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 기적의 한계
Author
kgmcc
Date
2021-10-2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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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장 45-52절>
45.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51.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지난주에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장정만 5천명이상 배불리 먹이고도 열 두 바구니가 가득차게 되었던 오병이어의 기적이 주는 교훈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 벳새다 지역으로 건너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따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십니다. 본문 45절과 46절입니다. 45.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자들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하는데 도중에 큰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 큰 바람으로 인하여 풍랑이 생기게 되고 제자들은 그 풍랑으로 인하여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밤새도록 풍랑과 씨름을 하다보니 밤 사경이 되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바닷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밤 사경 은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를 말합니다. 새벽 4시 전후 이니까 제자들이 아주 탈진하고 지쳐있었을 때 예수님께서 찾아 오신것입니다. 48절입니다. 48.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바다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제자들에게 오신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타십니다. 그리고는 바다와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후에 바다 건너편 지역에 도착하시게 되었다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대략적인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건이 마가복음 5장에 기록되어 있음을 우리는 약 한달전에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이 거라사 지역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때도 큰 바람이 불어와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그당시와 오늘 본문에서의 차이가 있다면 그당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배안에 제자들만 있었다고 하는 점이 다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차이점이 있다면 마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항해하게 된 것은 거라서 지역에 있는 군대귀신 들린자를 치유하시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군대 귀신 들린 거라사 사람을 치유하시고 난 이후에 곧바로 배를 타고 다시 가버나움 지역으로 돌아오십니다. 더러운 군대 귀신들린 그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만나시면서 까지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구하시고는 곧 바로 되돌아 오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배를 타게 된 것은 그 어떤곳으로 가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머물러 있었던 그 현장을 피하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배를 타고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풍랑을 허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풍랑을 허용하셨다면 그 풍랑을 허용하신 주님의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냥 고생만 하라고 풍랑을 허용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기적의 현장에서 떼어놓으시고 오히려 풍랑을 허용하신 주님이 지니신 의도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첫째는 무리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게 하기위해서입니다.
그들로부터 떼어놓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45, 46절입니다. 45.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지금 이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예수님께서는 무리들과 제자들을 떼어놓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한편 무리들에게는 작별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는 재촉하면서 ’빨리 배를 타고 저 건너편으로 가거라‘ 말씀하시고 또 무리들에게는 ’이제 밤이 늦었습니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다음에 또 만나십시다.‘ 이렇게 작별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무리 사이를 떼어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배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무리들과 작별하고는 혼자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당시 제자들은 무리들과 함께 계속 그 현장에 머물고 싶어 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자 무리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같은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입니다. 15.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임금이 되시면 제자들인 자기들도 당연히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려고 하는 그 현장을 떠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진 마음을 아시고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건너편 벳새다 지역으로 보내십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세상의 나라 임금이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시고 예수님은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나라의 왕으로 세울려는 무리들의 영향을 받지 않게 행동 하셨던 것입니다. 세상 무리들로부터 제자들을 떼어놓으신 것입니다. 만일 무리들이 원하는 대로 예수님이 임금이 되셨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구원자로 아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바로 제자들입니다. 제자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이지 세상 무리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고 세상의 것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택하신 제자들을 무리들로부터 받을수 있는 유혹에서부터 벗어나게 하시기 위해서 배를 타고 그 장소를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종 우리에게도 이런 저런 유혹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 유혹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정욕과 물질과 명예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궁극적인 나라는 하늘나라이지 이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떠나게 하신 것은 기적을 바라는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에 있습니다.
48절입니다. 48.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같은 사건이 기록된 요한복음 6장 18절을 보시겠습니다. 18.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예수님의 재촉에 의해서 그 현장을 떠나 배를 타고 항해를 하게 된 제자들은 얼마동안은 조금전에 일어났던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인해 일어났던 흥분된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2만 명이나 되는 수많은 무리들이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에 가득하게 남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두 손을 들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자! 왕으로 모시자!” 라고 힘차게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제자들의 머리와 마음에서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자기 곁에 있는 떡과 물고기가 가득 들어있는 열두 바구니를 보면서 조금전에 일어난 기적에 대해 들뜬 마음으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큰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어납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 제자들은 힘들게 노를 저었습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4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그것은 그만큼 오병이어의 사건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위대한 기적의 역사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큰 기적으로 인하여 생긴 놀라움과 감격은 큰 바람이 불고 그래서 파도가 일어날 때 까지 만 이었습니다. 그 오병이어의 기적이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오병이어의 기적이 풍랑을 만난 제자들을 더욱더 담대하게 만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두려움 속에서 힘들게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이 행하신 기적을 내가 경험하게 되면 나의 신앙이 더욱 성숙하여 지고 그래서 이전보다 더 담대하게 행동 할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할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적을 바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성숙하게 되면 설사 나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버리거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나의 이 가난한 상태가 부요함으로 바뀌어 지지 않고, 나의 심각한 질병이 치유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에게 슬픔과 고통이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병 치유함을 받고 형통하게 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살아갈수 있는 것이 사실은 가장 큰 기적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시면 사도 바울의 몸에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대고 난후에 그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병든 사람에게 얹어놓으면 병이 떠나고 귀신이 떠나가는 기적이 일어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능력의 사도 바울도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가 가진 질병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디모데는 몸이 허약했고 그래서 잔병치레가 많았던 청년이었습니다. 이러한 디모데에게 사도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딤전 5장 23절입니다. 23.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능력의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의 병을 고쳐주지 못하고 왜 이렇게 말을 해야 했던 것입니까? ‘하나님이 너의 위장병과 질병을 고쳐주실줄 믿는다‘ 라고 이렇게 말하는게 사실 더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것과 같은 말을 바울이 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기적은 인간의 소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 현상을 이상하게 적용시켜 주장하고 있는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주변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마스크를 쓰고 백신을 맞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상황과 특별한 상황을 구분하며 신앙생활해나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해나갈때는 특별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땅을 향해 가야 하기 때문에 한 자리에서 마냥 머물수 없습니다. 그러니 농사를 지을 형편이 아니었고 그래서 하나님은 날마다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온 이후로는 더 이상 만나를 내리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농사를 짓고 그 수확물을 먹게 하십니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상황에 맞게 만나 대신 농사짓고 그 수확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위기 상황이나 특별한 경우에 일어난 일들을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상황에 적용시켜서는 안됩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 주변에 의사가 있고 마스크가 있고 백신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해놓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보다 건강한 몸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과학자나 의사를 내주변에 두게 하셨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런 예화가 생각이 납니다. 열심히 믿는 성도가 하루는 강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사람이 허우적거리면서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 라고 열심히 외쳤습니다. 그때 마침 곁에 있었던 사람이 강물에 빠진 것을 보고는 보트를 타고 그사람곁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사람은 보트를 타지 않고 그 사람을 그냥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계속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 외쳤습니다. 그러게 외치다가 결국엔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자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내가 그렇게 부르짖었는데 왜 저를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을 했던 것입니다. ’얘야, 네가 부르짖을 때 내가 보트에 탄 사람을 보내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살려줄려고 보낸 사람을 네가 거부했기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야‘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믿음이 없어서 디모데에게 위장병을 위해 약을 사용해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백신을 맞고 마스크를 쓰는 것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백신이 짐승의 표라고 적용시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몰라서 하는 말이거나 성경 몇 군데를 자기 마음대로 편집해서 하는 말입니다. 짐승의 표가 되어야 하는 전제 조건에서 볼 때 백신은 여러 가지로 맞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시간을 할당해서 설명할 계획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하나님이 뜻에 의해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지은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생명으로 대신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는 사람들마다 구원을 받게 하실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때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9, 30절입니다. 2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내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러니까 그당시 십자가 밑에 있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당신이 기적을 행하여 한번 내려 와보라’ 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면서 굉장히 흥분하였을 것입니다. ‘저 예수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흥분하고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생기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또 다른 기적을 바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기적이 나타나지 않으면 예수님을 떠나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한때 기적을 행하였던 사람으로만 기억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스러워 하시다가 죽으십니다. 하지만 거기에 믿음이 있습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기적의 힘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십자가의 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기적으로 우리는 이땅에서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 내가 풍랑 속에 있고 시련 속에 있다 할지라도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갈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기적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기적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흥분시키는 기적도 아닙니다. 오병이어 사건처럼 특별한 상황에서 한번씩 그럴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주님이 원하시는 기적은 바로 내 배가 부르게 된 기적이 아니라 내 존재를 변화시켜주는 기적입니다. 사탄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으로 변화되어 살아가게 하는 기적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기적입니다. 이 십자가의 기적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님이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보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향하여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2장 39절입니다. 39.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사람들은 기적을 보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한다고 해서 아무 때나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기적만을 보기를 소망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악하게 보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활동을 하시면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보고 믿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 두번 기적을 보고 경험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적만을 쫓아다니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악하고 음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기적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이고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기적을 아무 때나 행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필요하시다고 생각하실때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러니까 기적이 필요한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 입니다. 그리고 적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죽어간 신앙의 선배들의 육신이 무덤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필요하심에 따라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이 완성된 시기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악한 세대일수록 참된 말씀은 사라지고 거짓 기적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하고 음란한 자들은 늘 기적을 위한 기적만 찾고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 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 사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은 믿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기적을 경험한 제자들은 기적을 보고서야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믿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도마와 함께 3년 동안 같이 지낸 것입니다. ‘도마야, 네가 그정도가 되었으면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내가 했던 말을 믿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한다‘ 는 뜻으로 도마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다시오마‘ 수없이 말씀을 하셨는데도 도마는 내가 눈으로 봐야 믿겠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도 도마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주님의 말씀보다는 내눈으로 기적을 봐야 믿겠다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기적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갈때 풍랑이나 고난을 만나게 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인내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떠나게 하신 것은 주님과 함께 하심이 가장 큰 복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50절입니다. 50.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 대해서는 믿음을 가질지언정 자신의 믿음에 대한 믿음은 가지지 말라’ 무슨 말입니까? 자신이 가진 믿음이 크다고 생각하고 살아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믿음으로는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어나면 하루 이틀 견디기가 힘듭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붙잡고 살아가야 할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주님, 저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저는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이 있는 것 같지만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어나면 죽을까 두려워하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날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면 믿음의 사람들이 지치고 힘들어 할때 주님이 찾아오시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나와서 쓸쓸한 들판에서 외롭게 잠을 자고 있었을때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엘리야 선지자를 보십시오. 엘리야 선지자가 더 이상 살아갈 힘을 잃어버리고 로뎀나무 밑에 쓰러져 있었을때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바울과 실라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어둡고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었을때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38년 동안 실로암 연못가에서 누워있었던 병자에게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사흘동안 무덤속에 들어가 있던 나사로에게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이렇게 성경은 고통과 절망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시는 주님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인생길을 걸어가다가 고통과 절망속에 있을때 주님이 찾아오시겠다고 하는 사인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고통과 어려움속에 있을때 주님은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그 밤사경에 예수님은 찾아오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가 인생이라는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 하다 보면 풍랑을 만날때가 있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는 풍랑을 만나기도 하고 사랑하는 가족이 죽는 슬픔의 풍랑을 만나기도 합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잃어버리는 물질의 풍랑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기가 도저히 불가능 할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바로 나의 연약한 믿음을 고백하고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반드시 찾아오시고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얻을수 없는 평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의 믿음이 작고 연약함을 고백하십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한시라도 다른데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중에 가장 큰 축복은 바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이 비록 풍랑속에 있다 할지라도 그래서 두려움 속에 있다 할지라도 주님을 바라보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