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마가복음15. 외로움에서 자유하라

Author
kgmcc
Date
2021-09-22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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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가복음 5장 25-34절

날짜 : 2021년 9월 22일

 

<마가복음 525-34>

25.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힘든 순간이 있다면 절망하고 있을때라 할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죽거나 아니면 내 자신이 암과 같은 불치병으로 인해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때 그것도 아니면 사기를 당해서 모든 재산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절망을 합니다. 그리고 그때 겪게 되는 하루 하루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유명한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다’. 이 말이 주는 뜻은 절망은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 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절망감 못지 않게 우리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외로움이라 할수 있습니다. 오늘날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살펴보게 되면 가장 많은 비율이 바로 ‘소외와 고립에서 오는 외로움‘ 이라고 합니다. 자살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를 해온 핀란드 출신인 요우코 뢴퀴스트가 이런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살을 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매일 외로움을 느끼며 생활해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여가 시간이 많았지만 이웃사람들과 사교적인 접촉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과 아무 교제가 없이 고립된 생활을 해나가다가 마침내 자살로 인생을 마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정신 심리학자인 오하라 겐시로 교수가 자신의 저서인 ’마음의 병 그 정신 병리‘ 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이가 중년인 자살자들의 주요 자살 원인은 대부분 ’고립‘ 에 따른 외로움에 있다’ 그러니까 절망과 외로움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주범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본문 배경

오늘 본문을 보시면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오랜 시간동안 절망과 외로움의 환경에서 지내왔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25.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혈루증이란 자궁에 이상이 생겨서 계속 하혈을 하고 피를 쏟아내는 병이라고 합니다. 이런 병이 있다 할지라도 고쳐질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희망을 가질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고칠수가 있다고 하는 희망을 전혀 가질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26절입니다. 26.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가진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그동안 이 여인은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소문이 난 병원들을 찾아가서 실력이 있다는 의사들을 다 만나보고 치료를 받았던 것입니다. 용하고 능력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다 찾아가 보았지만 병을 고칠수 없었고 결국에는 돈만 다 허비해 버린 것입니다. 병은 낫지 않고 가진 돈을 다 허비했습니다. 이제는 돈이 없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더 이상 어떻게 할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여인은 희망이 없는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절망보다도 더 큰 고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외로움이었습니다. 그당시 이 혈루증에 걸리면 부정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레위기 15장 19절입니다. “19.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의 몸에 그의 유출이 피 이면 이레 동안 불결하니 그를 만지는 자마다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레 15:19) ‘불결하니 그를 만지는 자마다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이 여인은 하혈로 인해서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사람이 만진 것은 다 부정하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족들과 접촉 할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성전이나 회당에 나가 예배를 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당시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성 바깥으로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가정과 사회 그리고 종교적으로 고립된 환경속에서 이 여인은 철저하게 외로움을 느끼며 하루 하루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절망과 외로움 속에 살아가고 있었던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온전히 치유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 여인이 치유함을 얻게 되었습니까? 그래서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까?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가 있게 된 배경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 자 합니다.

 

혈루증 여인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배경은

1. 예수의 소문을 듣음

이 여인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 동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27절입니다. 27.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이 여인은 오랜 시간동안 절망과 외로움 속에 살아가던 중에 예수님의 소식을 듣었습니다. 두 주전 주일 예배시간에 왕의 신하가 자기 아들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간청했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만 그 왕의 신하도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처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문을 들으면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언제나 들음에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도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의 소문’ 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여인의 운명이 바뀌게 되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고, 기적을 경험하게 된 축복은 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바디매오를 보십시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 바디매오가 보게 된 기적의 시작은 바로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 47절 앞부분입니다. ‘46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47.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바디매오는 이전부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날 예수가 지나가신다 라는 소리를 듣고 소리질러 외쳤던 것입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오.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세리 이었던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같은 직업을 가진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으신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여리고 거리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돌 무화과 나무위로 올라가게 되었고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 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바로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7.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맹인 바디매오나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도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가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더라.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을 보게 하시더라. 바람과 바다까지도 잠잠하게 하시더라. 그분이 말씀하시면 모든 병과 모든 자연의 현상이 순종을 하더라‘ 라고 하는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듣게 되는 소리중에 가장 축복된 소식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소식입니다. 이여인은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수 있게 된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 배경은

2. 예수님의 옷을 만짐

본문 27절입니다. 27.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영어 성경을 보시면 'touched his cloak.' 'touch'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겉옷 자락을 손으로 만졌는데 그때 이 여인에게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마다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치유를 받게 되는 사건 이전에 두 가지 단어가 공통적으로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듣고’ 라는 단어와 ‘믿는다’ 라는 단어입니다. 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은 그동안 자기가 할수 있는 모든 방법,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여인의 병을 고칠수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 여인을 구원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점점 시간이 지나가면서 남편도 자녀도 더 이상 같이 지낼수가 없는 최악의 현실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접촉만 해도 그사람이 부정한 존재가 되는데 어떻게 같이 지낼수 있겠습니까? 한 집안에 살면서 부부가 어떻게 접촉을 하지 않고 지낼수가 있겠습니까? 설사 남편이나 자녀가 괜찮다고 말했을지라도 이 여인은 가정에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어서 스스로라도 집을 떠났을 것입니다. 얼마나 절망감에 빠졌겠습니까?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하루는 이 여인이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치료하신다고 하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자 이 여인의 마음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마치 옛날 여리고성에 살고 있었던 기생 라합이 가졌던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그리고 전쟁을 할때마다 이스라엘에게 승리하게 하신다고 하는 소식을 듣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었을때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 2장 11절입니다. 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당시 여리고 성안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가 다 하나님이 행하신 능력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은 기생 라합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 기생 라합은 그당시 여리고성을 정탐하러온 이스라엘 정탐꾼에게 자기가 가진 믿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 그래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는다고 해서 모두가 다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들음으로 나게 되는 것 입니다. 혈루증을 앓고 있는 이 여인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에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사람은 이 여인 뿐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 31절입니다. 31.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무리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고 있었습니다. 같은 장면이 기록된 누가복음 8장 4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42. ... 예수께서 가실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무리가 밀려들더라’ ‘밀려들더라’ 이 단어는 헬라 원어로 ‘쉬네프니곤’ 입니다. 그 의미는 ‘완전히 질식시키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예수님을 질식시킬 정도 였다는 의미입니다. 숨을 제대로 쉬기도 힘들만큼 사람들이 많았던 것 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만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touch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touch이었습니다. 다른 종류의 만짐이었습니다. 호기심이나 관심이 있는 차원의 만짐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본의 아니게 예수님을 만지게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만짐 이었습니다. 28절입니다. 28.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병이 나으리라‘ 라는 믿음으로 만진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손을 내밀어 예수님을 만지는 구체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와 예수님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행동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부정한 여인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자기 몸이 서로 닿아서는 안됩니다. 또한 예수님을 만져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사람들과 부딪쳐 가면서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것입니다. 그냥 멀리서 ’주여 제 병을 고쳐주실줄 믿습니다‘ 라고 기도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처한 입장을 다 아십니다. 내아픔과 내 절망을 아시는 주님께 내가 간구만 해도 주님은 얼마든지 해결하실수 있으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믿음을 보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치 파이프와 같습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나를 연결시키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집 앞에 거대한 물 저수지가 있다 할지라도, 파이프가 물 저수지까지 연결되지 않으면 수도꼭지를 틀어도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게 아무리 위대한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믿음이라는 파이프가 능력의 예수님께 연결되지 않으면, 그분의 능력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와 예수님을 연결해주는 파이프와 같습니다.

불안과 염려속에 있던 사람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손을 내밀어 주님을 붙잡을때 예수님 안에 있던 엄청난 평화가 그사람에게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던 구원이 믿음의 파이프를 통해 우리에게로 오는 것입니다.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믿음으로 만지는 순간 예수님 안에 있던 능력이 그 여인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혈루증 여인은 낫게 된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자가 해야 할 책임

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평강을 얻게 되었고,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께서는 확인 하고 싶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 믿음의 고백을 하는가 확인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본문 30절입니다. 30. ...누가 내옷에 손을 대었느냐 예수님께서 몰라서 이런 질문하신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을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으로만 응답을 받게 된다‘ 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하고자 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시자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댈려고 해서 댄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다 보니까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몇 사람들이 예수님의 몸에 닿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한 이 대답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고 단지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십니다. 본문 32절입니다. 32.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예수님께서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시다가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과 눈이 마주치신 것입니다. 당연하겠죠.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보기 위해서 주변을 둘러 보셨으니까요.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멈추신 상태로 계속 주시하여 보시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이 여인은 두려워하면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알립니다. 33절입니다. 33.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모든 사실을 여쭈니’ 모든 사실을 아룁니다. 이 여인은 아마 이런식으로 말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저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부정한 여인이었습나다. 그런데 하루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었습니다. 그때 저는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을것이다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정한 사람이었지만 감히 주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그리고 제 믿음대로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런식으로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믿음의 고백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여인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율법을 어긴 자신의 잘못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원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부터 구원을 받고 은혜를 경험했다면 주님은 우리가 그 사실을 고백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내게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이 내게 구원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내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내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나의 삶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믿음으로 고백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간증이요 전도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믿음의 고백을 하지않고 살아가고 있다면 주님은 계속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누가 내옷에 손을 대었느냐?"  이 질문을 약간 바꾸어보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누가 내가 준 평강을 누리고 있느냐? 누가 내가 준 구원을 받았느냐? 누가 내가 준 기쁨을 가졌느냐?’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본다면 이런 의미가 되지 않겠습니까? ‘네가 나의 평강을 누리고 네가 나의 구원을 받았고 네가 나의 기쁨을 누린다면 그 이야기를 주변사람들에게 말을 하며 살아라’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이렇게 믿음의 고백을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본문 34절입니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여기서 ‘딸아’ 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뒤가테르’ 인데, 이 단어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을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다음주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회당장이 자신의 딸을 보면서 부르는 단어와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향해서 ‘뒤가테르‘ 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 ‘딸아’ 라고 하는 표현속에는 이 여인의 모든 행동을 용서하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더 이상 부정하지 않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 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이 없으신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으면서 절망과 외로움에 살고 있었던 이 여인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 일수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예기치 않은 사건을 만나 절망과 외로움의 나날들을 지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의 믿음을 성숙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생길 때는 믿음의 손을 내밀어 예수님을 만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를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내자신을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주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로 몰려듭니다. 그래서 함께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손을 내밀어 예수님을 만지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호기심으로 만집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하니까 그냥 떠밀려서 같이 만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혈루병을 가진 여인처럼 간절한 믿음으로 자신을 만지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찾고, 믿음으로 손을 내밀고, 믿음으로 만지기를 원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무슨 잘못이 있기에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게 되었는지는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에게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이 어떠한 종류의 죄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그래서 어떤 고통과 문제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과 나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단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고 붙잡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내 딸아’, ‘내 아들아’ 라고 불러주십니다. 그리고는 ‘내 딸아, 내 아들아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간구하며 살아가십시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믿음으로 살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응답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