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17. 아는 것이 병이다
<마가복음 6장1절~6절>
1.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셨다가 일어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나사렛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베들레헴 예수라고 부르지 않고 나사렛 예수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자라고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잘아시겠지만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은 그당시 로마황제이었던 아우구스투스가 내린 명령에 따라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 가서 호적신고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남편인 요셉이 태어난 고향인 베들레헴에 호적신고를 하러 가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자라서 성장하신 곳은 바로 나사렛 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셔야 했던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구약의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이었던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는 나사렛 마을에서 사시다가 공생애 활동을 하시면서 부터는 가버나움으로 무대를 옮겨서 활동을 하게 됩니다. 나사렛에서 가버나움까지의 거리는 약 60 Km정도인데 마일로 환산을 하면 35마일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승용차를 타고 대략 25분 정도 운전을 하면 도착할수 있는 정도의 거리 일 것 같습니다. 그당시 이 나사렛 마을은 약 400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을 것 이라고 신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이렇게 적은 숫자가 살았던 민큼 나사렛 마을사람들은 서로 서로 너무나 잘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몇주동안 살펴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 마을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십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그리고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12년 동안 혈루증에 걸린 여인을 고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곳 마다 수많은 무리들이 따라다녔습니다. 한마디로 가버나움마을에서는 예수님이 아주 인기가 있는 스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사렛마을로 가십니다. 이정도가 되면 고향에서도 당연히 환영을 받아야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 K-Pop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BTS(방탄 소년단)는 옛날 비틀즈와 같은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이 방탄 소년단이 얼마전에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공연을 했고 그이후 미국 ABC 방송국에도 문재인 대통령과 같이 출연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왔으니 우리나라 국민들로부터 스타의 신분으로 아주 큰 환영을 받았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BTS의 경우는 한국에서 큰 대접을 받았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정 반대이었습니다. 3절 후반부 입니다. ‘3. ...예수를 배척한지라’ 고향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 한 것입니다.
가버나움에서는 가는 곳곳마다 그렇게 놀라운 환영을 받으셨던 예수님께서 고향에 와서는 차가운 대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이때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이 잘알고 계시는 유명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본문 4절입니다. 4.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선지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 는 말씀입니다. 다른데서는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 식구들한테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제 고향이 대구인데 제가 고향에 가게 되면 존경이나 대접을 받겠습니까? 존경은 고사하고 오히려 제가 친척 어른들을 찾아가서 인사를 하고 대접해드리기에 바쁠 것 입니다. 다른 도시에 가면 제게 반말 하는 사람을 볼수 없겠지만 고향에 가면 제게 반말을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친구들이나 선배님들이 그리고 친척 어른들이 새삼스럽게 존댓말을 하겠습니까? 저희 형님이 저한테 존대말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나이 60이 넘어가고 있지만 제게 반말하는 사람들이 고향에 가면 수두룩합니다. 그러니까 고향에서 존경을 받을수 있는 분위기는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신 것은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기 위한 방문이 아니었습니다. 가족을 포함하여 고향 마을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38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다니시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8.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오래전에 이곳 미국에 계시는 저의 큰 누님이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어느 한 친척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큰 누님이 옛날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때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던 친척 이셨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가서 전도를 해야겠다는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고향 마을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고향 마을 회당에서 설교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당시 관습에 의하면 여행을 하는 랍비가 그지역 회당을 방문하게 되면 설교를 요청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날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고향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굉장히 놀라워 했습니다. 2절입니다. 2.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고향 사람들이 놀라워했습니다. 왜요? 두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권능에 대해 놀라워했던 것입니다.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그러니까 나사렛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권능의 손으로 치유하신 사건을 소문을 듣고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예수님의 능력의 말씀과 초자연적인 권능에 대해 놀라워하면서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구원자로 이땅에 오심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들이 가진 편견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기 보다는 마리아의 아들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편견은 주로 두가지 때문에 생긴다고 할수 있습니다. 하나는 잘 모르니까 생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나사렛 마을 사람들은 자기가 예수에 대해서 자기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예수의 과거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라고 하는 그 편견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아무런 권능을 행하지 않으시고는 고향을 떠나서야 했던 것입니다. 5절입니다. 5.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편견은 예수님이 아무 권능을 행하실수 없게 만들만큼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나사렛 마을 사람들이 가진 편견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훨씬 더 많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진 편견으로 인해서 스스로 더 이상 기적을 행하시지 않기로 예수님은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시간에 저와 여러분은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예수님께서 아무런 권능을 행하지 않으시고 고향을 떠나시게 만든 우리 인간의 편견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이 앞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주님의 권능을 경험하게 되는 신앙의 길을 가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첫째로 그들은 과거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3절입니다.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설교를 듣고는 놀랐습니다. 설교 말씀에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예수는 내가 어릴때부터 봐서 잘 알고 있는데 그동안 많이 똑똑해졌네. 도대체 어디에 가서 저런 지혜를 얻었을까?“ 라고 놀라워 했습니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관심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 관심 때문에 과학이 발달하고 관심 때문에 예술이 발달하고 문화가 발달합니다. 이렇게 관심은 우리에게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 있어서 관심은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청소년의 경우를 한번 생각 해 보십시다. 청소년 시기가 되면 이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성에 대한 관심을 잘 발전시켜서 건전한 데이트를 하고 또 건전한 짝을 만나 건전한 결혼을 하고 건전한 가정을 이루어 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다가 시를 짓는 시인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사랑의 곡을 만드는 위대한 음악가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위대한 화가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관심은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어떤 청소년들은 이성을 향한 관심을 잘못 발전시켜서 포르노 중독환자가 될 수가 있고 한걸음 나아가서 성 폭행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관심은 좋은 결과를 가져올수 있고 반대로 나쁜 결과를 가져올수도 있습니다. 나사렛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마을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좋은 방향으로 연결시키지 못했습니다. 왜요? 너무나 잘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발전시킬수 없을만큼 예수님의 과거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사람들 중에는 옛날에 목수일을 했던 예수가 자기집에 와서 부서진 가구를 고치고 수선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집 울타리나 부엌을 고칠 때 예수가 와서 일을 하고 돈을 받아 간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냄새나는 화장실을 고치는 일을 하던 예수를 기억하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400명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었으니까 과거에 목수 일을 하고 있던 예수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과거와 현재는 달라도 너무나 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정보가 업 그레이드가 되어야 하는데 그들은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정보만 가지고 예수님을 대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때인 1960년대에는 필리핀이나 멕시코가 우리나라보다 더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나라가 훨씬 더 잘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필리핀 나라 여성들이 우리나라 시골 남자들한테 시집을 오기도 하고, 남자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허드레 일을 하면서 돈을 벌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필리핀 여인이 자기나라보다 못살았던 과거만 생각하고 그런 마음으로 남편이나 시집식구를 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결혼은 오래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가진 정보에서 자꾸 업데이트가 되고 또 종종 업그레이드도 되어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내가 과거에 가지고 있던 것에서부터 새롭게 업그레이드를 해야 합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권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내가 경험해서 잘 알고 있다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행하시는 역사를 방해하는 편견이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에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아는 것이 병이 되는 것’ 입니다. 나사렛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 친구는 옛날에 우리집 부엌을 고쳤는데...' '저 교회는 옛날에 저랬는데... ' '저 집안은 옛날에 별로 이었는데...,' '저 가게는 옛날에 적자이었는데...‘ 라는 과거 때 알고 있었던 정보가 더 이상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게 되면 그것은 현재 편견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편견은 주님의 권능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3절 앞부분과 후반부를 보시겠습니다.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 예수를 배척한지라
‘이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그당시 관습을 따르면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요셉의 아들 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사렛 마을 사람들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당시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마리아 아들 목수라고 사람들이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리아의 아들' 이라는 표현 속에는 그 어떤 편견이 들어있습니다. ‘홀어머니의 아들!’ '홀어머니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하는 편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도 더 심한 또 하나의 편견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의 진짜 아버지에 대해서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든 마을 사람 들중에는 30년 전 마리아가 요셉과 결혼을 하기 이전에 이미 임신을 한 상태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성령으로 인해 잉태되었다고 하지만 마을사람들의 눈에는 예수의 아버지가 누군지 의심스러운 출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아들 목수라는 말 대신에 마리아의 아들 이라는 말을 사람들이 했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홀 어머니의 아들 목수라는 의미가 있든 진짜 아버지를 알수 없는 사생아 출신의 목수라는 의미가 있던 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 라는 말속에는 예수를 낮추고 예수를 천하게 보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당시 나사렛 마을 사람들의 눈으로 볼때 예수의 출생이나 예수가 처해있는 환경은 사회가 정해놓은 정상적인 기준에서 한참 뒤처지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편견이 있었던 것입니다.
스위스 출신인 '피에르 렌치니크' 박사가 세상에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 300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을 연구하면서 특별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상당수 사람들이 고아였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더대왕, 시저, 루이 14세, 조지 워싱턴, 나폴레옹, 사르트르, 루소, 데카르트, 파스칼, 공자 등이 다 고아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의 인물 가운데서 크게 쓰임 받았던 모세와 사무엘도 아기때 외에는 친부모 슬하에서 계속 자라지 못한 고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피에르 박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 이유는 역경이 인물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고 피에르 박사가 말한바 있습니다. 사람은 역경을 돌파해 가면서 이전에는 얻지 못했던 놀라운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경이 다가오지 아니하면 사람들은 언제나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인간적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경이 다가오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모습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니까 새로운 인생의 돌파구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역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경제적으로 가난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해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야간학교에 교사로 자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당시 제가 역사와 영어 과목을 가르쳤는데 고아 출신의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그당시 얼마나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영어 단어 책를 죄다 외웠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시험을 패스를 하고 난뒤에는 영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는 성도들은 비록 그 사람이 정상적인 사회 규범에서 볼때 기준치에서 뒤떨어진다 할지라도 그사람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아야 합니다. 정상적인 기준치에서 뒤떨어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기회를 가지고 생활해나가고 있는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홀 어머니의 아들, 혹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 출신으로 보았습니다. 사실 홀 어머니의 아들이면 어떻고 사생아 출신 이면 또 어떻습니까? 그 출신 성분이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일에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사렛 마을 사람들은 학벌이나 족보 그리고 신분을 따지는 눈으로 예수를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권능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그들은 다수라고 하는 벽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5절 6절입니다. 5.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나사렛 마을 사람들이 왜 믿지 않았습니까? 간단히 대답을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젊은 사람들 중에는 지혜롭고 권위가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믿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알고 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믿지 않으니까 나머지 사람들도 자연히 믿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수와 진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오히려 다수가 잘못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옛날에 이 지구상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했습니다. 콜럼버스가 옳았던 것입니다. 다수가 틀렸습니다.
1600년대에 살았던 갈릴레오는 지구는 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갈릴레오가 옳았던 것입니다. 다수가 틀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누가 복음 4장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 누가복음 4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내용에 없는 두가지 사건을 들어 비유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는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략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많은 과부가 있었다. 그당시에 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과부는 사르밧 한 과부밖에 없었다‘
’엘리사 시대에 많은 나병병자가 있었다. 많은 나병병자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한 사람은 나아만 한사람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당시 다수의 과부들중에 사르밧 과부 한 여인만 은혜를 받았고, 다수의 나병 환자들 중에 나아만 장군 한사람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는 내용을 설교하신 것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과부나 모든 나병병자들에게 권능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극소수 라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사르밧 과부와 나아만 장군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호기심과 관심의 차원의 단계에서 그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성도들은 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나가니까 나도 그들처럼 신앙생활을 해나갑니다. 하지만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에 대해 오늘 본문은 ‘믿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나사렛 마을 사람들중에 소수의 병자들만 고침을 받았습니다. 소수의 병자들만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법과 대학교에서 이런 시험문제가 출제 되었다고 가정해보십시다. ’오바마 전미국 대통령과 박근혜 전한국 대통령의 차이에 대해서 간단히 세가지만 설명해보시오‘ 그런데 어느 법대생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하십시다. 1.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은 남자이지만 박근혜 전 한국대통령은 여자다. 2.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흑인출신이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아시안 출신이다. 3. 오바마 대통령은 결혼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결혼하지 않았다. 자, 이런식으로 두사람의 차이에 대해 대답을 했다면 이 학생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문에 나오는 나사렛 마을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도 바로 이렇게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 뿐 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소크라테스가 위대한 철학자로서 존경을 받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소크라테스가 한 이말 때문이라고 생각해봅니다.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모른다. 그런데 한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정말 모른다고 하는 사실은 확실히 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예수님의 순종에 대해서 잘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성부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실 만큼 사랑이 많으십니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 까지 순종을 하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의 죄를 대신 지불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믿으면 나는 구원받고 천국에 가게 됩니다. 이사실을 오늘날 대다수의 성도들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잘 알고 있다고 하는 바로 이런 내용이 어쩌면 편견이 될 수 있습니다. 나사렛 마을 사람들이 예수를 너무나 잘알고 있는 것과 같은 편견이 될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주님은 나를 보면서 ’너는 나를 믿지 않고 있다’ 라고 말씀을 할수도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알고 있다는 것은 바로 나사렛 마을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차원일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이론으로, 그리고 지식으로 알게 된 것을 가지고 내가 잘알고 있다고 생각할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과 같이 대화를 나누는 신앙생활 속에서 얻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나는 예수님을 올바로 알게 됩니다. 총각 처녀 시절 때 서로 겉으로만 알고 있는 차원이 아니라, 결혼해서 남편이 아내를 알고 아내가 남편을 알 듯이 그렇게 아는 차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다수의 사람들이 말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그 길을 갈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예수님과 날마다 함께 동행하심으로 말미암아 다수가 원한다고 해서가 아닌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그 길을 갈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