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마가복음51. 참제자 아리마대 요셉

Author
kgmcc
Date
2022-06-01 02:59
Views
170
본문 : 마가복음 5장 42-47절

날짜 : 2022년 6월 1일

 

<마가복음 15장 42-47절>

42.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45.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니까 6시간 동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던 것이죠. 우리는 해가 뜨는 아침이 되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해가 지는 저녁부터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금요일 저녁부터 다음날 토요일 저녁까지가 안식일 인것입니다. 그당시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죽은 시체는 그날 당일에 장사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신명기 21장 22절 23절입니다. 22.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그날에 장사하여’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운명하시게 되자 안식일이 되기 전에 시체를 치워서 장사지내기를 원했습니다. 만일 시체가 안식일 날에도 매달려 있으면 안식일을 더럽히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동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체를 밤새도록 그냥 매달아 놓지 말고 이날 치워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을 합니다. 이 장면이 요한복음 19장 31절에 나옵니다. 31.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그래서 빌라도가 로마 군인들에게 ‘세명의 죄수가 죽은 것을 확인하라. 그리고 죽었다면 그 시체를 치워라‘ 라고 명령합니다. 요한복음 19장 32-34절입니다. 32.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여기서 로마군인들이 십자가에 달린 두명의 죄수의 다리를 꺽었습니다. 다리를 꺽었다는 의미는 큰 해머 같은 것으로 죄수의 무릎을 때려 부러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손에 박은 못과 발목에 박은 못입니다. 특별히 발목에 박은 못이 죄수의 위쪽 부분을 지탱해주기 때문에 어떤 죄수는 이 발목에 박은 못에 의지해서 숨을 쉬면서 몇칠동안 생명을 유지할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릎을 해머로 때려서 부러뜨리면 그때부터 이 죄수는 발목에 박힌 못에 의지할 수가 없게 됩니다. 발목이 더 이상 지탱해주지 않게 때문에 사람 몸안에 있는 폐와 위장 같은 내장 기관이 모두 아래로 몰려서 숨을 쉴수가 없게 되고 피 순환이 되지 않아서 그때까지 살아있다고 할지라도 금방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보니 이미 운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해머로 무릎을 때리는 대신에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그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심장이 멎어서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으면 피와 물이 분리 되어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장면을 그당시 제자들중에서 유일하게 끝까지 십자가 현장을 지키고 있었던 제자 요한이 보고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5절입니다. 35.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느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당시에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사람들 사이에 여러 가지 헛소문이 돌았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소문은 예수님의 기절설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시고 기절했는데 무덤속에 들어가신후에 정신을 차리고 무덤에서 다시 나왔다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헛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 제자 요한은 자기가 예수님이 죽으심을 확실히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라고 하는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우연히 일어난 헤프닝이 아니라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고전 15장 3절입니다. 3.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예언되어진 말씀하신대로 우리 죄값을 대신 치루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운명 하신후에 한사람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누구입니까?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면이죠.

 

◉ 아리마대 요셉

아리마대 요셉에서 요셉이 이름이고 아리마대는 지명이름입니다. 아리마대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32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마을 이름입니다. 그당시 요셉이라는 이름은 마리아 이름처럼 흔하고 많았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처럼 요셉도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부름으로서 다른 요셉과 구별했던 것입니다. 이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7절입니다.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 그러니까 요셉은 부자이었습니다. 이어서 그 뒤를 보시면 ‘그도 예수의 제자라’ 이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이었습니다. ‘부자 요셉’ 그리고 ‘예수의 제자; 라는 단어를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43절 말씀입니다. “43.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이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이 표현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23장 50절과 5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50.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여기에서는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고 하는 단어를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지금까지 아리마대 요셉에 대하여 소개하는 성경 구절을 모두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리마대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사람은 부자입니다. 그리고 이사람은 존경받는 공회 의원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의원출신이죠. 그리고 이사람은 도덕적으로 선하고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똑같이 주장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도 예수님의 제자라“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보시면 “그도 예수의 제자라“ 또 마가복음을 보시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제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누가 복음을 보시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정리해보면 아리마대 요셉은 부자이었고 존경받는 공회 의원이었으며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예수님의 제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살아계실때는 성경 어느곳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제자니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있었습니다. 제자니까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을 알고 있는 지식이 자신의 삶으로 나타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고 내가 예수님을 알고 있는것만큼 나의 삶에서 믿는 자의 모습을 나타내 보일수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이 아리마대 요셉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후에 결단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이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됩니다. 이 아리마대 요셉이 내린 결단의 내용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결단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 총독에게 나타나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성경은 이 요셉을 보고 제자라고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고 가지고 있는 믿음이 나의 삶에 나타나야 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결단하고 행동할수 있어야 참 제자로 인정받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아리마대 요셉이 결단하고 행동한 내용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도 아리마대 요셉처럼 결단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참된 제자로 인정받고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내린 결단 내용,

첫째는 성령의 감동에 순종한 결단

본문 43절입니다. 43.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후에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를 찾아가서 당돌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말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후에 오늘 본문에 갑자기 등장하고 있습니다. 왜 이제 등장합니까? 요한복음 19장 38절 보시겠습니다.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그것을 숨기더니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숨기며 살아왔습니다. 왜요?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고 난후에 이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가 가진 믿음을 드러내 보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왜요? 성령이 자기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그 십자가 주변에 많은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바리새인들 중에 아리마대 요셉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과 행동하신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르오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편의 강도가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요청할 때 ‘그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약속해주시던 모습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여 내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기시는 마지막 모습도 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믿지 않았던 백부장이 감동을 받고 ‘이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라고 고백하는 모습도 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과 모습에 아리마대 요셉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앞에 나타나기로 결단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라 할수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종교 지도자로서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기록된 이사야 53장에 있는 내용에 대해서 너무 잘알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구절 이사야 53장 9절을 보시겠습니다. 9.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이 말씀을 원본에서 번역하게 되면 ‘그의 무덤은 악인들과 함께 있도록 계획되었지만 그의 죽음은 부자와 함께 했다’ 가 보다 정확한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까 구원자로 오신 메시야가 죄인의 모습으로 심판받고 죽게 되고 죄인들이 들어갈 무덤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의 시체는 부자의 무덤에 들어갔다는 예언의 말씀을 아리마대 요셉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요셉은 자신이 죽게 되면 들어가게 될 무덤을 이미 준비해놓았던 사람입니다. 그당시 부자들은 자신이 죽게 되면 들어가게 될 무덤을 미리 사놓고 준비해놓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아리마대 요셉은 ‘내가 바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이 말씀을 이루어야 하는 사람이구나’ 라고 하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자신은 공회 의원 신분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빌라도 총독을 만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자기가 나서야만 하나님이 예언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겠구나 라고 하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 순종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의 감동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이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이 그일을 해야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나서야만 하나님이 하신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리마대 요셉은 결단하고 빌라도 앞에 나선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아리마대 요셉의 결단은 바로 성령의 감동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 아리마대 요셉은 결단하고 빌라도에게 나가 당돌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아리마대 요셉이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리마대 요셉이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누구를 통해서라도 당신 자신이 계획하신 일을 이루어내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성령 감동에 순종하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 아리마대 요셉은 성령의 감동하심에 순종하여 결단한 것입니다. 그와 대조적인 인물인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가롯유다는 사탄의 지배를 받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습니다. 만일 이 가룟유다가 배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예언은 누구를 통해서라도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어느쪽으로든지 하나님의 사용하심을 받는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다만 내가 양의 자격으로 쓰임을 받느냐 아니면 염소의 신분으로 쓰임을 받느냐의 차이가 있을뿐 입니다.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이 성령의 감동에 순종함으로 양의 자격으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으시길 축복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내린 결단 내용,

두 번째는 희생을 감수한 결단

요한복음 19장 38절입니다.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그동안 아리마대 요셉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자기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숨기면서 살아왔습니다. 왜요? 공회 의원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당시 공회 의원은 7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유대 사회에서 최고 대접을 받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리마대 요셉이 지금 빌라도앞에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하는 일은 그당시 지도자로서 받고 있었던 존경과 대접을 잃어버리게 될수도 있는 결단이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고 하는 결단입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을 때 이 아리마대 요셉이 결단을 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다. 만약에 그랬다면 이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 자신의 신분이 박탈 당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살아가는 보상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제자들도 다 도망갔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리마대 요셉의 결단은 어떠한 희생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감수하겠다는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인 결단을 할때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룰수 있는 마음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결단으로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이 희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결단으로 자신의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결단은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고 하는 아리마대 요셉의 결단으로 인해 하나님이 하신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신앙적인 결단은 반드시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희생을 감수하는 결단으로 인해 교회가 살아납니다. 이러한 결단으로 인해 가정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왜요? 살리고 일으켜 세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희생이 있고 손해가 있는 것처럼 보여도 이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진다면 결단을 하고 행동 해나가시길 축복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내린 결단 내용,

마지막 세 번째로 최선을 다한것

46절입니다. 46.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세마포로) 싸서 바위속에 판 무덤에 넣어두고 ...” 이 무덤에 대해서 마태복음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27장 60절입니다. “60. 바위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자기 새무덤에 넣어두고’ 그러니까 이 무덤은 아무도 사용한 일이 없는 새 무덤 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준비해놓은 새 무덤 입니다. 그당시 일반 평민들은 이미 사용했던 무덤을 다시 잘 정리를 해서 같이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새무덤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나중에 자기가 죽으면 들어가기 위해서 준비해놓은 그 무덤을 예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최고의 것을 드린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언제나 첫 번째 것 새것, 흠이 없는 것으로 드려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하는 것은 최선의 것, 최고의 것을 드리는 일에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행동을 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옛날 저의 어머님이 헌금을 하실때는 그냥 드리지 않고 언제나 새 돈을 골라서 드렸습니다. 새 돈이 없을때는 다리미로 구겨진 돈을 다려서 헌금으로 드렸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저는 그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돈이 돈이지 뭐 저렇게 까지 하셔야 하나‘ 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께선 그당시 ’어머님의 그돈이 아니라 어머님이 가지고 계셨던 그 마음을 기쁘게 받으셨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돈이 없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받으시길 원하시는 것은 그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활동을 하실때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돈이 필요해서입니까?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마음은 물질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말씀을 하신후 그 다음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입니다. 21.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받기를 원하시는데 우리의 마음은 물질이 가는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물질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나라에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여기시는 것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길때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경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하는 의미는 세상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것과는 다릅니다. 세상적인 의미에서 최선을 다한 것은 내가 무엇을 이루고, 내가 이름을 내기 위해서 열심과 정성을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의미에서 최선은 내가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에 있습니다. 이 아리마대 요셉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 이제 정리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결단은 성령의 감동에 순종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고 하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단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 살아갈 때 제자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넘어서 결단하고 행동을 하며 살아갈 때 그때 비로소 성경은 제자라고 부릅니다. 바라옵기는 아리마대 요셉처럼 어떠한 희생이 온다 할지라도 결단하고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참 제자로 인정받고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