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32. 머물러 서게하라
<마가복음 10장 46-52절>
46.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활동을 하실 때 역설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가르침을 주신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역설적인 방법이란 서로 반대되는 단어를 사용해서 보다 깊은 진리를 가르쳐주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라든지 ‘먼저 된자가 나중되고 나중된자가 먼저 된다’ 그리고 지난주에 살펴본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듬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를 들수 있습니다. ‘죽는다’ ‘산다’ ‘먼저된다’. ‘나중된다‘ 그리고 ’으뜸’ 과 ’종’ 이런 서로 대조되는 단어를 사용해서 보다 깊은 진리를 가르치는 역설적인 방법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다 깊은 진리를 깨닫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맹인을 고치시고 난 이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입니다.
3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기 하려 함이라’ 보지 못한다. 본다. 이렇게 서로 대조되고 반대되는 단어를 사용해서 깊은 가르침을 주시는 예수님을 볼수 있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주변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말씀하신 그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40절입니다. 40.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4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의미는 죄가 없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진리를 보지 못하고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진리를 보게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이요 생명이다.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인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인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맹인이기 때문에 영생으로 가는 길을 찾아갈수 없고 따라서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당시 바리새인들은 죄를 짓고 살아가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의롭다고 생각하며 살아갔습니다. 의롭기 때문에 물론 구원받고 영생을 누리며 천국에서 살아갈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진리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 이었던 것입니다.
◎ 영적인 시력의 회복
자,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누리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살펴본 부자 청년처럼 영생을 얻기 위해서 자기가 무엇을 할려고 하면 절망하고 낙심하면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하실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믿을 때 영생을 얻을수 있다는 것이 부자 청년 사건이 주는 교훈인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두운 방에 있는 창문 커텐을 열어서 빛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빛이 하늘로부터 비추고 있지만 커텐으로 막고 있다면 방안은 어두운 상태가 될 것 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음으로 나자신의 마음의 커텐을 열 때 하나님의 빛이 우리 마음의 방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열려진 커텐 사이로 들어오는 그 빛으로 인해 내 마음의 방구석 구석을 볼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먼지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빛 인하여 나 자신이 더러운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2장을 보시면 한평생동안 구원자, 메시야를 기다려왔던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 마리아 품에 안긴 아기 예수님을 보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누가복음 2장 32절입니다.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인 저와 여러분의 심령을 비추시는 빛이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창문 커텐을 열면 빛되신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짓고 살아가는 죄인이고 이러한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죄값을 치루어 주셨다는 사실이 알게 되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에 대해 감사하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육신적으로 보지 못하던 맹인이었던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보게 된 사건이 나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베푸신 기적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눈 먼자를 고치시고 고침을 받은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사건이 마가복음에 기록된 마지막 기적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받는 구원은 곧 영적인 시력을 회복하는 사건 인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보게 된 것은 믿음으로 마음의 커텐 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서 육신적으로는 보게 되었고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52절입니다.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그가 곧 보게 되어 (육신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바디매오는 육적인 눈만 아니라 영적인 눈까지도 열려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너무 좋은 결과입니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에게는 이보다 더 이상 좋은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좋은 결과의 시작은 지나가시던 예수님이 멈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49절입니다. ‘49.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맹인이 어떻게 하였기에 길을 가시던 예수님이 멈추어 서신 것입니까? 그리고 보지 못하던 바디매오 를 보게 하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까?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이 멈추어 서신 이유를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도 지나가시던 예수님이 멈추어 서심으로 말미암아 이 맹인이 얻은 축복을 누리며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멈추게 하시기 이 맹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첫째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이 맹인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요? 자기가 그동안 그렇게 만나기를 사모하고 소원해왔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내가 그렇게도 만나기를 기다렸던 예수님이 지금 내앞을 지나가신단 말인가?” 그래서 큰 소리로 외쳤던 것입니다.
47절입니다. “47.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이르되...’ 이 맹인 거지는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시란 말을 듣자마자 소리 질렀던 것입니다. 만일에 이맹인이 그 순간을 놓쳤다면 더 이상 기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요?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고 계시는 중 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길은 예수님의 마지막 길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 맹인이 그 순간을 놓쳤다면 이 사람이 눈을 뜰수 있는 기회는 더 이상 없었을 것입니다. 기회는 언제나 오지 않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우리는 이것이 마지막이다 라는 생각으로 그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는 이 맹인의 모습에서 얻을수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맹인은 자기에게 온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공의 기회가 언제나 주어진다면 실패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회는 어느 순간에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기회는 앞 머리는 숱이 많고 길지만 뒤에는 머리가 없는 대머리와 같다.’ 앞에 있을때는 쉽게 잡을수 있지만 지나가버리면 뒤에 머리숱이 없기 때문에 잡을수가 없는 대머리처럼 기회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내일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합니다. 내일이 뭡니까? 한시간이나 1분 앞에 일어날 일도 알지 못합니다. 몇초앞에 일어날 일을 안다면 교통사고로 죽음을 당하는 일이 왜 일어나겠습니까? 그럼으로 우리는 내일이 아닌 오늘 현재 충성하고 오늘 서김과 봉사를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충성하지 못한 사람은 내일도 충성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다음이 아니라 지금이 중요합니다. 바라옵기는 지금 우리에게 오는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멈추게 하시기 이 맹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둘째로 이 맹인은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다시 한번 47절을 보시겠습니다. “47.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사람들은 이 맹인에게 지금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 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맹인은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소리 질러 외쳤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하는 표현은 ‘메시야 구세주여’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 맹인은 지나가는 예수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로 믿었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 맹인은 보지 못해서 구약 성경을 읽어 볼수 없었지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귀로 들을수는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앞을 지나가는 랍비나 구약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 맹인을 위로하고 소망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구약에 기록된 말씀을 한마디씩 던질 때 그 말씀을 듣으면서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맹인 거지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대로 메시야가 오시면 ‘맹인의 눈이 밝아질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게 될 것이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말씀을 귀로 듣고 생긴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눈먼 맹인을 보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죽은자도 살리시는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야 구세주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 물으실 때 맹인이 이렇게 대답했던 것입니다. 51절입니다. 51.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맹인거지는 돈을 원하지도 않았고 음식을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보기를 원한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갑부라 할지라도 눈먼 맹인을 보게 해줄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권력이 있는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보게 해줄수는 없습니다. 무슨 재주로 맹인의 두 눈을 뜨게 해 줄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맹인이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말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전능하신 메시야 구세주로 믿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 구약 성경을 보면 능력을 행하였던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능력의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준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하는 고백은 대단한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이러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으십니까? 저와 여러분의 연약한 부분을 강하게 해주시고 회복시켜 주심을 믿고 고백을 하십시다. “주님 이시간에 허리의 디스크를 낫게 해주십시오. 주님 이시간에 위장병을 낫게 해주십시오. 주님 이시간에 악한 영들이 물러가 맑은 정신을 가지게 해주십시오. 주님 이시간에 관절염이 낫게 해주십시오. 주님이 구세주이시고 메시야 이심을 제가 믿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맹인처럼 이러한 고백을 하실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멈추게 하시기 이 맹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세째로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믿음으로 고백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48절입니다. “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꾸짖고 잠잠하라고 말했지만 이 맹인은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서 “소리지르다” 로 번역이 된 헬라어는 본래 까마귀 떼가 떠드는 소리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나누어지는 언어입니다. 소리를 내어도 남자의 소리가 있고 여자의 소리가 있고 이런 까마귀떼의 소리를 내는 표현이 다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 헬라어는 세상의 어떤 언어보다도 더 세심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까마귀가 우는 소리가 얼마나 옥타브가 높습니까? 그래서 멀리 있어도 귀에 잘 들리는 것입니다. 안 들을려고 해도 안 들릴수가 없는 높은 소리입니다. 이것은 이 맹인 바디매오의 외침이 정말 간절한 부르짖음이었다는 의미 합니다. 앞서가는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고 꾸짖어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까마귀 소리를 내면서 까지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기도는 간절해야 하는 것입니다. 들어주시면 좋고 안들어 주셔도 무방하다는 식의 기도는 믿음의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시편 50편 15절입니다.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편50:15)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라’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더욱 부르짖는 행위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이 맹인의 부르짖음에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신 것입니다. 49절입니다. “49.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예수님께서 왜 멈추셨습니까?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더욱 큰소리로 까마귀 소리를 내듯이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이시간 저와 여러분 앞에 예수님은 지나가십니다. 이 지나가시는 예수님은 이제 다신 더 내 앞을 지나가지 않으실수 있습니다. 바꾸어 표현하자면 저와 여러분의 귀에 지금 나에게 필요한 내용의 메시지가 들리는 것이 마지막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 지나가시는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이 가장 절실하고 가장 필요로 한 소원을 들어주시고 이루어주실수 있으신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 때문에 주저하고 그냥 포기할때가 많습니다. ‘믿어도 안돼. 기도해도 안되는 것은 안되는 거야. 기도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수 있고 그것이 맞는 생각 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생각과 믿음의 말은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을 보시고 역사를 하시는 것이지 이치에 맞는 생각과 이치에 맞는 말을 들으시고 역사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맞는 말들은 많이 하지만 믿음의 말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자, 만일 이 맹인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냥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다. 잠잠하라’ 라는 소리를 듣고 포기하고 다시 주저 앉아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평생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평생을 구걸하는 거지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누가 나를 말린다할지라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확실히 믿으신다면 더욱 앞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더욱 큰소리로 외치며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소원을 아뢰시길 바랍니다. 52절입니다.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리라’. ‘너의 간절한 소원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너의 까마귀 같은 시끄러운 소리가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믿음의 통로를 따라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만듭니다. 믿음은 될 수 없는 것을 될수 있게 만듭니다. 이 맹인은 예수님이 메시야 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행동을 했습니다. 믿음으로 인해 이 맹인이 눈을 뜨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누가 복음 18장 43절을 보시면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3.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맹인의 변화된 삶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음의 고백과 믿음의 행동을 하게 되면 내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시는 일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주를 찬양하며 영광돌릴 수 있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이 이런 저런 환경속에 있을 때 나의 앞을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그 예수님을 멈추게 하는 믿음의 고백과 믿음을 행동을 할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