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Author
kgmcc
Date
2020-06-06 17:07
Views
93
본문 : 사도행전 9장 31-35절

날짜 : 2020년 6월 7일

 

<행 9장 31-35절>

31.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32.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34.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31절입니다. 31.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 말씀속에 나오는 단어는 모두가 다 중요합니다.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 성령의 위로, 수가 더 많아지더라‘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평안해야 모든 일에 든든히 서갈수 있고 그리고 주를 경외하고 성령의 역사로 인해 성도수가 더 많아지기 때문에 여기에 언급된 모든 단어가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문장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그리하여 라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하여 라는 단어는 앞에 나온 내용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그리하여 라는 이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뒤에 나오는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많아지게 되는‘ 이유를 알수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하여' 를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자, 그렇다면 그리하여 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그리하여

첫째로 예루살렘의 핍박과 성도들의 흩어짐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게 되면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화가나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일을 시작으로 해서 핍박이 본격화 되어지고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흩어진 성도들이 도착한 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빌립집사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시작되자 빌립집사는 사마리아지역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사마리아 지역에서 빌립집사가 예수님을 전할때 중풍병자가 낫게 되고. 귀신 들린자가 온전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이후 이 빌립 집사는 성령에 이끌려 유대 광야에서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예수를 전하게 되는데 이로인해 복음이 아프리카까지 건너가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또 다른 성도들은 소아시아 안디옥까지 가서 교회를 세웁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믿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리하여 라는 말은 예루살렘의 핍박과 성도의 흩어짐으로 인하여 교회가 부흥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그리하여‘ 는 사울의 회심과 복음전파를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8장 이후부터 등장하는 사울은 기독교인들을 붙잡고 옥에 가두는데 가장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그런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붙잡기 위해 길을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하게 됩니다. 그이후 사울은 바울로 개명하고  평생동안  예수님을 전하며 살아가는 복음 전도자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리하여‘ 라는 말은 회심한 사울의 전도여행으로 말미암아 소아시아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지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로 그리하여는 사울과 예루살렘의 사도들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이방인의 영혼구원을 위해 부름을 받은 사울과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나바의 중재를 통해서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협력하여 복음을 담대하게 전합니다. 그러니까 ’그리하여’ 는 사도행전 8장 과 9장에 일어난 모든 사건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일들이 합해져서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있어서 성도수가 더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환난과 핍박을 받는 중이었지만 교회는 평안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든든히 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2절부터는 베드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32절입니다. ‘32.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사실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이 베드로의 모습은 예전의 베드로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을 향한 핍박이 시작되어 많은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나서 순회전도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변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베드로가 변하였을까요? 베드로가 변하게 된 동기를 우리는 두가지 사건에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  베드로가 변하게 된 동기

첫번째는 회심한 사울과의 만남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8절을 보게 되면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회심한 사울과 15일 동안 만났던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8절입니다. ‘18.그 후(사울이 회심한 사건이후를 의미) 삼 년 만에 내가(사울)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여기서 '게바' 는 '베드로' 를 말하죠. 그러니까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난 이후에 아라비아에 머물렀다가 3년 만에 예루살렘에 오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15일을 머무는 동안 사울은 베드로를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이때 베드로는 회심한 사울을 만나서 무슨 말을 들었겠습니까? 다른 내용을 잘 모르겠지만 두가지 내용은 우리가 쉽게 추측해볼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사울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하게 되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다시말해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건을 자세히 들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사울을 부르신 목적에 대해서 들었을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사울을 부르셨다고 하는 사실을 베드로는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게 된것과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시기 위한 주님의 계획이 있다고 하는 이 두가지 사실을 베드로는 사울과의 만남을 통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15일동안 사울과의 만남을 통해 베드로는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유대인에게만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변하게 된 두번째 동기는 사마리아 지역에서 경험 하게 된 사건 때문입니다

앞서 잠시 언급되었지만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해 빌립집사가 사마리아 지역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빌립 집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데 그때 귀신 들린자가 떠나가고 중풍병자가 낫게 되는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소문이 예루살렘에까지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진상조사 차원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성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거기서 안수를 하였는데 그때 사마리안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행 8장 17절입니다. 17.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본 베드로는 충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들의 피가 섞어 있다고 해서 사람 취급을 하지 않고 개취급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베드로의 눈엔 개들이 성령충만 받는것을 보는것 과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런 사건을 경험한 베드로는 사마리아성에서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고 사마리아 성 주변 여러 마을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8장 25절입니다. 25.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베드로의 원래 계획은 사마리아 성에서 일어난일에 대한 사실 여부만 확인하고 돌아오는 것이었지만 곧바로 돌아오지 않고 사마리아 성 주변에 있는 여러 마을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예전에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는데 이제는 자기 자신이 직접 사방으로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증인이 되리라 그러니까 성령충만 받은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되어있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사도들은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성령을 받았지만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베드로가 사방을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성령의 감동을 받게 된 사람에게 일어나게 되는 공통된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충만 받으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영혼구원을 위해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택하신 목적이 바로 영혼 구원에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성령충만을 통해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예수 믿고 부자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까? 잘 먹고 잘살도록 하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혼자 예수 믿고 천국에 가도록 하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주변에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함에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즈니스를 허락하시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시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저 땅끝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 주변 사방으로 두루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찾아갈때 하나님께서는 예비해놓으신 사람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는 복음을 들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룻다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하나님이 준비한 영혼을 만난 것입니다. 그사람이 바로 애니아 입니다. 33절입니다. 33.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이 애니아는 중풍병에 걸려서 8년 동안 침상에 누워있었습니다. 그가 부자이었는지 가난한 사람이었는지 성경은 말씀하지 않아서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애니아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어떤 성품의 소유자인지도 성경은 말씀하지 않아서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아마 이 애니아는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 1, 2년도 아닌 8년 동안 반신 불구도 아닌 전신불구가 되어서 침상에 누워있었습니다. 그가 부자이었다면 돈 때문이라도 돌봐주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부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오랜 병에 효자가 없다는 속담이 있듯이 가족들도 8년동안 누워있는 이 애니아를 부담스러워 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애니아도 내가 이렇게 살아서 가족들에게 짐이 되기 보다는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넋두리를 빈말이라 할지라도 여러번 했을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애니아는 모든 사람에게 짐이 되고 부담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불쌍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인생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룻다에서 이런 애니아를 만났습니다.

 

◎  베드로의 믿음 선포와 애니아의 순종

1. 베드로의 믿음 선포

그런데 베드로는 이 침상에 누워있는 애니아를 보는 순간에 이렇게 말합니다. 34절입니다. ‘34.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성경 본문을 보면 애니아가 사도 베드로를 보고 ‘베드로 선생님 저에게 안수를 해주셔서 낫게 해주세요’ 라고 먼저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먼저 말했습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자리를 정돈하라’ 자 이런 명령은 아무나 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치료자가 되신다 라고 하는 믿음이 꽉 차있어야 가능한 말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믿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날 큰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은 못해도 나는 할수 있어’ 라는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베드로처럼 나자신은 아무런 힘과 능력이 없다고 하는 믿음이 바로 성경적인 믿음입니다. 사실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마치 장갑과 같습니다. 장갑이 무엇을 할수 있겠습니까? 장갑안에 사람의 손이 들어가야 이 장갑이 움직여지고 무엇인가 할수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능력으로만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나는 할수 없지만 예수님은 할수있다’ 라고 하는 믿음이 베드로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렇게 애니아에게 명령할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감동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동감화 하심이 없었다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라’ 라고 명령할수 없습니다. 환상을 통해서든지, 음성을 통해서든지, 마음의 감동을 통해서든지간, 어떤 방법으로서라도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감동이 왔을 때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이 병자가 낫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루속히 이 병자를 낫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이렇게 간구하는 정도에서 끝나버릴때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담대히 명령과 선포할때 일어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성령께서 이런 감동과 감화를 주어도 베드로처럼 담대히 선포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초기 교회시대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며 전도하신 분으로 유명하신 최권능 목사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한번은 이 최권능 목사님이 시장을 걷어가고 있는데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그 앉은뱅이를 본 순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앞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장면이 떠오르면서 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싶다는 마음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라’ 라고 선포했는데 저사람이 일어나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망신당하게 될까?‘ 그래서 그 앉은뱅이를 안고 골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안보는 곳에서 그 앉은뱅이를 내려놓고 외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내가 명하노니 일어나라’ 역사가 일어났겠습니까? 안일어났습니다. 왜요? 이미 최권능 목사님 마음속에 ‘만일 이사람이 일어나지 않으면 내가 개 망신당할수 있다’ 고 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일어날수도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선포를 하는데 어떻게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이것을 보면 우리에겐 단순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을 봅니다. 베드로는 단세포적인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참 단순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물위를 걷는 최초의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없는 일입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풍랑을 만나서 두려워하고 있을때 물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게 되면 무엇이라고 간구합니까? ‘예수님, 빨리 오셔서 저희들을 이 물속에 빠지지 않게 하여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간구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조금전까지만 해도 물속에 빠져들어가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가 물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게 되니까 자기를 구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하소서’ 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아니면 생각할수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물위를 걸을수 있습니까? 지금 물속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는 것만도 감사해야 할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때 예수님께서는 ‘오라’ 라고 대답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황당한 요청에 황당한 응답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황당하게도 배에서 바다물위로 뛰어들고 물위를 걷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좀 길게 설명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을 받고 말씀을 받았음에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불신앙이라는 것을 얘기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성령의 감동하심도 없고 주님의 말씀도 없는데 자기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행동으로 옮긴다면 그것도 또한 불신앙이라 할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오라' 고 말하지 않으셨는데도 베드로가 물위로 뛰어들었다면 베드로는 물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서 수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감동을 받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도 불신앙이고,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역시 불신앙이라 할수 있습니다.

 

2. 애니아의 순종

애니아의 중풍병이 치료함을 받는 사건에는 이 베드로의 믿음의 선포와 애니아의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34절입니다. ’34.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곧 일어나니’ 애니아가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이미 낫게하셨다 그러니까 일어나라’ 이렇게 과거 시제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시제로 말했다면 이 애니아에게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이미 고쳐주셨으니까 그냥 일어나면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미래시제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너를 낫게 하셨다' 나 ’너를 낫게 하실 것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과거나 미래의 말이 아니라 현재시제로 말한 것입니다. ‘낫게 하시니...’ ‘너를 낫게 하신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현재입니다. 지금 나은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요단강이 갈라지고 난후에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아닙니다. 요단강이 갈라지고 난 이후라면 누구나 다 건널수 있습니다. 믿음이 필요없습니다. 강물이 흐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음으로 요단강에 발을 잠그고 걸어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때 요단강이 갈라진 것입니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거울속에 비친 나는 내가 웃기 전에는 절대 웃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웃어야만 거울속의 나도 웃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믿음으로 말을 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애니아가 일어날려고 하니까 병이 나은 것입니다. 애니아는 자기가 일어날려고 하는데 그일은 굉장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문득 문득 생겼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셨다’ 라고 말씀하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낫게 하시니’ '낫게하신다' 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바란다면 내가 먼저 믿음으로 말을 하고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3.중요한 교훈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 ‘예수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라’ 라고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그다음은요 네자리를 정돈하라 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일어나고 닛는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내 삶의 자리를 정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8년을 침상에서 지냈다면 그 자리가 얼마나 더럽혀졌겠습니까? 그 자리가 얼마나 보기 흉하겠습니까? 한두달만 침대를 정리하지 않아도 엉망일텐데 8년동안 그냥 누워있었으니 그 자리는 역겨운 냄새와 함께 더러워져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정말 원하는 것은 삶의 자리가 정돈되어지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치유가 아닙니다. 치유가 목적이라면 그 치유되어서 건강해진 몸을 가지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이 없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세상을 창조하셨을때는 너무나 아름답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함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세상은 헝클어지고 더럽혀지고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인간은 두려움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인간은 점점 잔인해져갔고 살인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성적인 문란도 심해졌습니다. 그런데 2천년전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회복하셨습니다. ‘정돈’ 이라는 의미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귀신 들린자가 자유함을 얻고 병든자가 치유받는 것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치유받고 자유롭게 되었지만 그 자유함을 가지고 죄를 짓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주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신 본래의 목적대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정돈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하시니’ 그래요. 이시간 애니아 대신에 저와 여러분이름을 넣어보십시다. ‘대문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라’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닙니다. 현재 입니다. 그럼으로 지금 저와 여러분은 믿음을 가지고 힝이 들어도 일어나야 합니다. 한 시간이 되던, 하루가 되던, 한달이 되던 일어날려고 해야 합니다. 바라옵기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믿음으로 일어날 수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남은 생애동안 나에게 자유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헝클어지고 무너져 버린 자리를 정돈하며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