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39. 서기관들을 삼가라
<마가복음 12장 38-44절>
38.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성전에 와서 두 렙돈을 헌금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가지고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헌금의 정신’ 이나 ‘헌금의 원리 ’ 라는 제목으로 자주 설교하고 있습니다.
“헌금은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과부는 작은 액수를 드렸지만 자신의 전 재산을 드렸다. 이 여인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릴수 있는 헌신적인 신앙행위를 우리는 본받아야 한다.” 라는 식의 메시지를 들어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본문의 장면은 헌금을 강조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당시 교회 지도자를 책망하는 것에 있습니다. 성경을 볼때는 반드시 전후 맥락을 살펴서 전체로 보아야 올바르게 해석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지난번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가난한 과부가 성전에 와서 헌금을 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38절과 39절입니다. 38.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서기관들을 삼가라’ 서기관들을 멀리 하라는 것이죠. 왜요?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시장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는 것을 좋아하고 회당에서나 잔치집에 가서는 언제나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아주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이기 때문 입니다. 이렇게 서기관에 대해서 책망하시면서 예수님은 한마디 말씀을 더 하십니다. 본문 40절입니다. 40.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그들은 (서기관들이죠) 서기관들은’ 과부의 재산을 삼키고 길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이 더 심한 심판을 받게 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난 직후에 예수님께서 헌금함 앞에 자리를 깔고 앉으십니다. 그리고는 헌금하는 사람들은 보고 계십니다. 그때 여러 부자들은 헌금함에 많은 돈을 넣었고, 가난하고 힘없는 한 과부는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본문 41절 42절입니다. 41.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부자는 많은 헌금하고도 쓸 것이 풍족하게 남아있었지만, 과부는 헌금한 후에 남아 있는 돈이 없을만큼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이 여인이 헌금한 두 렙돈은 당시 화폐 단위에서 가장 작은 동전입니다. 한 렙돈은 오늘날 시세로는 1달라 정도라고 할수 있으니까 두 렙돈은 2달라 정도 됩니다. 당시 한 렙돈은 비둘기 반마리 값이니까 비둘기 한 마리를 살려면 두 렙돈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비둘기 한 마리값이 당시 하나님께 온전하게 바칠수 있는 가장 작은 제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당시 성전법에 의하면 하나님께 최소한 비둘기 한 마리 값을 드려야 하기에 한 렙돈은 헌금할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한 렙돈만 드리고 싶어도 그당시 성전 법에 따라 두 렙돈을 드릴 수밖에 없는 환경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과부가 자발적으로 감사가 우러나서 모두 헌금했다면 좋은 헌금의 모범이 될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쩔수 없이 ‘두 렙돈’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물론 이여인은 오늘 내일 당장 먹고 살 것도 없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다바쳤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제물을 드리기 위해선 최소한 비둘기 한 마리 값을 드려야 했기때문에 자신의 전재산인 두 렙돈을 드려야 했던 것이 전체 맥락을 볼 때 더 상식적이다 라고 할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읽어보시면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해 칭찬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헌금이 아름답고 복되다”, “이런 게 진짜 헌금이다” 라는 식의 칭찬의 말씀은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이 여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헌금하였다’ 라고만 말씀하십니다. 43절 후반부입니다. 43.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누가복음 21장에서도 같은 장면이 기록되어있지만 오늘 본문처럼 똑같은 내용의 말씀을 하십니다. 가진 재산의 비율을 따져볼 때 다른사람들보다는 비교할수 없는 높은 비율로 헌금 하였다는 점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 전체를 보게 되면 이 본문의 주제는 헌금에 대한 것 이라기 보다는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성전의 법을 고발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 관한 법과 종교 지도자의 권위로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착취하고 있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44절입니다.
44.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하루 벌어 살아가는 이 여인의 하루 품삯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하루 온종일 일해서 번 돈을 성전에 헌금으로 모두 내었던 것입니다. 왜요? 그당시 성전법이 그러했고, 이러한 성전 법을 따르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서기관과 제사장들은 그렇게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앞에 어떻게 비둘기 반토막을 드릴수 있느냐? 최소한 비둘기 한 마리는 드려야 온전한 예물이 된다 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메세지는 말이 설교지 힘없는 자를 향한 협박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오늘 내일 먹을것이 없다 할지라도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자기 모든 재산을 헌금한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고 오로지 감사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모두를 드릴수도 있었겠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당시 성전법을 따라 두렙돈을 헌금했을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과부의 헌금을 비교하셨습니다, 비교하셨다는 것은 부자들이 낸 헌금은 비난 하시고 과부가 낸 헌금은 칭찬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자들이 풍족한 가운데 드린 것에 대하여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부자도 그냥 저절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고 노력을 해서 부자가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많이 드릴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과부처럼 가진 것을 헌금으로 다 바쳐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말씀을 하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논쟁을 하고 난이후에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삼년동안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바칠 것이 없는 환경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8절입니다. 28.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제자들은 이미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러니까 과부가 전 재산을 헌금하는 것을 본보기로 삼아서 ‘이 과부처럼 전 재산을 바쳐야 한다‘ 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은 아닌 것 입니다. 너무 중요해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성경 전후맥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은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라고 말씀하시고 난 이후에 제자들이 묻고 예수님이 대답을 하시는 장면이 그 다음장 13장에 나옵니다. 원래 성경은 이렇게 장과 절로 구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1장 2장 3장 1절 2절 3절 이렇게 구분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성경 원본을 보게 되면 그냥 쭉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현재 이 성경의 모습으로 전 세계적으로 장과 절이 통일되어 구분된 것은 1555년 이후입니다. 제네바 성경에서 표기된 장절을 전 세계에서 받아들임으로서 이렇게 오늘날 통일된 성경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이전에도 장과 절이 구분된 적이 있는데 사람마다 국가마다 다 달라서 통일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장과 절이 구분되어있으면 성경을 찾기도 쉽고 성경 말씀을 연구하기도 쉽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공부를 하는 중에 인도자가 ’이사야 3장 15절을 찾아보십시다’ 라고 말하면 성경공부에 참석한 성도들은 모두 이사야 3장 15절을 찾아 그 내용을 읽을수 있습니다. 이렇게 장과 절이 구분되어있으면 성경 말씀을 찾기가 쉽고 성경공부하기에도 편리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장과 절로 구분되어있다 보니까 정해놓은 장과 절을 따라서 성경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어서 원래 성경이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생기게됩니다. 바울 서신서를 읽을 때 이러한 현상이 종종 생깁니다. 고린도 전, 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골로새서 이런 신약성경은 편지입니다. 그러니까 편지는 한순간에 읽어야 그 의미를 알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친구한테 편지가 왔는데 그 장수가 다섯 페이지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 페이지 읽고, 내일 그다음 한 페이지 읽고 그다음날은 바쁜일이 생겨서 그냥 건너뛰고 이렇게 해서 약 2주일이 지나서 그 편지를 다 읽었다면 자기 친구가 가지고 있는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내기는 힘들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이 이렇게 장절로 구분되어 있다가 보니까 대부분 교회에서 한주에 1장씩 공부를 할때도 있고 1장도 두 번 세 번 나누어서 공부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전체적인 의미를 놓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럼으모 바울서신서의 경우는 각각의 서신서마다 단번에 읽을수 있어야 효율적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그당시 종교지도자인 서기관이 하는 행동을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바리세인 제사장 헤롯당원 그리고 사두개인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을 하고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제사장과 장로들과 논쟁이 끝나면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예수님께 와서 시험합니다. 그들과 논쟁이 끝나자 사두개인들이 와서 시험합니다. 그리고 서기관이 와서 또 시험하여 묻습니다. 이런 상황의 연속이니까 좋은 분위기가 아닌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서기관의 좋지 않은 모습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시고 난 이후에 과부가 성전에 들어와서 두 렙돈을 넣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이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마가복음 12장은 끝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설교도 여기서 같이 끝납니다. 그리고 13장은 그 다음주에 새롭게 공부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보니 전혀 다른 메시지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이 장면은 12장과 13장이 나뉘어진 것보다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더 낫습니다. 장과 절로 구분해서 편리하고 좋은 면도 많지만 오늘 본문의 경우는 아쉬운 면이 있는 경우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과부에 대한 말씀을 하신후에 제자들이 질문을 하고 예수님께서 대답을 합니다. 13장 1절과 2절입니다. 1.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 성전안에서 그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하고 난후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을 나오면서 제자들이 성전에 대해 말할때 예수님께서는 돌하나도 돌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왜 무너집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성전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망하게 된다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종교지도자들의 잘못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실천을 해야 할 서기관들이 사회의 약자인 과부들의 재산을 탈취하고 자신의 배를 불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로서 가난한 과부들을 돌보지 않고 자신들이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사건이 기록된 누가복음 21장을 보시면 성전은 헌물로 지어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1장 5절입니다. 5.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
그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아름다운 돌과 헌물 즉 헌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헌금은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도 있지만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의 강요로 인해 드려진 헌금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의 헌금으로 세워진 성전이었던 것을 성경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전재산인 두 렙돈의 헌금을 바칠 수 밖에 없는 것 처럼 그당시 많은 경우 성전에 바쳐야 한다는 강요로 인해 부득불 바쳐진 헌금으로 세워진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과부가 드린 두 렙돈에 대한 이야기의 핵심은 그당시 사회의 약자를 돌보지 않고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기에만 정신이 팔린 그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책망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중요한 교훈이 있다면 이러한 종교적인 타락과 문제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헌금을 드릴수 있도록 그냥 두셨다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타락했는데 네가 헌금을 왜하니? 헌금 할 필요가 없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 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이 여인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드리는 수고와 희생을 인정하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속화되어가는 모습을 우리는 여기저기서 보게 됩니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 헌금을 강요하는 모습은 우리는 너무도 쉽게 볼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모습은 성도들이 이러한 이유로 교회를 떠난다는 것에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성도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신앙적인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가 타락했다고 해서 성도가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 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님은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이 세속주의에 물들어있는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러한 교회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교회의 모습이 보인다 할지라도 성도로서의 책임과 의무는 다하며 신앙생활 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이 과부가 바친 헌금을 인정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교훈을 얻을수 있습니다.
주님은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바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실 만큼 자비가 없으신 분은 아니십니다. 신명기 26장 12절입니다.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 26:12)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십일조를 통해서 혜택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과부가 나옵니다. 성경은 종교적인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 자신인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손으로 따서 먹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어찌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일을 해서 자신의 배를 채웁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 2:27) 또 다른 예로는 그당시 적지않은 유대인들이 “고르반” 제도를 이용했습니다.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면서 부모를 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바칠 돈은 부모님께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고르반 제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렸으면 됐다는 말이죠. 이런 고르반제도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시면서 책망하십니다. “차라리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말고, 부모님께 드려라! 살아 있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겠느냐?”(막 7:11~13) 이렇게 예수님은 그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는 것 보다 이웃사랑을 하는 것이 더 실제적이고 성숙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형식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어느 한 교회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교회 성도 중 한 분이 평소 입버릇처럼 “나는 죽으면 내 재산 다 하나님 앞에 바치겠다” 는 망을 하고 다녔답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됐는지 일찍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이 분에게는 젊은 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아내는 남편이 남겨놓은 재산을 가지고 자식과 함께 먹고 살아가야 되는데 남편이 했던 말이 자꾸 자기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걸 다 드리고 나면 자식들하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겁니다. 남편이 남겨놓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게로 세준 허름한 건물이었는데 그 건물의 가치가 7천 5백만원 정도였습니다. 그 가게를 이천오백만원에 남에게 세를 주고 그리고 자기 가족들은 한달치 페이먼트를 주는 방을 얻어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 아내가 몇 날 몇 일을 고민하다가 전 재산들 다 정리해서 남편이 한 말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로 가지고 왔답니다. 교회는 이 여인의 형편을 알지만 헌금으로 드린 것이니까 일단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목사님이 장로님들을 불러서 임시 당회를 열었습니다. “아무개 미망인이 남편이 죽은 다음에 남편이 평상시에 한 말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전재산을 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리고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회의를 한 끝에 이 헌금을 바로 구제대상을 정해서 구제비로 사용하도록 결정했습니다. 구제대상은 물론 그 여인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날 구제 명목으로 교회 이름으로 그 여인에게 같은 액수를 드려서 여인과 자녀들이 살아갈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마지막 남은 동전 두 닢을 드리고 이제부터 당장 굶어야 할 과부를 보면서 예수님께서 헌금을 할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이렇게 헌금을 하라는 의도로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헌금을 내도록 해야 했던 서기관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책망하신 것을 우리는 생각할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지나친 헌금 강요가 일반화 되어 있습니다. 헌금에 대한 강요 때문에 교회에 다니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헌금에 대한 설교를 거의 하지 않는 편입니다. 지금까지 헌금에 대한 설교는 고린도전서 강해를 할 때 헌금에 대한 내용이 있어서 그때 한, 두번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헌금의 정신에 대해 올바로 가르치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의미입니다. 헌금에 대한 부작용들이 많으니까 제가 의도를 가지고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이지만 성도로서 헌금하는 올바른 마음가짐에 대해 올바른 가르침은 성도의 축복을 위해서라도 강조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앞에 예배를 드릴때는 예물을 가져오는 것이 온전한 예배입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다는 사실을 주님은 잘아십니다. 그리고 돈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이 전부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헌금을 드리거나 드리지 않거나, 그 사람의 능력이 많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별 상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돈의 액수나 그사람의 조건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해나가십니다. 돈이나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십니다. 고후 9장 10절입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고후 9:10)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십니다. 목회는 목사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만약 교회가 돈으로 운영된다면, 기업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정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업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