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16. 절대 절망 상황 속에서도
<마가복음 5장 35-43절>
35.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열두살 된 소녀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는 기적의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었던 이 소녀에게 예수님께서 다가 오셔서 한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달리다굼!’ 이 ‘달리다굼’ 은 그당시에 동이 트는 아침이 되면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달리다’ 는 ‘달려간다’ 는 뜻이 아니고 작고 연약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고 ‘달리다’ 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작은 아이’ 라는 뜻이 됩니다. little child 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굼’ 은 ‘일어나라‘ 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달리다굼‘ 은 “작은 아이야 일어나라” 라는 뜻이 됩니다. 그 당시에 아침 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깨울때 “달리다굼, 달리다굼” 했던 것입니다. “얘야 일어나야지” 라고 말한 것이죠. 이제는 여름방학이 다 끝났고 학교들마다 개학을 했기 때문에 아침이 되면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깨워야 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이른 아침에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소리가 바로 ’얘야 일어나야지. 그래야 학교에 늦지 않지’ 일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 당시에도 자녀들이 이른 아침에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소리중에 하나가 바로 이 ‘달리달굼’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부모들이 ‘달리달굼’ 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자녀들은 일어나서 그날 하루를 새롭게 시작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듣고 회당장 야이로 딸이 다시 일어나서 새로운 인생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살아나게 된 부활을 경험한 인물들을 성경속에서 찾아보면 나사로와 회당장 야이로 딸이 해당됩니다. 그리고 이 두사람 모두 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통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라고 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죽음은 병이 들었다거나 절망적인 상태 인 것과는차원이 다릅니다. 병이 들었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고 절망적인 상태라는 것은 그래도 희망과 회복을 기대할수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회복한다거나 소망을 가질수 없는 상태가 바로 죽음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럼으로 오늘 이시간에는 회복이나 치유의 단계를 넘어선 부활의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의 삶속에도 절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는 기적을 경험할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 부활의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35절에서 시작하고 있지만 실제는 35절이 아니라 22절에서 일어난 사건이 이어진 내용입니다. 마가복음 5 장 22절, 23절을 보시겠습니다. “22.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그당시 회당은 오늘날 교회와 학교를 합쳐놓은 기관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당시 회당은 종교적인 기능과 교육적인 기능을 겸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회당의 회당장은 예배를 드릴 때 사회를 맡기도 하고 또 설교를 하게 될 사람들을 선택하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와 같은 교육적인 기능도 있었기 때문에 학교 교장 같은 역할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당시 회당장은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지도자이었던 것입니다. 그당시는 하나의 회당마다 10명 정도의 관리인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한명의 회당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정도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 그당시 아직 사회적으로 공인 받지 못하고 있던 젊은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와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예수를 보고 발 아래에 엎드리어’ 회당장의 신분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거의 볼수 없는 일이라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회당장에게는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자기 딸을 고쳐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보았지만 살릴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린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만나게 되는 고통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회당장에게 사랑하는 딸로 인하여 오는 고통이 없었다면 이 회당장이 예수님 앞에 나왔겠습니까? 절대로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 중에서도 내가 고통을 받지 않았다면, 내 인생에 역경이 없었더라면, 문제가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 앞에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예수님 앞에 나가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는 제 앞날을 생각하니까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당시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찾아야 할지 아니면 계속 공부를 해야 할지, 대한민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야 할지를 놓고 심한 갈등속에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가를 알고 싶었고 그래서 결사적으로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을 만나 지금까지 신앙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염려와 불안 때문에 그리고 이런 저런 문제 때문에 건강 때문에, 주님을 찾는 마음을 가질수 있게 된다면 그 염려와 그문제들은 오히려 축복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 회당장은 자신의 사랑하는 딸 때문에 겪게 된 아픔과 고통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유명하지도 않은 젊은 청년 예수 앞에 와서 엎드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엎드려서 이렇게 간구합니다. 23절 다시한번 모시겠습니다.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옛날 성경을 보시면 ‘많이 구하여 간구하되’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회당장은 간절하게 간구하면서 계속 되풀이해서 호소한 것입니다. ‘선생님 내 딸아이 살려 주세요. 내 딸아이가 지금 숨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살려 주세요. 부탁합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제 딸 아이입니다. 이 나이가 든 사람이 이렇게 엎드려서 부탁드립니다.’ 이런식으로 자신의 체면을 무릅쓰고 계속 간구 했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체면 때문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에 민감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문화는 ‘체면 문화이다’ 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 체면이란 단어를 풀이해보면 몸 체 자 얼굴 면 입니다. 그러니까 체면은 몸 중에서 얼굴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언어를 살펴보면 이 얼굴과 관련된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볼 면목이 없습니다. 차마 제가 얼굴을 들지 못하겠습니다.' 학생이 학교에서 잘못을 했을 때 부모님이 선생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선생님 제 얼굴을 봐서라도 이 아이 한번 용서해주세요. 얘야 제발 내얼굴에 더 이상 먹칠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얼굴을 중요시 하는 체면문화가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그래요. 이 체면문화 때문에 이러한 속담도 있습니다. “냉수를 마셔도 이빨을 쑤시고 다녀야 한다” “물에 빠져 죽게 되어도 개헤엄은 안친다” “닷새를 굶어도 폼은 잡고 살아간다” ’불이 나도 양반 걸음걸이를 해야 한다‘ 이러한 체면 문화 때문에 내인생에 절박한 문제가 있어도 예수님 앞에서 진실되게 간구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체면이 중요합니까? 내 인생이 중요합니까? 내 인생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앞에 내 체면이나 자존심을 가릴 것 없이 모든 문제를 솔지가게 드러내놓고 고백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도 부활의 기적을 체험할 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 부활의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번째로, 아직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았어도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해야 합니다.
23절 말씀을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23.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그리고 그 다음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24절입니다. “24.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이에 그와(예수와) 함께 가실새‘ 자, 이제 회당장의 간청을 듣고 예수님이 회당장과 함께 가십니다.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것이죠. 지금 이 시점에서는 회당장이 가진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집에 도착해서 예수님이 자기 딸아이에게 손을 얹고 기도를 하시게 되면 내 딸아이는 살아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문제가 아직 해결 된 것은 아니지만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회당장이 예수님과 함께 걷고 있는 도중에 생각지도 않았던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지난주 수요일에 살펴보았지만 열두 해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난데없이 도중에 등장한 것입니다. 25절입니다.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그리고 이 25절부터 오늘 본문 바로 앞절인 34절까지 보시면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함을 받게 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마지막 34절입니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여자가 치유함을 받게 된 것 입니다. 병자가 치유를 받아서 건강한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것은 감사하고 참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회당장 야이로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마음이 바쁘겠습니까? 지금 일분 일초가 아까운 상황인데 중간에 끼어든 이 여인 때문에 시간이 자꾸 지연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회당장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 중간에 생기는 바람에 문제 해결이 지연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믿음을 더욱 성숙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일을 종종 행하십니다. 지금 내 문제가 급하고 내 코가 석자인데 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문제 해결이 잘 되는데 나는 문제 해결이 잘 안됩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 다른 사람들의 기도는 다 들어주는데 왜 내 기도는 안 들어주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하나님 지금 사람 차별하시는 것입니까?.” 뭐 이렇게 원색적으로 접근을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것입니다. “저 사람들의 기도를 응답해주신 하나님! 저에게도 같은 응답을 해주실 줄을 믿습니다. 제가 먼저 양보를 했으니까 갑절의 축복을 주실줄 믿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시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회당장은 마음이 바쁩니다. 집에 있는 자기 딸이 숨이 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너무 급했기 때문에 회당장은 자기 체면을 가리지 않고 젊은 예수를 찾아와 그 발에 엎드려서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서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시간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이런 상황에서 회당장이 가지기를 원하는 마음을 한번 생각해볼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야이로야 네가 지금 이 급한 상황에서 기다릴 수 있느냐? 나의 능력을 믿고 기다릴 수가 있겠느냐?” 바로 이러한 마음을 회당장이 가지기를 예수님께서는 원하셨던 것입니다. 누가 복음 18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과부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비유의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 1절입니다. “1.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예수님 비유로 말하신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재판장을 찾아가서 호소를 했는데 거절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날마다 찾아가서 호소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 재판장이 밤에 잠을 자는 데 꿈에도 나타나서 호소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재판장은 귀찮기도 하지만 자기가 제대로 숨을 쉬고 살기 위해서라도 이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라는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번만에 문제 해결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문제해결 그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교훈이 필요 할때가 있습니다. 인내심이 필요하고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 더 필요 할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주님은 기다리시게 하십니다. 이 야이로 회당장의 경우에도 예수님께서는 문제의 해결을 지연 시키십니다. 주님께서 기다리게 하시고 기도하시게 하신다면 더 기다려야 합니다. 과부의 비유에 나오는 과부처럼 기도하시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나는 예수님 곁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회당장은 예수님 곁에 계속 머물고 있었습니다. 마음은 급했지만 계속 그 자리에 같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급하다고 해서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마음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중에 있다 할지라도 주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안되듯이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곁을 떠나 살아서는 절대 안됩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내게 응답이 지연이 된다 할지라도, 문제가 그냥 그 자리에 머물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예수님 곁에 머물 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문제 해결은 시간의 문제일 뿐입니다.
내 인생속에서 부활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세 번째로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 예수님을 찾아야 하고 응답이 지연이 되어도 예수님 곁에 머물고 있어야 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35절입니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회당장 집에 있는 사람들이 회당장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이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은 다 끝난 것입니다. 죽었으니까 모든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최악의 상황입니다. 예수님을 데리고 집으로 오다가 중간에 생각지도 않았던 어느 한 여자가 나서는 바람에 필요한 시간을 놓친 것입니다. 38절을 보시면 회당장 집 분위기를 볼수 있습니다. 본문 38절입니다.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지금 회당장 집안은 아이가 방금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다들 어쩔줄 모르고 울면서 심히 통곡하고 있습니다. 자 그런데 이 최악의 절망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회당장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36절입니다.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두려워하지말고 믿기만 하라“ 이것은 저와 여러분이 죽음과 같은 절대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부활의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두려워 하지말고 믿기만 하라” 이것은 현재 시제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명령형입니다. 너무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두려워 하지 말아라. 믿기만 해라‘ 상황은 다 끝났습니다. 죽었으니까 다 끝난 것입니다. 이제 희망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어라. 믿기만 해라‘ 절망적인 순간 속에서도 계속해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가장 큰 절망은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모두가 다 죽습니다. 젊은 사람도 나이든 사람도 죽습니다. 여자도 남자도 죽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죽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죽습니다. 죽음의 확률을 백 프로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속에서도 에수님께서는 두려워 하지 않기를 명령하십시다.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믿기만 해라” 요한복음 11장 25-6절을 보시면 나사로가 들어가 있는 무덤앞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것을 네가 믿느냐‘ 지금 상황은 다 끝났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덤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하십니다. 무엇을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라고 말씀하시고는 사랑하시는 친구 나사로가 들어가 있는 무덤을 향하여 걸어가십니다. 그리고 외치신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때 나사로가 얼굴에 수건에 싸인채로 온몸에 흰 천에 싸인채로 무덤에서 걸어나옵니다. 나사로가 있는 무덤을 향해 외치셨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작은 아이야 일어나라” 아이가 일어났습니다. 부활의 위대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절망인 죽음도 주님께서 부활하게 할 능력이 있으시다면 그 외 다른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의 사업체가, 나의 직장이, 나의 건강이, 나의 자녀가 그리고 이런 저런 문제들이 도저히 희망이 없는 절대 절망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간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상황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죽음을 극복할수 있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믕로 믿음을 가지십시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것은 나를 두렵게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믿음이 없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 없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나의 믿음이 없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건강의 문제를 두려워합니다. 나의 믿음이 없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내사업과 내 직장의 문제를 두려워합니다. 내 자녀들의 앞날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가운데서도 믿음을 가지시길 원하십니다. “두려워 하지 말아라. 믿기만 해라” 그래요 저와 여러분이 인생길을 가다가 이런 저런 문제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 올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약한 어린아이처럼 큰 파도에 밀려서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져 휘쓸려 갈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상황에서도 주님은 믿음을 가지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명령을 하십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최악의 상황속에서도 “아이야 일어나야지” 라는 음성을 듣고 새롭게 시작할수 있기를 원하는 믿음을 가지길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절대 절망인 상황속에서라도 믿음을 가지심으로 말미암아 “달리다굼” 이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일어나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놀라운 경험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