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Author
kgmcc
Date
2020-06-13 17:47
Views
533
본문 : 사도행전 9장 36-43절

날짜 : 2020년 6월 14일


 

<사도행전 936-43>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지난주에는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나 전도여행을 하던 중에 룻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예루살렘과 룻다의 거리는 약 40 Km(25마일) 정도 인데 베드로는 이 룻다에서 중풍병에 걸려 8년동안 침상에서 누워있던 애니아를 만납니다. 그때 베드로가 애니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행 9장 34절입니다. '34. ...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라’ ‘너를 낫게 하셨다’ 가 아닙니다. 과거가 아닙니다. 그리고 ‘너를 낫게 하실 것이다’ 라는 미래도 아닙니다. ‘너를 낫게 하시니’ 입니다. 현재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일어날려고 할 때 낫게 되어 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일어날려고 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디. 요한복음 11장 25, 26절에 예수님께서 이런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그런데 그 다음말이 가장 중요합니다. 무엇인가요?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애니아도 나을려면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애니아가 말씀에 순종해서 포기하지 않고 일어날려고 하니까 병이 나은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게 놓인 환경은 힘들고 어렵지만 저와 여러분이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일어날려고 할 때 하나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지난주에는 룻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저와 여러분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욥바라는 마을에서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36절입니다.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성경을 보면 이름을 두 개 가진 사람들이 종종 나오는데 본문에서도 ’다비다‘’도르가‘ 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여인이 나옵니다. ’다비다‘ 라는 이름은 그당시 서민들이 사용하였던 아람어어로 불리는 이름이고, ’도르가‘ 는 헬라어로 불리는 이름입니다. 아시다시피 베드로도 두 개의 이름을 가졌는데, '베드로'는 헬라어로 불리는 이름이고, 아람어 이름은 ’게바’ 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마을 사람들은 베드로 보다는 게바라는 이름을 더많이 불렀을 것입니다. 다비다 는 ‘암사슴’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암사슴 처럼 다비다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 다비다는 주님의 제자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라가 있으니’ 그러니까 이 다비다는 주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 다비다는 어떤 사람입니까?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던 사람’ 이었습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9절에 나오는 장면을 보면 다비다가 살아생전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39절 하반부입니다. 39. ...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다비다가 죽고 난 이후에 많은 과부들이 다비다가 살아생전에 자기들을 위해 만들어준 속옷과 겉옷을 가져와 베드로에게 울면서 보여줍니니다. 그만큼 다비다는 살아 생전에 많은 선행과 구제를 해온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많은 과부들에게 사랑을 베푼 다비다를 보면서 신학자들은 다비다가 일찍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아가던 과부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은 것도 과부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또 하나의 요인도 됩니다.

이렇게 다비다는 자기와 같은 상처와 아픔이 있는 과부들에게 자기가 친히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선행과 구제를 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삶을 살던 다비다가 죽었습니다. 37절입니다. 37.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죽어도 그냥 수명이 다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병들어 죽었습니다. 이렇게 선하고 아름답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병에도 안걸리고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면 좋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을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저 인간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건강하고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속에 있다고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어쨌든 다비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를 다락방에 누이었습니다. 39절입니다. ’39.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들의 인도를 받고 다비다가 누워있는 다락방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 다락방에는 그 마을에 사는 많은 과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를 보자마자 다비다가 지어준 속옷과 겉옷을 내보이면서 다비다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합니다. 속옷과 겉옷을 내보이면서 애도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들이 얼마나 다비다의 죽음을 아쉬워하고 슬퍼하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사용되어진 겉옷과 속옷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겉옷과 속옷은 아닙니다. 여기서 겉옷은 밤에는 이불 대용으로 사용할수 있고 낮에는 둘둘 말아 걸치고 다니는 옷입니다. 그리고 속옷은 그 겉옷 안에 있는 옷을 의미합니다. 코트가 겉옷이라면 자켓이나 와이셔츠가 속옷이라 할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주변 사람이 그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평가를 내릴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사무엘이 죽었을 때 이스라엘의 온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 했습니다. 모세가 죽었을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일동안 애도했습니다. 그런데 악한자의 상징이었던 이세벨이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중에서 그 누구도 그에게 동정을 표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 여인의 시신을 거두거나 장사지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세벨의 시체는 개들에 의해 유린 되었습니다. 그래요 선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던 다비다도 죽었습니다. 악하게 살았던 이세벨도 죽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세상에 죽음처럼 평등한 것은 없습니다. 부자도 죽고 가난한 사람도 죽습니다. 유명한 사람도 죽고 무명한 사람도 죽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죽고 약한 사람도 죽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죽고 못배운 사람도 죽습니다.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여러가지 평가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사람은 잘 죽었어. 그사람은 돈과 자기밖에 모르고 살았던 인간이야 진작에 죽었어야 했는데...’ 이렇게 평가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그사람은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와서 도움을 주고 그리고 힘과 용기를 준 사람이야’ 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도 있을것입니다. 다비다는 이름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게 인생을 살다가 죽은 다비다가 살아났습니다. 40절 하반부입니다. ‘40.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 베드로는 굉장히 놀랬을 것입니다. 죽었던 다비다가 눈을 뜨고 자기를 볼 때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다비다가 눈만 떴을뿐 아니라 누운 자리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베드로가 물론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했지만 죽었던 다비다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는 굉장히 놀랬을 것입니다. 다비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죽었던 다비다가 살아났던 과정을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과정

1. 욥바 성도들의 믿음

38절입니다. 38.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다비다가 살아나게 된 것은 욥바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람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인 베드로가 룻다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8년 동안이나 중풍병에 걸려 침상에서 누워있던 애니아를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었습니다. 그래서 두사람을 보내서 베드로에게 와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런데 지금 다바다는 병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비다와 베드로는 서로 한번도 만나본적이 없었던 전혀 모르는 사이입니다. 다비다는 이미 죽었고,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구태여 베드로가 욥바에 올 필요는 없습니다. 욥바에서 온 사람이 아무리 와달라고 간청한다 할지라도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고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베드로는 거절할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욥바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를 찾아가서 요청을 한 사람들의 믿음이나 그 간청함을 듣고 욥바에 간 베드로의 믿음은 우리 인간의 생각을 넘어선 믿음이요 행동입니다.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과정

2. 하나님께 집중

40절 전반부입니다.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베드로가 왜 사람들을 다 내보냈을까요? 만일 사람들을 다 내 보내지 않고 다같이 합심해서 기도를 하면 훨씬 더 힘이 되고 유익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다같이 기도했는데도 다비다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혼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것입니다. 그런데 다 내보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배운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때도 그집에서 울며 불며 애통해 하는 사람들을 다 내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부모와 제자들만 그곳에 있게 했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릴때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그 어머니 품안에서 죽어있는 아들을 이리 달라고 해서 그 아들을 안고 자기가 묵고 있던 다락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누구도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침시간에 기도하는 것을 참 귀하게 여깁니다. 저녁에도 기도시간을 가지고 있지만 특별히 아침시간에 하나님께 더 집중할 수가 있기 때문에 아침 기도시간이 제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더 와닿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 더욱 집중하기 위해 모두를 내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 저와 여러분도 이런 집중하는 시간과 장소가 필요합니다.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과정

3. 무릎 꿇고 기도

40절 전반부 입니다. ‘40.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왜 무릎을 꿇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죽은자가 살아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만일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자주 생겼을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보다 죽으면 살아온 그 인생에 대한 심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비다가 죽은 이 상황에서 다시 살아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먼저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할지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에스겔 36장 36,37절입니다. ‘36.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37.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어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기도를 했고 그리고 죽은자를 살리시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다비다가 살아난 과정

4. 믿음의 선포

40절 중반입니다. ‘40.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성령의 감동과 확신을 받게 된 베드로는 ‘다비다야 일어나라‘ 라고 명령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 딸을 살리실때도 그 아이의 손을 잡으시면서 ’달리달굼‘ 이라고 말했습니다. ’달리달굼‘은 ’소녀야 일어나라‘ 는 뜻입니다. 무덤속에 있던 나사로를 살리실때도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야 나오라‘ 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이렇게 담대한 선포가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단순히 기도만 하지 않았습니다. 팔년동안 누워있었던 애니아를 일으킬때도 ’일어나라‘ 고 명령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죽은 다비다를 살릴때도 ’다비다야 일어나라‘ 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정말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지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감동과 감화를 주실 때는 기도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마시고 담대히 선포할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풍랑이 일 때는 풍랑 앞에서 명령하시길 바랍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풍랑은 잠잠케 될지어다‘ 어둠의 세력을 향하여 명령을 하시길 바랍니다. 한길로 왔던 귀신이 일곱길로 떠나가도록 명령을 하시길 바랍니다. 어둠의 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도록 명령을 하시길 바랍니다. 성령의 감동 감화가 있을 때 담대하게 명령하고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한걸음 더 나아가 명령하고 선포할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시체를 향하여 명령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았다는 것입니다. 시체를 향하여 명령을 하기 전에 먼저 무릎을 꿇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가 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리고 기도의 무릎을 꾾지도 않은채 자신을 과시하고자 명령을 하고 선포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아서입니다.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가운데 다비다가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명령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0절 하반부입니다. ’40.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명령할때에 다비다가 눈을 뜨고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죽은자가 살아난 것입니다. 떠났던 영혼이 다시 육체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다비다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 다비다를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합니다. 41절입니다. ’41.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할렐루야 그런데 사실 다비다가 살아난 것보다 더 큰 기적이 일어납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은 무엇입니까? 42절입니다. ’42.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육신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다비다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왜 죽은자가 살아나는 것이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욥바에서 죽은 다비다를 살리셨는지 그 이유를 알수있습니다. 왜 살리셨습니까? 이런 기적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 그 영혼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바에서 뿐만아니라 룻다에서도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절인 35절입니다. '35.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8년동안 침상에 누워만 있었던 애니아가 낫는 것을 보고 다 주께로 돌아왔흡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이런 기적을 일으키신 이유는 강퍅하고 완악한 사람들의 마음문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시간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돌이켜 보십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질병에서 나음을 받은 적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어려운 문제에서 해결함을 받은 적이 있을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죽음의 위기에서 건지심을 받은 경험이 있으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나에게 베푸셨다고 믿습니까? 왜 하나님이 죽음의 위기에서 이렇게 살아갈수 있도록 은총을 베푸셨다고 믿습니까? 왜 하나님이 나를 고쳐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셨다고 믿습니까? 그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그일을 통해서 우리의 가족을 구원하고 그일을 통해서 우리의 이웃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이 우리의 삶속에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인생에 기적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적중의 기적은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보다도 더 큰 기적은 나로 말미암아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일 때문에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기적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로 인해 상처를 받아 우리의 심령과 육신은 ’애니아‘ 와 ’다비다‘처럼 병들어 죽은 상태로 지나는 일을 겪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8년동안 침상에 누워있던 아니아를 일으키시고, 죽은 다비다를 살리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 인생에 기적을 행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경험한 이 기적으로 인하여 우리 주변에 믿지 않는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 결국은 죽습니다. 병들었다가 낫았다 해도 역시 결국 죽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병들었다가 낫게 되었다! 그것뿐이라면 죽음에서 살아난것이나, 질병에서 병 치유함 받은 것이 그자체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니 정말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살아있는 만큼 그사람은 더 많은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죽은자가 살아났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문제가 해결함 받았고 내가 고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기적으로 인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가장 귀한 기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 인생가운데 기적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죽은 다비다를 살리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기적을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기적을 위한 기적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한 더 큰 기적을 위해서입니다. 기적이 기적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기적으로 인하여 믿지 않는 영혼이 구원받아 영원히 살아나게 되는 일이 생길 때 그 기적은 진정한 기적입니다. 바라옵기는 저희들 인생에 기적이 일어나도록 간구하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뜻이 확실할 때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며 나아가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기적으로 인하여 그 기적을 보면서 믿지 않는 영혼들이 믿게 되는 더 큰 기적을 경험하는 축복을 누릴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