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Author
kgmcc
Date
2020-07-04 21:36
Views
88
본문 : 예레미야 1장 4-7절

날짜 : 2020년 7월 5일



 

<예레미야 14-7>

4.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나는 부족하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심리학자인 맥스웰 말츠 박사는 ‘이세상 사람들 중 95% 정도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살아간다’ 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부족함을 알고 살아가는 것은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요소라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다 부족한 사람’ 이라는 사실을 알 때 보다 쉽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들이기도하고 또 반대로 도움을 주면서 살아갈수 있기 때문입니다. 옆길로 새는 것 같지만 이 미국에 높은 자리에 있는 트럼프나 또 반대 입장인 언론사 처럼 자기 자신이 더 잘낫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면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분열되고 메말라 지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될것입니다. 그럼으로 ‘나는 부족하다’ 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사회가 보다 좀 더 잘 돌아가도록 하는 윤활유가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정도가 지나칠때에 있습니다. 늘 나는 부족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다면 이것은 바로 열등감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나 자신을 보게 되면 우리는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좀전에 맥스웰 말츠 박사의 얘기를 했지만 이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부족함을 느끼고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텔레비전과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자기 자신을 무의식중에 비교하기 때문' 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내 속에는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에 남과 비교하는 순간 우리는 열등감이 생길수밖에 없습니다.

자 오늘 본문은 어떻게 하면 우리 인간이 열등감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나 자신의 인생을 살수 있는 가를 보여줍니다. 4절입니다. '4.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하루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자,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1절입니다. '1.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 표현 앞에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베냐민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 힐기야의 아들 예례미야’ 웬지 설명이 좀 긴듯하죠?. 이렇게 길게 설명하고 있는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나돗의 제사장의 아들’ 이라는 말속에는 몰락하고 실패한 제사장의 후손이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역사적인 사건을 보면 아나돗은 솔로몬 왕때에 아비아달 제사장이 유배되어 살았던 땅입니다. 예레미야가 태어나기 약 400년 전 솔로몬이 다윗왕의 뒤를 이어서 왕의 후계자가 됩니다. 사실 순서로 따지면 다윗의 네 번째 아들인 아도니야가 왕의 후계자가 되어야 했지만 다윗은 솔로몬을 후계자로 정합니다. 그런데 그당시 여러 제사장들 중에 사독 제사장과 아비아달 제사장이 다윗왕의 가장 큰 총애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독 제사장은 다윗왕의 뜻을 따라 솔로몬을 지지했지만 아비아달 제사장은 다윗왕의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 편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아도니야가 아비아달 제사장과 마음을 같이해서 왕이 될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었는데, 이사실을 알게 된 다윗이 급히 솔로몬을 왕으로 세웁니다. 이로인해 아도니야의 반역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아비아달 제사장은 아나돗으로 추방당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나돗의 제사장들이라고 하면 반역행위를 하다가 추방을 당한 아비아달의 후손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왕에게 반역을 하다가 들켜서 아나돗으로 쫓겨난 제사장의 가문의 후손이 바로 예레미야이다 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때는 제사장의 가문이었지만 아나돗 지역으로 쫓겨난 이후 40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아무런 힘이 없는 초라한 집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별 볼일없는 집안에서 이름없는 젊은이로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리고 그후 이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게 됩니다. 아마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예레미야는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다가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은 ‘예레미야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으로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으로서 자신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으로서 지난날을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장 17절) 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고기를 낚는 어부의 삶에서 사람을 구원하는 제자의 삶을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장 1절)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갈대아 우르를 떠납니다, 그리고 믿음의 삶을 살다가 마침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일을 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도 오늘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버티고 버티다가 급기야는 자살을 해버리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사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아무리 인생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이겨내고 감당해나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넉넉하게 이겨내게 합니다. 바라옵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이런저런 어려움과 문제를 이겨내고 힘차고 당당하게 신앙생활을 해나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5절입니다. '5.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세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입니다. 예레미야가 이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아셨습니다. 여기서 ’알았다‘ 는 단어를 히브리 원어로 보면 ‘야다’ 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야다’ 라는 단어는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입다의 딸‘ 사건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사중의 한사람인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이렇게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되면 제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하는 자를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전쟁터에 나가서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무남독녀인 자기 딸이 가장 먼저 나와서 자기를 맞이합니다. 이로인해 입다는 자기 딸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바치게 되는데 딸이 아버지에게 두달 동안 자기에게 시간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딸은 자기친구들과 같이 두달을 지내고 난후에 돌아오는데 성경은 이장면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사기 11장 39절입니다. '39.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여기서 ‘알다’ 라는 의미로 ‘야다‘ 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입다의 딸이 사람을 보면 그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른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남자와 실제적인 경험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야다’ 는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통해 경험을 해서 너무나도 잘알고 있는 상태를 의미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이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너무나 잘알고 계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내자신을 아는 것보다도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대해 더 잘알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는 많은 경우 내자신을 잘 알지 못합니다. 저는 제 잠버릇을 잘 모릅니다. 가끔씩 저는 잠을 자는 중에 다리를 떤다고 해요. 그런데 저는 모릅니다. 눈감고 자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이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제 아내가 제게 얘기해주기 때문에 제가 알게 된 것입니다. 제 아내는 내가 나를 아는 것 보다 나를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나를 아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아십니다. ‘모태에서 짓기전에 나를 알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알고 계셨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 두번째는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입니다. 여기서 ’성별하였다’ 라는 의미는 ‘따로 분리해내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람들 중에서 따로 분리해서 부르십니다. 그 특별한 목적이 무엇인가요? 그다음에 나오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성별하신 목적은 선지자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세번째 하나님 말씀은 부르신 목적입니다. 부르셨으면 그 부르신 목적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자 예레미야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아십니다. 그리고 성별하시고 선지자로 세우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런데 이사실은 지금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시제는 항상 현재입니다. 이땅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현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알았고,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성별하시고, 태어나기도 전에 선지자로 세우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언제나 현재입니다. 항상 현재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아신바 되었고 성별되었으며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인생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시고 디자인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갑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생길을 가다가 왜 흔들리고 방황 하게 됩니까? 한마디로 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나를 아셨고 나를 성별하셨고 나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다’ 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내인생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고난은 있습니다.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소명을 받고 난 이후에 예레미야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날이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눈물의 선지자’ 라고 불리겠습니까?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유대나라에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유대나라는 하루속히 바벨론에 항복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벨론에 의해 이 나라 백성들이 수없이 죽고 예루살렘 성은 다 무너지고 이나라는 멸망당한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이러한 메세지를 선포하자 그당시 왕을 비롯한 귀족들과 거짓선지자들은 예레미야를 죽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수없이 맞고 구덩이에 던짐을 당하면서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묵묵하게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심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눈물이 있고 고난이 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힘들다고 피해버리거나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5절 말씀을 묵상해보면 순서가 중요한 것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선지자로 세웠다’ 라는 말씀이 먼저가 아닙니다. ‘내가 너를 알았다’ 는 내용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내가 너를 성별했다’ 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만이 어떤 환경속에서라도 부르심의 소명에 충실히 행할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사명자의 삶을 살아갈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가장 먼저 내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입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두가지로 자기 자신을 설명합니다. ‘첫째,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종이라면 주인이 있죠. 그러니까 내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입니다. 내 주인되신 예수님께서 나를 사도로 부르셨다. 그래서 나는 사도의 직분에 맞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가진 정체성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목사로 부르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집사로, 권사로, 반주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주인 되신 그 예수님께서 나를 남편으로, 나를 아내로 부르시고, 그분이 나를 아버지로, 엄마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나를 가게 주인으로 부르시고 가게 종업원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내 자신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어떤 어려움이 와도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갈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결정을 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자 소명을 받은 예레미야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할렐루야!‘ 를 외치고 감격합니까? 아니죠. 정반대입니다. 6절입니다. '6.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예레미야는 슬퍼했습니다. 왜요? 세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슬퍼한 이유

1. 아이라고 생각함

’나는 아이라...‘ 여기서 아이는 나이가 어리다는 의미보다는 아직 세상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그당시 예레미야의 나이를 18살에서 20살 정도로 봅니다. 그러니까 나이가 젊습니다. 그런데 그냥 메시지도 아닌 이 나라가 멸망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이제 20살이 되는 나이로 이런 메시지를 전하기엔 너무 벅차고 힘든 메시지입니다. 예를 들어 이제 20살이 된 목사가 큰 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해서 설교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마음문을 열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20살이 된 젊은 목사가 자녀문제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인생을 살다가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극복하는 말씀을 전하면 나이가 많으신 성도들은 ’저 젊은 목사 아직 인생을 잘 모르는군’ 이렇게 생각 할 것입니다. 제 나이가 55세가 될 때까지 주변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듣었던 소리가 ’임목사는 젊어서 인생을 잘 몰라‘ 였습니다. 55세가 넘어가면서부터 젊다는 소리를 잘 듣지 못하게 되더군요.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나는 아이입니다‘ 라고 고백한 그 마음을 우리는 알수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떼 우리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내가 경험이 많지 않고 낯설다는 이유로 실천하기를 주저하거나 거부하는 행동을 곧잘 취하게 됩니다.

 

예레미야가 슬퍼한 이유

2. 말을 잘하지 못함.

’말할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아마 예레미야도 저와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나 선지자는 하나님이 주신 내용을 말로 잘 전해야 하는데 자신은 말을 잘하지 못하는 아이니까 슬프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말의 능력보다는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면서 신앙생활해나가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슬퍼한 이유

3. 아나돗 출신의 제사장 후손임

가장 본질적인 문제라 할수 있는데 예레미야는 아나돗 출신의 제사장의 후손이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아나돗은 예루살렘 바로 북쪽에 위치한 아주 작고 가난한 동네입니다. 작고 가난한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 보다는 망해버린 제사장의 후손이다 라는 열등감을 예레미야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슬퍼했던 것입니다. 자기 나이도 어리고. 말도 잘 못하고 그리고 몰락한 제사장 출신의 후손이라는 열등감으로 인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도 기뻐하는 것 보다는 슬퍼했습니다. 그래요.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했던 사람들에게도 열등감이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모세에게도 열등감이 있었고 기드온 에게도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르실 때 모세는 ’나는 말을 잘 못합니다. 나는 감당하지 못합니다‘ 라는 고백을 합니다 기드온도 ’나는 가장 약한 집안의 가문입니다. 그 가운중에서는 나는 가장 작은자입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입다에게도 기생의 아들이라고 하는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도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도, 모세도, 기드온도, 입다도 자신들이 가진 열등감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사명을 감당하고 살았습니다. 어떻게 열등감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살았습니까? 열등감을 이겨낼려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내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사람은 열등감에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는 아이라 안됩니다. 말도 잘하지 못합니다’ 라고 대답하는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절입니다. '7.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아이라 말하지 말아라’ 무슨 의미가 있나요? 네가 네자신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나는 아이입니다. 내가 보기에 나는 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내가 보기에 나는 몰락한 집안의 후손입니다.’ 이런 의미이죠.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보시기엔 아닌 것입니다. 네가 네자신을 잘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더 잘안다 는 것입니다. ‘너보다 너를 더 잘아는 내가 너를 특별히 선택했다. 그러니까 가라면 가고 말하라고 할때 말하면 된다’ 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내가 많이 배웠기 때문에 내가 의사나 변호사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내가 많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청소나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내가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총리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게 할 수가 있고, 하급 공무원을 통해서도 메시지를 전하게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총리가 전하면 관심을 가지고 잘 받아들이지만 하급 공무원이 전하면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전하라고 하는 메시지를 전하면 누가 메시지를 전하던 상관없이 그 메시지는 능력이 있습니다, 왜요? 대통령이 전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대통령보다도 더 위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라’ 그럴 때 우리는 가면 됩니다. “거기 머물라‘ 그럴 때 우리는 머물면 됩니다. 그곳이 비록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그곳이 비록 별 볼일 없는 직장이나 가정이라 할지라도 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로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라’ 하시면 이런 저런 눈치를 보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말을 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로서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통로가 하는 일은 그냥 흘러 보내면 되는 것 입니다. 통로가 할 일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흘러 보내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바라옵기는 주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말과 삶을 통해 그대로 전하게 되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