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44. 세 번째 오사
<마가복음 14장 32-50절>
32.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43.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4.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45.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46.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47.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48.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50.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고난주간 목요일에 일어난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신 후에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시작이죠. 본문 32절입니다. 32.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겟세마네 동산은 감람산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감람산은 예루살렘에서 약 1.3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마일로 따지면 0.8마일인데 1마일도 채 안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성안에 있는 어느 한집에서 유월절 만찬을 하셨으니까 이 겟세마네 동산까지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를 걸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감람산안에 있는 이 겟세마네 동산은 평상시에도 예수님께서 자주 기도하시던 곳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9절입니다. 39.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이날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는 날이었지만 예수님은 평상시처럼 기도하시러 겟세마네 동산에 가신 것입니다. 아마 이날이 예수님께서 공생애 활동을 하시는 동안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운 날이었을 것으로 제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고난도 힘들지만 그 고난을 미리 알고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은 더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이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러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기도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담대하게 그 길을 갈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시간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리신 기도의 내용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첫째로 자신의 소원에 대한 기도를 하십니다
36절 전반부입니다. 36.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기도를 한마디로 정의를 내린다면 대화라고 할수 있습니다. 대상이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과의 대화가 바로 기도라 할수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를 시작한 내용은 ‘아버지 이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이었습니다. 여기서 ‘이 잔’ 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고 싶어 했습니다. 왜요?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입니다.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에 있는 자라’ 십자가는 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렸으니까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잔‘ 을 마시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죽어갈 때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 육신의 고통보다는 사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는 다는 사실이 예수님에게는 너무나 끔찍하고 가장 큰 비극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는 다르게 두가지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은 인간적인 성품 즉 인성(人性)만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100% 사람인 동시에 100% 하나님이십니다.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배신을 이미 아시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자신을 부인 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군중들이 ‘바나바를 풀어주고 그대신 예수를 못 박으라’ 라고 외치게 될 것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성품을 지니셨습니다. 인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질 때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는 조롱과 수치와 부끄러움과 고통은 피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그 수치와 부끄러움과 고통보다도 예수님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입니다. 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언제나 하나이셨습니다.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기 이전부터 함께 하셨소 우주만물을 창조하실때도 하나가 되어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난후에 보기에 너무나 좋아 함께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언제나 함께 일하시고 함께 기뻐하시며 늘 하나이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입니다. 1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땅에서 공생애 활동을 하실 때 하나님은 늘 함께 하나가 되셔서 일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하나가 된 아버지와 분리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군중들과 제자들의 배신과 저주는 감당할수 있습니다. 침뱉음을 당하고 빰을 맞고 채찍을 맞으며 그리고 로마군인이 가진 길고 날카로운 창이 자신의 옆구리 살점을 파고 들어오는 아픔과 고통은 감당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저주하며 고개를 돌리는 일은 감당할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시간에, 가장 위로가 필요한 시간에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너는 내 아들이 아니야. 너는 저주를 받아야 할 죄인이야’ 라고 분노하시며 고개를 돌리시는 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저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선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잔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도 하지만 우리 인간을 대표할 자격이 있으신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대표해서 온 인류가 지은 죄값을 생명으로 지불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가장 먼저 하십니다.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도 당연히 있습니다. 내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내 자신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가 되느냐 일치가 되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달라는 기도를 했지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다르다면 자신의 소원을 포기 해야 할 것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드린 기도와는 다른 내용의 기도를 하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두번째로 나의 뜻을 포기하는 기도를 하십니다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달라는 기도를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후에 보다 더 성숙한 기도를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기도입니다. 36절 후반부입니다. 36.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내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달라는 기도를 우리는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의 소원이나 바램이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것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더 가치가 있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기도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뜻을 바꾸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매달리고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뜻을 바꾸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지닌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 케고르가 이런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지 않고 기도하는 자를 바꾼다’ 참다운 기도를 하게 되면 내자신이 먼저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얍복강 나루터에서 야곱은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한 결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그 새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스라엘 나라는 바로 야곱이 이날 밤 얍복강 나루터에서 밤새 씨름하듯이 기도하고 난후에 얻게 된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의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창 32장 28절입니다. 28.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밤새도록 기도할 때 하나님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이 져주신 것이죠. 그리고 야곱이 하나님을 이기기 전에 먼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부서진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앞에 나오는 창세기 32장 25절입니다. 25.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이 허벅지 관절이 그사람과 씨름할때에 어긋났더라. 그렇습니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먼저 깨어진 것입니다. 허벅지 관절은 사람이 힘을 쓸수 있는 중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야곱이 가장 의지하는 부분을 하나님이 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야곱이 기도중에 먼저 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져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야곱이라 하지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이렇게 새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그다음날 형 에서를 만날 때 변화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가족들을 먼저 앞세우고 자신이 맨 뒤에 있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사람들보다 자기가 먼저 형 에서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엎드려서 지난날 자신의 행한 잘못에 대해 형 에서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 내가 먼저 깨어져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내 뜻과 소원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고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되어집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뜻안에서 내 뜻과 내 소원이 새롭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내 뜻과 내 소원 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세워나갈수 있게 해달라는 성숙한 기도를 할 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셋째로 하나님의 뜻에 결단하는 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드리신 마지막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결단하는 기도이었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받고 있을때 정말 힘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지금 이 고통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모를때입니다. 고통이 아무리 힘들고 크다 할지라도 ‘이 고통에는 견딜 만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면 이겨낼수 있습니다. 참고 견딜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힘든것은 내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냥 고통을 당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입니다. 고통중에 있으면서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계속 생겨 날 때 입니다. 그럴 때 그 고통은 비극이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고통중에 있을 때 그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이것이 무슨 뜻이 있는가?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가? 내가 제자인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붙잡혀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고 발가 벗겨진채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가운데서 죽어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실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래, 맞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때문에 나를 이땅에 보내신 거야 나는 십자가에 달려야 해. 그래야 내가 흘린 피로 모든 사람들이 지은 죄값을 지불해야 해. 그래서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해야 해. 나는 십자가에서 부끄러움과 고통가운데서 죽지만 이후에 이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해.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영원히 살아갈수 있게 해야 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야. 그리고 나는 이십자가를 받아들여야만 해‘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결단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라 라고 말씀하시고는 제자들보다 약간 떨어진 곳에 가셔서 세 번 기도를 하십니다. 첫 번째 기도가 끝난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본문 37절, 38절입니다. 37.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잠을 자던 제자들을 깨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는 예수님은 다시 기도의 자리로 가서 두 번째 기도를 하십니다. 본문 39절입니다. 39.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그러니까 첫번째 드린 기도와 같은 내용의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원이시라고 한다면 당연히 제가 져야 하겠지요. 고통스럽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워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길을 가겠습니다. 나로 인해서 모든 인간들이 구원을 얻을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면 그 십자가를 제가 지겠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한참 기도를 하시다가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또 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맨 처음 기도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4절입니다. 34.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내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지금 내마음이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와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죽고 싶으실 만큼 고통스러워 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기도하고 돌아와보니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깨워서 다시 기도 요청을 하고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또 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시 깨우십니다. 40절입니다. 40.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잠을 자고 있던 자기들을 깨워서 기도 부탁을 하고 갔는데 그사이에 또 잠을 잤으니 제자들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기도 요청을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그런데 세 번째 기도를 하시고 난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십니다. 본문 41, 42절입니다. 41.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44.일어나라 함께 가자...’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왜 달라지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뜻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결단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제자들에게 기도요청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평강을 가지게 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면 괜히 옆에 있는 사람을 달달 볶고 귀찮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기도를 마치신후에 십자가를 하나님의 뜻으로 완전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평안한 마음으로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고 잠을 자고 있어도 ‘그래 그냥 자고 쉬어라’ 말씀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가롯유다가 자신을 배반하고 무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면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환경이 나를 위로하고 평안하게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의 뜻임을 완전히 믿고 받아들이게 되면 나의 마음은 평강해질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셨던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알거니와(We know that all things)' 모르면 안됩니다.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가지는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 두가지 사실을 알고 있는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게 되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고통,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능히 이겨낼수 있습니다. 내가 이해할수 없는 이 모든 것들이 합력하게 되어 선을 이루게 될것이다라고 믿을수가 있다면 우리는 내 가족과 내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어도 극복할수 있습니다. 터널안은 어둡지만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끝이 없다면 동굴이지 터널은 아닙니다. 성도들의 고통은 터널속을 지나가는 것이지 동굴속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장애물은 하나님의 뜻을 더욱 간절하게 알기 위한 도구 일 뿐입니다. 아프리카 선교를 했던 데이빗 리빙스톤이 아프리카 정글에서 여러번 죽음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리빙스턴은 선교를 포기하지 않고 담대하게 선교사 생활을 해왔습니다. 하루는 어느한 기자가 ’어떻게 그렇게 위험한 아프리카에서 담대하게 사역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리빙스턴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항상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역을 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사명을 다하기 전까지는 나는 죽지 않는다. 'I shall not die untill my work is done.'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까지는 나는 죽지 않는다 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리빙스턴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평강을 가지고 담대하게 생활해 나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과 아픔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수가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일어나 평강을 가질수가 있을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다 할지라도 내 아픔과 내 고통과 내 고민을 알아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그들을 그냥 두게 할수 있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여전히 불안하고 위기라 할지라도 나는 평강을 가질수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길을 가겠다고 결단을 할 때 그누구도 이 평강을 빼앗아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까? 히브리서 9장 22절입니다. 22. ...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흘림이 없이는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실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했습니까? 에베소서 2장 14절입니다.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라’ 분열하고 싸우며 살아가는 세상에 화평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과 불화하고 있는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을 화목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 인간을 화평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까?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이런 저런 고통과 아픔의 터널속을 지나갈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소원보다는 하나님의 소원을 바라보셨습니다. 자신의 소원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소원이 더욱 가치가 있고 더욱 우선적이 되어야 함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소원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도 쉽지 않으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쉽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는 더욱더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통중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길만이 고통중에 있을 때 승리할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주는 고난 주간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 금요일은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매달리신 성 금요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의 소원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상징입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는 상징이 바로 십자가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지라고 하신 십자가의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받아들이십시다. 그래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주변의 환경이 좋지 않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주시는 평강의 마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