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마가복음27. 누가 더 크냐

Author
kgmcc
Date
2021-12-15 14:48
Views
133
본문 : 마가복음 9장 33-44절

날짜 : 2021년 12월 15일

 

<마가복음 9장 33-40절>

33.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38.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지난주에 우리는 믿음과 기도에 관해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중에도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기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아는 믿음이 없는 자가 있었죠.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경우가 여기에 속하였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에게 믿음이 있는줄 아는 믿음이 없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여기에 속하였죠. 네 자신을 알라 라고 말한 유명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소크라 테스입니다. ‘나는 너희들과 다른점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바로 너희들은 안다는 것이고 나는 모른다는 점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모른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온라인에서 나온 유머를 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나는 모른다고 하는 사실 하나만을 알 뿐이다’ 라고 말하니까 옆에있던 사람이 이렇게 묻습니다. ‘소크라테스 당신을 어떻게 그사실을 알았습니까?’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마누라가 내게 알려주더군요. 나는 아는게 하나도 없다고...’

마찬가지로 믿음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 없는 두 종류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께 믿음을 달라고 간구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엇인가 신앙이 부족하거나 연약한 사람들을 보면 지적하고 비판하는 모습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자기에게 믿음이 있는줄 아는 믿음이 없는자들 때문에 항상 문제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처럼 믿음이 작은자들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작은 사람들이 지닌 특징은 주님의 뜻을 따를려고 노력하고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래도 믿음이 어느정도는 있기에 주님을 따랐습니다. 믿음이 어느정도는 있었기에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볼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작은 자들은 애를 써고 노력은 하지만 자신의 경험과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귀신을 내쫓는 행위를 했지만 제자들의 마음 깊은 속에는 귀신이 쫓겨나게 되면 자기를 알아주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자기 과시와 자기 욕망을 이룰려고 하는 자기 중심적인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성숙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작은 자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을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지니고 있는 믿음이 남보다는 더 크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누가 더 크냐?”

오늘 본문은 갈릴리 지역 가버나움의 어느 한 집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마도 이 가버나움의 집은 베드로의 집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33절입니다. 33.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길에서 토론한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물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우리들 중에서 누가 더 크냐“ 라는 주제를 놓고 서로 논쟁을 하고 토론을 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34절입니다. 34.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그들이 잠잠하니‘ 예수님께서 갑자기 조금전에 자기들 사이에서 일어난 그 사건을 물어보시니까 제자들은 마음에 조금 찔림이 있어서인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위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 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한 것이 조금은 민망했던 것 같습니다. ’누가 더 크냐‘ 라고 하는 이 논쟁은 아마도 산위에 올라갔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명의 제자들과 그리고 산 아래에 남아있었던 아홉명의 제자들이 서로 각각 팀으로 나뉘어져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산위에 올라갔던 세명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논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게 되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세명의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있었던 예수님 그 우편과 좌편은 누가 차지하게 될것인가에 대해서 세명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논쟁 꺼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짾튼 변화산 사건이후 제자들이 가졌던 관심은 ’누가 더 크냐’ 에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더 크냐‘ 이 주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절입니다. 35.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앞자리가 아니라 끝자리에 있는 사람이 큰 자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끝자리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끝자리에 있는 사람은 마지막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뭇사람을 섬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그러니까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큰자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주님이 보시기에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섬겨야 하는데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큰자가 되기 위해서는 섬겨야 하는데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1.사람들의 눈에 작고 하찮은 자를 섬겨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 하신후에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안으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 37절입니다. 36.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내앞을 지나가고 있는 어린아이 한명을 내가 붙들고 잘 대접한다고 해서 나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있습니까? 나와 아무상관이 없는 지나가는 어린아이를 대접했다고 하면 뭐 기쁜 마음이야 생길수 있겠지요. 하지만 특별히 내게 돌아오는 이익은 없습니다. ‘아저씨, 아줌마, 언니 오빠 고맙습니다’ 이런 인사는 듣겠지만 그게 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명한 사람을 대접했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만일 제자 방탄 소년단(BTS)을 대접했는데 그 방탄소년단이 대접받았다고 저희 교회에 한번 방문하겠다고 하면 그 주일에는 저희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겠지요. 아마도 교회 파킹락에 차를 세울 장소도 없게 될 것이고 교통 순경이 와서 거리 정리를 해야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유명한 사람을 대접한다면 사람들에게 자랑꺼리가 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사람이 나중에 나를 대접한다면 나에게 좋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섬기고 대접하는 대상을 결정할 때 무엇보다도 우선 자기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가를 계산해서 대접하고 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신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섬기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섬기고 난 이후에 내게 어떤 유익이 돌아올까를 계산하고 섬기고 봉사해서는 안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2절에서 14절까지를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부자나 유명한 사람을 대접하지 말아라.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 과부와 거지 같은 사람들을 대접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요? 가난한 과부나 거지나 병자와 같은 사람들은 잘 대접을 하고 섬겨도 본문에 나오는 어린아이처럼 내게 돌아올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대접하고 섬기는 것으로 끝나야 한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때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가 이땅에서 섬기고 이땅에서 희생하고 이땅에서 봉사를 한 것에 대해서는 이땅의 사람들로부터 갚음을 받지 않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아쉽고 서운한 감은 있을수 있겠지만 훗날에 하나님을 만나게 될때 주님이 갚아주시는 것이 훨씬 더 큰 보상이 됩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몇시간 전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런데 그다음 2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2.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그당시 저녁 식사하는 동안 가룟유다는 시시탐탐 예수님을 팔려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식사하시는 도중 일어나셔서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그당시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줄만큼 좋은 분위기가 아닙니다. 가롯유다는 언제 예수를 팔아버리면 좋을까 그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룟유다의 밀고로 인해서 예수님은 붙잡히시고 고난을 겪다가 십자에게서 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실때 제자들은 지금 씻겨주고 있는 그 발을 가지고 다 도망을 갈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씻기시는 발들 중에는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배반자의 발과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가는 발 들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바라고 섬기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에게는 오직 한분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분만 아시고 계시면 된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그 누구가 알아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의 이 섬김과 이 헌신을 인정해주시면 그것으로 나는 족하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지니고 계신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헌신과 우리의 섬김은 주님만이 아시고 인정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섬김의 클라이맥스 장면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예수님께서 생명을 바치시면서까지 섬기신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기심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니까 하나님이 높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보좌의 자리에 까지 높여주시고 하늘나라 왕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늘나라 백성이 되어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고 계시는 어린아이 하나는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천국에 들어가게 된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입니다. 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어린아이처럼 지극히 작은자 하나를 섬기고 대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주님이 보시기에 가장 큰자인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큰 자가 되기 위해서 섬겨야 하는데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2.예수님 이름으로 섬겨야 합니다

37절입니다. 37.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내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문재인 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한국의 대통령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이든 이라는 이름을 듣으면 미국 대통령을 생각하고 김연아 라는 이름을 들으면 피겨여왕을 생각합니다. 반면에 이완용이란 이름을 들으면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중에 이완용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없습니다. 자기 자식이 나라를 팔아먹는 이완용이 되길 소망하는 부모님은 없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급 공무원이 '대통령의 이름'을 내세워 가지고 무슨 일을 진행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대통령의 이름으로' 무엇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곧 대통령이 가진 생각과 계획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사람이 하는 행동은 곧 대통령의 뜻과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의 생각과 뜻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이름을 내세워가지고 행동을 하고 그 어떤 목적을 달성하게 되면 그것은 불법이 됩니다. 그 사람은 사기꾼이 되어서 감옥에 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은 반드시 예수님의 생각과 계획에 맞게 행동해야 함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워가지고 주님의 뜻과 계획과는 상관없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날에 지옥에 가게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항의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입니다.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지막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서 저희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행하였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3절입니다.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했지만 사실 예수님의 뜻과 계획이 아니라 자신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섬기고 봉사한다는 것은 내 욕심과 내 욕망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고 주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섬기고 봉사를 하는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내 뜻을 이룰려고만 하면 주님이 욕먹게 될것입니다. 오늘날 이슬람 교도들 중에 과격한 사람들이 알라의 이름으로 테러와 온갖 악행을 저지릅니다. 알라의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과격한 이슬람 교도들이 저지르는 행위로 인해서 알라신이 욕먹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반드시 예수님의 뜻과 예수님의 계획과 일치되어야 함을 전제로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예수님의 뜻과 그분의 계획이 나의 말과 나의 행동에 있어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행할때는 주님의 뜻과 계획이 일치되어야 함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큰자가 되기 위해서 섬겨야 하는데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3.파벌을 넘어서서 섬겨야 합니다.

제자들중 요한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38절입니다. 38.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사람에게 앞으로 그런짓을 하지 말라고 금하였습니다. 요한이 왜 이런 말을 했나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든지 내이름으로 하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이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데 그일을 금지시켜야 하는 것이 맞죠? 이런 의도를 가지고 제자 요한이 예수님께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선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39, 40절입니다. 39.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쉽게 말하면 ‘그냥 두어라 그사람도 우리편이야’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수많은 교단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교단들은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을 합니다. 교단들끼리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교단은 세례를 주고 어떤 교단은 침례를 줍니다. 어떤 교단은 토요일 예배를 드리고 어떤 교단은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 형식도 다르고 신앙생활 해나가는 방법도 저마다 다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 형식을 따르지 않다고 하는 것 때문에 우리는 제자 요한처럼 그들을 배척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옳고 너희는 틀렸어 이렇게 편을 가르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이름으로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생각과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 이름을 사용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지막 날에 주님이 판단하실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 하십니다. 밭에 곡식 뿐만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자라는 것을 보게 된 종이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밭에 가라지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가라지를 뽑을까요?’ 그때 주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13장 29, 30절입니다. 29.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주님은 혹시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칠까봐 추수때까지 그냥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신앙생활해 나가는데 실제로는 자기 욕심과 자기 과시를 해나가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에게 맡겨야 합티다. 주님은 얼마든지 이기적인 사람을 사용해서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사람이 한 신앙의 행위는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한 것인지, 주님의 뜻을 위한 행동인지는 주님이 판단하실 문제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교단이 다르다 할지라도 나와 뜻이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사람을 정죄하거나 그사람을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권한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작고 보잘것없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섬기고 대접하는 신앙 생활을 해나가심으로서 주님이 보시기에 가장 큰자가 될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