나실려고 했던 것입니까? 제자들이 죽게 될 지경에 까지 이르게 한 그 큰 풍랑을 만나시게 까지 하시면서 까지 이 귀신 들린 자를 만날려고 했던 것입니까?
2. 예수님 만나기 이전 상태
그래서 먼저 거라사 마을에 있는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 만나기 이전의 상태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3, 4, 5절입니다.
3.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 사람은 무덤가에 살고 있었습니다. 살아서 움직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주변의 무덤 속에 있는 시체들과 다를 바 없는 죽은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소망과 목적이 없는 인생을 지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누구도 이 사람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더러운 귀신 들린자를 여러번 고랑과 쇠사슬로 손과 발을 묶었지만 그때마다 쇠사슬과 고랑을 끊어버리고 깨트려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누구도 이 사람을 통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의 몸안에는 군대 귀신이 들어갔기 때문에 굉장히 난폭하고 너무 힘이 세었던 것입니다. 9절입니다. 9.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여기서 군대라는 말로 헬라 군대용어인 ‘레기온‘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레기온‘은 6천명의 로마 군사로 구성된 사단을 의미하는 군대 용어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6천이나 되는 숫자의 귀신들이 이사람의 몸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신학자들이 6천이 아니라 2천 이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군대 귀신들이 돼지떼 몸안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죽게 된 돼지 숫자가 2천 마리 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하지만 6천이든, 2천이든 분명한 사실은 굉장히 많은 귀신들이 이 사람 몸안에 들어가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영혼은 군대 귀신들에 의해 갈기 갈기 찢겨져서 아주 비참하고 처참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8장 27절을 보시면 이 사람은 옷을 입지 아니하였다 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이사람은 옷을 다 벗고 다니면서 부끄러워 하지도 않고 밤낮 소리 지르면서 돌로 자신의 몸을 자학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 나 둘의 귀신만 들어가도 사람이 비참해지는데 수많은 귀신들이 이사람 몸안에 들어갔으니 이사람의 영혼은 완전히 망가졌고 사람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군대 귀신 들린 자를 만나러 일부러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군대 귀신 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귀신이 귀신 같이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을 심판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합니다. 본문 7절입니다. 7.큰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그리고 이어서 10, 12절입니다. 10.자기를(군대귀신)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2.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이 군대귀신들은 자신들을 거라사 마을에 머물게 해 달라고 간청하면서 주변에 있는 돼지 떼 속에 들어가기를 요청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대 귀신들이 돼지 떼 속에 들어가기를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군대 귀신들이 돼지 안에 들어가자 2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들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그 돼지들이 다 죽게 됩니다. 여기서 바닷속으로 뛰어 들어간 돼지때를 보면서 귀신들의 숫자가 2천이나 된다 라고 추측하기 보다는 열 마리에서 스물 마리 정도의 돼지안에 귀신이 들어가서 집단적으로 흥분하고 움직이니까 다른 돼지들도 덩달아 같이 행동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제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귀신이 군대 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만큼 많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표현이지만 6천이나 2천이 되는 것 까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이 밝혀주시는 귀신의 정체에 대해서 간단히 생각해보겠습니다. 사탄은 타락한 천사장인 루시퍼 입니다. 마귀라고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사탄 과 마귀는 다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귀신은 천사장 루시퍼가 타락할 때 같이 따라 나선 사탄의 졸개입니다,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악령, 어두운 영 이라고 성경에서 말하기도 하지만 다같은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귀신은 사람이 죽었는데 무슨 깊은 사연이 있어서 저세상에 가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돌아 다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타락한 천사장이 사탄이고 타락한 천사가 바로 귀신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탄과 귀신들은 사람들을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목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군대 귀신으로 인해서 이 사람은 산 사람이 아닌 죽은 시체처럼 사람 구실을 전혀 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을 만닌 이후 상태
그런데 예수님 만난 이후에 군대 귀신이 이사람 몸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15.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그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동안 수많은 방법을 동원해보았지만 이 군대 귀신들린 자를 통제할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사람이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옷을 입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이 기록된 누가복음 8장 35절을 보시면 이 사람이 어디에 앉아 있는가를 알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 35절입니다. 35.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예수의 발치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예수님 발 앞에 앉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이사람은 벌거벗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옷을 입었습니다. 이전에 이사람은 정신이 나가서 미쳤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정신이 돌아와 온전해졌습니다. 이전에 이사람은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가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생명이신 예수님 발 앞에 앉아있습니다. 이전에 이사람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으면서 소망을 가지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군대 귀신이 들렸던 사람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새롭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전에는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상태이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거룩한 보혈의 옷을 입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전에는 이세상에서 죽고 난 이후에 가야할 곳이 무덤이었지만 이제는 무덤이 아니라 천국이 우리의 목적지이요 소망이 된 것입니다.
옷을 입고 온전한 정신으로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이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는 거룩함과 평강과 그리고 자유가 어디에서부터 오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인간들에게 거룩함과 평강과 자유함을 가져다 주십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 인간은 온전하게 되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요. 이 세상 사람들이 가르치는 철학이나 지식이 우리를 거룩하고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사람들이 만든 윤리가 우리를 깨끗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거룩하고 온전하게 만드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 군대귀신 들린 자는 정신이 온전하게 되어 옷을 입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되었습니다.
4. 거라사 주민들의 반응
군대 귀신이 들렸던 사람이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온 모습을 본 거라사 주민들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15절 중간 이후입니다. 15.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두려워 하더라’ 군대 귀신 들렸던자가 옷을입고 정신이 온전하게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이 거라사 마을 사람들이 기뻐하고 감사한 것이 아니라 두려워 했습니다. 이상하죠?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본문 17절입니다. 17.그들이 그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거라사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마을에서 떠나시길 간구했습니다. 이것도 이상하죠? 군대 귀신 들린 이 사람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동안 얼마나 불편하게 살아왔습니까?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었지만 다 끊어버리고 벌거벗은 채로 돌아다니면서 큰소리 지르며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으로 인해 그 마을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해나가는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미친 사람이 정신이 온전하게 되어서 옷을 입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기뻐해야 하는 데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자기 마을에 있어달라고 해야 할텐데 오히려 자기 마을을 떠나달라고 간구 합니다. 그런데 설교를 시작할때 잠시 살펴보았지만 군대귀신으로부터 온전하게 된 이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시길 간구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을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생각과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물질에 있습니다. 내 물질이 손해가 나느냐 이득이 되느냐에 훨씬 더 관심이 있을 뿐 입니다. 그동안 마을에 문제를 일으키던 군대 귀신이 들린 사람이 고침을 받고 정신이 온전해 진 것은 좋은 일입니다.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이 한사람이 온전해지기 위해서 그들은 돼지 2천 마리를 손해 보아야 했습니다. 이 한사람과 돼지 2천 마리를 놓고 계산해보니까 그 마을 사람들에겐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손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 예수가 마을에 들어와서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날때마다 귀신을 쫓아내면 자기 마을에서 키우는 수많은 돼지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큰 손해입니다. 귀신 들린자 들에게는 좋은 일이겠지만 마을 사람에게는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이 할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곧바로 예수님을 마을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이천 마리의 돼지야 이제는 어쩔수 없다 하더라도 더 이상 돼지떼가 죽게 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요. 그들에게는 사람의 영혼보다는 물질이 훨씬 더 귀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이나 생명 보다는 돈을 벌어다 주는 돼지가 훨씬 더 소중했습니다. 여기는 우리는 물질을 사랑하는 욕심, 이러한 마음이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것을 방해하게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약성경은 탐심이 바로 우상이라고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입니다. 5. ...탐심은 우상이니라 탐심은 영어로 Greed 즉 욕심을 의미합니다. ‘욕심은 우상’ 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이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며 살아갑니다. 거라사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이 키우는 돼지 떼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보고 떠나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보다는 돼지 떼를 택하였습니다. 그들은 천국보다는 이 땅을 택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 보다는 세상 나라를 택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세상 사람들도 바로 이러한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멀리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한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거친 풍랑을 극복하시고 거라사 마을에 오셨습니다. 이 군대 귀신 들린 자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죄인인 우리를 찾아 이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돼지 2천 마리보다도 훨씬 귀하고 소중한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것입니다. 이 온 천하 보다도 더 귀하고,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생명을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바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바치시기 전에 온갖 멸시와 조롱을 다 받으셔야 했습니다. 발가벗김을 당하시고 채찍과 창에 찔리는 수치와 부끄러움도 당하셔야 했습니다. 왜요? 죄의 심판은 죽음이지만 허물의 심판은 수치와 부끄러움과 멸시와 조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심판을 대신해서 온전하게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생명을 바침으로서 우리가 진 죄와 허물을 완전히 지불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새로운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믿는 성도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 자유함을 얻게 된 본문에 나온 이 사람과 같은 사역입니다. 이사람은 어떤 일을 하며 남은 생애를 살아갔습니까? 본문 20절입니다.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그래요. 이 사람은 남은 생애 동안 예수님이 자기에게 행하셨던 일을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여기 놀랍게 여기는 것과 구원을 받게 되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거라사 마을 사람들도 귀신 들린자가 온전히 치유된 것을 보고는 놀라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물질에 대해서 손익 계산을 해보니까 예수님을 멀리 하는 것이 낫겠다고 계산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어쩌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손익계산을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시간이 날 때마다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의 터전에서 각자가 열심히 일을 하며 살아가다가 때가되고 기회가 되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내 주변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며 살아가는 것 입니다.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나는 죽음 이후에도 천국에 서 살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있어야 할 장소는 무덤이 아니고 천국인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내가 진 죄와 허물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생명으로 지불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귀하게 여기고 살아야 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군대 귀신 들린자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큰 광풍이 일어나는 갈릴리 바다를 건너 오셨습니다. 사탄이 큰 광풍을 일으키면서 까지 하면서 거라사 지역에 오는 것을 방헤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시고 군대귀신 들린 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으로 내가 진 죄의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 군대귀신 들린 사람보다도 훨씬 더 큰 은혜를 누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바침으로 우리의 모든 죄값을 다 지불하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시간이 날때마다 증거하면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