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마가복음 48. 선택의 결과

Author
kgmcc
Date
2022-05-11 02:29
Views
223
본문 : 마가복음 15장 24-37절

날짜 : 2022년 5월 11일

 

<마가복음 15장 24-37절>

24.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없음)

2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33.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운명하시는 동안에 일어난 장면이 나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전에 예수님께서는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25.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때가 제 삼시가 되어’ 이것은 그당시 유대인 시간표로 기록한 것인데 오늘날 시간으로 보면 9시가 됩니다. 참고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은 유대인 시간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유대인 시간에다가 6을 더하게 되면 오늘날과 같은 시간이 됩니다. 세시니까 6을 더하면 9시가 되는 것이죠. 오전 9시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못박히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로마식 시간표로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로마식 시간은 오늘날 시간과 똑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된 시간이 요한복음에도 나오는데 요한복음 19장 14절입니다. 14.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이 장면은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에 대한 재판을 다 마치고 난후에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그때 시간이 제 육시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기록된 시간은 로마식으로 기록 되었으니까 오늘날 아침 6시와 같은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아침 6시에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에 대한 재판을 다 마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도록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3시간 후인 아침 9시에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그리고 낮 12시부터 시작해서 3시간동안 어둠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오후 세시에 예수님께서 운명하셨습니다. 본문 33절과 34절입니다.

33.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제 육시가 되매’ 육시는 오늘날 시간으로는 6을 더하면 12시가 되죠. 어둠이 육시부터 구시까지 계속 되었는데 구시는 6을 더하면 오늘날 오후 3시가 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37절입니다. 37.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앞에 살펴본 구절과 함께 연결해서 정리를 해보면 예수님께서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오후 세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니까 6시간동안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고통을 당하신후에 운명하신 것입니다. 그당시 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이었던 시세로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심판은 바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는 처형이다” 그래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처형이 바로 십자가사형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처형은 바로 사람을 서서히 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힌채로 고통을 느끼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처형이 바로 십자가의 형벌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셔야 했습니까? 꼭 죽으셔야 한다면 그냥 독약이 든 물을 마시고 죽을 수도 있고 한순간에 목이 잘려 죽는 참수형도 있는데 왜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들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셔야 했습니까? 그 이유를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이렇게 말씀 합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이유는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자 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구약에서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구약 신명기 21장 23절입니다. “23.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무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을 의미하는 데 그것은 바로 우리를 저주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 두강도의 선택

오늘 본문은 바로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게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27절입니다. 27.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우편과 좌편에 있는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리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욕했습니다. 29절, 30절 입니다. 2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지나가는 자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이란 표현속에는 예수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고 예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 즉 구경꾼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 군중들입니다. 유대 군중들이 먼저 욕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유대 군중들의 모습을 보면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희롱합니다. 31절과 32절 전반부입니다. 3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그당시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유대군중들의 뒤를 이어 희롱하고 조롱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못박힌 두 강도도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32절 후반부입니다. 32.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좌편우편에 있던 강도들입니다. 그들도 예수를 욕했습니다. 그러다가 두 강도중의 한 강도는 나중에 마음을 바꾸어서 다른쪽에 있던 한 강도를 꾸짖습니다. 그리고난후 예수님에게 자신의 영혼을 부탁합니다. 누가복음 23장 41절 42절입니다.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에 나를 기억하소서하니’

한 강도가 인생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런 강도에게 예수님께서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누가복음 23장 43절입니다.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강도는 자기의 인생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고백함으로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강도는 우편 강도입니까? 아니면 예수님 좌편에 있는 강도입니까? 성경은 대답해주지 않아서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 우편의 강도가 구원받았다“ 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은 양을 신자로 염소는 불신자 로 표현합니다. 알곡은 신자로 쭉정이는 불신자로, 좋은 물고기는 신자로 나쁜 물고기는 불신자로 표현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성경에서 오른손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편은 구원받는 자리이고 왼편은 심판받는 자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의해서 구원받은 강도를 예수님의 오른편에 서있게 하셨을 것이다라고 우리는 추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그 강도가 실제로 예수님의 오른편에 있었는가 아니면 왼편에 있었는가 하는 질문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고백을 할 때 어떠한 강도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구원을 약속해주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두강도를 그당시 유대나라를 로마정부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 죽게 된 독립투사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누가 복음 23장 41절을 다시 보시면 한강도가 다른쪽에 있는 강도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우리는 우리가 행한일에 맞게 이렇게 처벌 받는 것이다 라고 한강도가 다른 강도에게 말을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맞게 벌 받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독립 운동해서 독립투사로서의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면 이런식으로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한짓에 맞게 죽게 되었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일반 강도일 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면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주변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욕을 먹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보다 더 비참하고 더심한 욕을 받으신 분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어떠한 악한 죄를 짓고 살아왔다 할지라도 이제 죽음을 몇시간 앞두고 있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나에게 욕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손해를 본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제 몇시간후면 죽게 되는 모습을 본다면 그냥 불쌍한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아니 불쌍한 마음은 가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적어도 욕하고 조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기 몇시간 전까지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욕과 조롱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고통속에서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 받으며 운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이 십자가의 길은 바로 강도와 같은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결과이었던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 예수님의 선택

오늘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원래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된 사람은 바라바 이었다. 그런데 바라바가 십자가 처형에서 자유롭게 되었고 그대신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된 것은 유대 군중들의 선택과 빌라도의 결정 때문이었다.” 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았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이 아무런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놓아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명절 때 한사람의 죄수를 놓아주는 전례를 사용해서 예수님을 놓아줄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군중들은 예수님대신에 바라바를 놓아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원치 않았지만 유대군중들이 폭동을 일으킬까봐 할수없이 예수님 대신에 바라바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에는 유대군중들이 바라바를 놓아주기를 원했고 빌라도 총독이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에 바라바가 자유를 얻게 된 것으로 보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라바가 십자가에서 자유함을 얻게 된 배경에는 예수님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0절을 보시면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0.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한도 있는줄 알지 못하느냐.” 지금 빌라도는 자기앞에 끌려온 이 예수를 놓아 주고 싶은 속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어떤말이라도 해서 네가 네 자신을 변호해봐라. 내가 재판 최종 결정권자가 아니냐. 말만 잘하면 내가 너를 놓아줄수 있다. 내가 너를 자유하게 할수도 있다” 이런 속마음으로 말한 것입니다. 이런 빌라도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1절입니다.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무슨 말입니까? “빌라도 네가 나를 죽이거나 나를 살리는 그 결정을 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셨다면 아무도 내 생명에 손을 댈수가 없다” 라는 의미입니다. 빌라도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7, 18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어쩔수 없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것은 예수님의 선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얼마든지 변호하실수 있었습니다. 아니면 초자연적인 능력과 천사들을 동원해서라도 얼마든지 십자가를 피하실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예수님의 선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길을 걸어가기로 작정하시고 이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결정은 예수님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라바는 누구 때문에 산 것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살아난 것입니다. 십자가가 예수님 선택이라면 예수님 때문에 바라바는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바라바는 아무 선택이 없었습니다. 유대군중들과 대제사장들을 예수님께서 피하고 피하시다가 마지막에 궁지에 몰려서 어쩔수 없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을 스스로 선택하시고 그 길을 원하셨기 때문에 바라바는 그냥 죽음에서 살아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바라바는 우리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0장 28절입니다.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를 영어 성경을 찾아보시면 ”for many"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원어에는 ‘안티’라고 하는 전치사가 사용되어졌습니다. 이것은 ‘누구누구의 자리를 대신하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 성경책에서는 “in place of many"라는 문장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자리를 대신하여“라는 의미가 성경 말씀에 더 정확한 의미가 됩니다.

바라바가 죽어야 할 그 자리, 바라바가 고통을 당해야 할 그 자리, 바라바가 매달려야 할 그 십자가의 자리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대속물로 매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내가 죽어야 할 자리 내가 받아야 할 심판의 자리 내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멸망의 자리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내 자리를 예수님께서 대신해서 차지하신 자리입니다. 대신해서 심판 받으신 자리입니다. 대신해서 죽으신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바라바와 같은 나를 위해 주님께서 대신해서 취하신 자리입니다. in place of me. in place of you, in place of us, in place of many입니다.

이 바라바는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있는 강도와 같은 인물입니다. 누가복음 23장 19절입니다. 19.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바라바는 두강도와 같은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바라바와 같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중에는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으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가 그렇게 나뉘어 지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마지막날 온 인류는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으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바라바와 같은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대신하여 십자가 자리를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우편에 있는 강도와 같은 선택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야 할 것을 오늘 본문은 교훈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선택입니다. 예수님의 선택이 십자가의 죽음이셨다면 우리의 선택은 그분을 나의 구세주 나의 주인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야사의 기록에 의하면 바라바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멀리 숨어서 지켜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 예수님. 당신은 나 때문에 죽으셨군요” 그리고 이 바라바는 훗날에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 바라바는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평생동안 이렇게 고백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분은 나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러한 바라바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은 선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성도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는 길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바라바는 선택할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길을 선택하셨기에 바라바는 죽음에서 살아나게 된 것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심판하실 때 온인류는 우편과 좌편으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선택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선택으로 바라바처럼 우리에게도 살길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결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편의 강도처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용서함을 받아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되는 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살아가십시다, 그래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아갈수 있게 된 사실에 감사하며 살아갈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