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두가지 질문
<마태복음 8장 23-24절>
23.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 하다가 어려운일을 당하게 되면 크게 두가지 질문을 가지게 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왜 나에게 이런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라는 것이고, 두 번째 질문은 '내가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해왔는데 하나님은 왜 침묵하십니까?'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 두가지가 바로 우리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가지는 가장 많은 질문이라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일어난 사건은 이 두가지 질문이 생길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시간에는 본문에 일어난 사건을 살펴보면서 우리 믿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중에 가지는 두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생각해보 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 첫 번째 질문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고 계십니다. 배를 타고 출발할 당시 갈릴리 바다는 평온하였습니다. 그래서 순조롭게 항해하고 있는데, 항해하던 도중에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납니다. 24절입니다. '24.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여기서 '큰 놀' 은 거대한 파도 풍랑을 의미합니다. 엄청나게 큰 파도가 밀려와서 제자와 예수님이 타고 있던 배를 덮친것입니다. 사실 갈릴리 바다는 바다가 아니라 호수입니다. 길이가 21 km(13마일) 가 되고 넓이가 12 km(7.5마일)가 되는 거대한 호수입니다. 호수인데 왜 바다라고 불리는가하면 바다처럼 크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갑작스런 돌풍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호수는 원래 잔잔하고 큰 바람이 불어도 물결의 높이가 제한되어있는데 이 갈릴리 호수는 갑자기 예기치 않은 돌풍으로 인해 파도가 크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서 '바다' 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한번 파도가 치면 그 높이가 2미터가 넘는다고 하니 바다라고 불리만도 합니다. 이 갈릴리 바다 주변 수면 높이를 기록해놓은 그림을 잠시보시겠습니다. 지금 이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지중해 수면 높이가 0미터라고 한다면 이곳 갈릴리 바다 수면 높이는 -210미터 입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호수 수면 높이가 약 200미터 정도 바다 해변보다 더 낮은 것입니다. 그리고 사해바다는 -397미터 인데 약 400미터가 바다수면보다도 더 낮습니다. 갈릴리 바다 주변을 보게 되면 헬몬 산(2814미터)과 다볼 산(588미터), 길보아 산(502미터) 그리고 에발 산(938미터)과 같은 높은 산들에 둘러싸여있습니다. 그래서 높은 산위에있는 찬 공기가 낮은 계곡을 따라서 빠른 속도로 갈릴리 바다로 내려와 갈릴리 바다 해면에 있는 따뜻한 공기와 만나게 되면 이것이 갑작스런 돌풍이 되어서 큰 파도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에서 일어나는 돌풍의 특징은 갑자기 일어나기 때문에 오랜 경험이 있는 어부도 제대로 예측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바다에서 만나게 되는 풍랑은 바로 우리기 인생을 항해하는 동안 일어나는 예측할수 없는 어려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는것과도 같습니다. 평온하게 지내던 우리 가정에 어느날 갑자기 폭풍이 몰려옵니다. 건강하던 남편이 어느날 갑자기 쓰러집니다. 자녀들에게 갑자기 문제가 생깁니다. 사업이 어느날 갑자기 무너지기도 하고 직장에서 lay off 당하기도 합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코로나 19 인해 이렇게 학교와 교회가 문닫고, 샤핑을 하러갈때도 마스크를 하고 가야 하는 일이 생길줄을 그누구가 생각이나 해봤겠습니까? 그런데 한순간에 이런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어느날 갑자기 내가 이해할수 없고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일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물질적으로 어렵게 되는 풍랑을 만나게 되고,어느날 갑자기 사업의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날 갑자기 질병의 풍랑을 만나게되고, 어느날 갑자기 이해할수 없는 외로움과 고독의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평온하다가도 어느날 갑자기 예기치 않은 풍랑을 만나게 되는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제자들만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다면 우리는 이해 할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그배에 함께 타고 있었는데도 풍랑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불순종해서 배를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더면 그나마 이해가 됩니다, 요나처럼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곳에 가지 않고 불순종해서 다른데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면 징계를 받아 이렇게 풍랑을 만나는 구나 라고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불순종해서 가다가 풍랑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23절 입니다. 23.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제자들이 따랐더니' 먼저 앞에 가신 사람은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뒤를 따라간 것입니다. 본문과 같은 장면이 마가복음 4장 35절이하에도 나옵니다, 마가복음 4장 35절입니다. '35. 그날 저물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순종해서 제자들은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그래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도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곁에 계시고, 나와 동행하시지만 풍랑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 그때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가집니다.
"하나님, 왜 이런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본문을 보시면 이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24절 후반부입니다. 24. ... 예수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풍랑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이모습은 예수님이 지니고 계신 평안이 어떤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갈릴리 바다의 거센 풍랑도 예수님이 지니고 계신 평안을 깨트릴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주님이 지니신 평안은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평안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러한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 말씀을 뒤집어보면 우리에게는 주님이 지니고 계신 그 평안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주셔야만 가질수 있는 평안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가지신 평안은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떠한 풍랑도 깨트리지 못하시는 평안입니다. 왜요?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풍랑도 그분의 평안을 깨트릴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신데 이세상에서 그무엇이 그분의 평안을 깨트릴수 있겠습니까?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은 것이 아니다'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주는 평안은 어떤 것입니까? 세상이 주는 평안은 내 가정이 화목하고, 내 사업이 잘되고, 내 인생에 햇살이 비치고, 내 인생의 항해가 순조롭고 잘나갈 때 누리게 되는 평안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주는 평안입니다. 그러니까 이 평안은 믿지 않는자도 누릴수 있는 평안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인생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는 가운데서도 누릴수 있는 평안입니다. 바울과 실라처럼 인생의 깊은 밤중의 감옥속에서도 노래할수 있는 평안입니다. 이세상 그 어떤 것도 빼앗아 갈수 없는 이 평안을 주님은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이 평안의 복을 누가 누리며 살아갈수 있습니까? 주님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내안에서...' 이 표현을 뒤집어서 생각 해보면 주님밖에 있는 사람은 이 평안을 누릴수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주님의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려면 주님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에도 풍랑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풍랑과 어려움으로 인해 두려워 떨며 살아가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이 주시는 평안의 축복을 우리가 누리며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인생의 밤중을 지나면서도 평강을 맛보기를 원하십니다. 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풍랑이 일어납니까? 그 이유는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알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풍랑속에 있다 할지라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평안을 가져야만 풍랑의 두려움을 이겨낼수 있길 때문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갈릴리 바다위를 걷게 된 베드로입니다. 마태복음 14장을 보시면 베드로는 '내게 오라' 고 말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다물속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물위를 걸게 됩니다. 바닷물이 시멘트처럼 딱딱해져서 베드로가 걸게 된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를 둘러싸고 있던 주변 환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고 큰 파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바다물위를 걷고 있는 베드로가 가진 마음상태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랐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광풍과 파도로 인해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가 바다물위를 걷게 되다니...,' 베드로의 마음은 평강을 넘어선 경이로운 마음으로 바다를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어려움과 두려움의 환경속에 있을때 가져야 하는 질문은 달라져야 합니다. '왜 이런일이 내게 일어납니까?' 가 아니라 '주님이 지니신 평강을 나에게도 주시겠습니까?' 로 바꿔야 합니다. 물론 주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길 믿는 성도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해하고 있고 알고 있는 것과 경험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한국사람들이 왜 대부분 영어를 잘 못합니까? 최소한 중, 고등학교 6년은 영어공부를 해왔는데 왜 미국사람을 만나 한두마디 하면 더이상 대화를 못합니까? 그것은 영어 문장을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을 영어를 할줄 아는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문장을 보면서 이해하고 알게 된다고 하는 것과 영어로 살아가는 것은 다릅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유명한 언어학자인 스티븐 크라센 박사가 한 말입니다. 이 박사님이 미국에 이민온 수많은 사람들을 평생동안 가르치면서 깨닫게 된 진리를 이렇게 짧게 정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이해하는 그것을 영어를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순간 영어는 그 사람에게서 멀어진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영어강사가 영어문장을 가지고 한국말로 분석하고 친절히 설명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런식으로 배우면서 이해하게 된 것을 가지고 곧 자기가 영어를 점점 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이 미국사람을 만나면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것과 경험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이 믿는 자녀에게 평강을 주시길 원하시는 것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다고 넘어가지 마시고 주님에게 한번 질문 해보시길 바랍니다. 진정한 믿음의 성숙은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에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직접 경험해서 알기 위해선 이미 알고 있다 할지라도 구체적으로 먼저 질문해야 합니다. '주님, 정말 주님의 평강을 내게 주실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질문을 하고나면 이 질문에 대한 확신이 오게될 것입니다. 그럴때 보다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평강을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평강의 마음으로 인생의 풍랑을 극복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두 번째 질문
내가 기도해왔는데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 것입니까?
24절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24.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 지라' 본문과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 복음 4장 37절을 보시겠습니다.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큰 광풍으로 인해 바닷물이 배안에 들어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자, 이런 상황이 되었다면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제자들을 도와주셔야 합니다. 주님이 일어나셔서 풍랑이 잠잠해지도록 기도를 해주시던지, 아니면 배안에 들어온 물을 퍼내시든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주무시고 계십니다. 같이 힘을 합해도 문제 해결이 될까 말까한 한 판국에 그냥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보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피곤하셨으면 저렇게 세상을 모르고 주무실까? 잠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조심스럽게 행동하자' 제자들이 이렇게 생각했습니까? 천사라면 그런 생각을 할수 있겠지요. 제자들은 아마 주님께 야속한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여러 성도님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종종 주님께 섭한 마음이 생길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혼자 기도할때 섭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합니다. '주님 이게 뭡니까? 내주변사람들에게 지금 나의 이런 모습을 보여줄려고 저보고 목회자의 길을 걷도록 하셨습니까? 이런 경험을 하라고 저보고 나의 뒤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건 아닌것 같습니다. 저에게 무엇이라도 좀 말씀해 주세요. 주님' 이렇게 하소연 할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도 더이상 참지 못한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자들이 흔들어 깨웁니다. 제생각엔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울때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운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급하기도 하고 섭한 마음도 있는데 점잖게 흔들어 깨웠겠습니까? 막 흔들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욱하는 심정에서 발길로 걷어차면서 흔들어 깨웠을지도 모릅니다. 그순간 제자들이 가진 마음이 바로 우리가 가질수 있는 마음입니다. ‘주님 왜 나에게 침묵을 하십니까? 말씀 해주세요. 내가 이렇게 힘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왜 가만히 계시고 침묵하십니까? 내가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내 기도에 대해서 내 부르짖음에 대해서 침묵을 하십니까? 언제까지 가만히 침묵하시겠습니까?'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주님이 나를 외면하고 주무시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신앙의 초기에는 기도응답이 잘 되었는데, 신앙의 연륜이 깊어갈수록 주님이 침묵하는 기간이 길어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저뿐만아니라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내용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침묵하심을 경험한 것을 알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날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3편 1-2절입니다. 1.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절 중반부 이하를 보시면 '어느때까지 하오며..., 어느때까지 하리이까"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입니다. 골리앗을 물맷돌로 넘어뜨린 사람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내마음에 합한 자라' 라고 칭찬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정말 힘들고 어려운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은 이 다윗의 눈에서 숨으십니다. 침묵하신 것입니다,
욥을 보십시오. 이 욥에 대해 하나님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이와같이 악에서 떠난자가 없다고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이 욥에 대해 사탄에게도 자랑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욥도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욥 23장 8,9절입니다. 8.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모세도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했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나와 미디안 광야에 가서 살아가는 40년동안에 하나님은 모세앞에 한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모세의 나이 80살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모세앞에 나타나십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침묵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던지 로뎀나무 밑에 쓰러져 이렇게 고백합니다. 왕상 19장 4절입니다. 4.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하나님의 침묵하심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면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고 간구하겠습니까?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어떤 목사님이 이 엘리야의 고백을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면 보다 쉽게 이해할수가 있다고 말하신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제 고마 됩시더" 어떤 경우엔 짧은 경상도 말이 더 잘 표현될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셉도,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침묵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이시간 저와 여러분 중에서도 하나님의 침묵하심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길고 짦음의 시간차이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침묵을 모두가 다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구하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르짖음에 침묵할때가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입니까?
세가지가 있는데 이시간엔 간단히 정리해봅니다.
1. 우리가 하나님앞에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당연히 침묵하십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아브라함의 경우가 해당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길 기다리다가 지친 아브라함은 사라의 여종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런데 그날이후 하나님은 13년동안 아브라함앞에서 침묵하십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에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2. 잘못된 것을 구할 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두 세 살이 된 아이가 캔디나 아이스크림 맛을 알게 되면 밥은 안먹고 캔디나 아이스크림만 달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엄마가 밥 대신에 캔디나 아이스크림을 주나요? 안주죠. 자녀가 아무리 달라고 해도 잘못된 것이라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잘못된것을 구할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3.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약해주신것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 침묵하심.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이유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 까지 언약으로 되어진 책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책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5만 4천가지 이상 약속의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많은 언약과 약속을 한마디로 종합해서 말하면 이렇게 요약할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백성이 될것이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구체적인 시작으로 모세와 시내산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리고 성경 마지막 인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 언약이 완성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 인간의 관심은 이땅에서 장수하고 성공하고 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고난가운데 있는 중에도 침묵하십니다. 왜요? 우리를 연단하고 훈련해서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자녀,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침묵하실때가 있습니다.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일이 일어날까' 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헤럴드 쿠쉬너 라는 목사님이 쓰신 책인데 이 목사님에게는 아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빨리 늙게 되는 병에 걸려서 열네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노화로 죽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자기 아들 아론이 자기보다 더 빨리 늙어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부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 책의 말미에 헤럴드 쿠시너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이 고난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더 사려깊고 더 영적으로 깊이가 있고 훨씬 동정심이 많은 목회자로 성장하게 되었다’ 무슨말입니까? 자기 아들로 인한 고난이 결국 자기에게 유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요. 어린아이가 울면 어느 부모가 그냥 침묵하겠습니까? 그 즉시로 부모님은 그아이에게 반응할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어리고 아기일때는 주님이 즉각 응답해주십니다. 깨닫게 해주시고 주변 사람들을 통해 주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이제 성장하고 장성해서는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부르짖는다고 곧바로 응답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이때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이 그만큼 나를 신뢰하고 있구나' 라는 믿음으로 받아들어야 합니다. '아들아 나는 너를 믿는다. 네가 이 고난과 어려움을 통과하게 되면 반드시 정금과 같이 빛난 아들이 될 것이다. 딸아 지금 네가 인생의 풍랑을 만나서 힘들고 어렵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이 풍랑을 이겨낼줄 믿는다 나는 너를 믿는다. 나는 너를 신뢰한다' 이것이 바로 침묵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 입니다. 그러니 지금 하나님의 침묵은 나에 대한 외면이 아닙니다. 등 돌림도 아닙니다. 이런 연단들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기에 일어나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코로나 19 이라는 거센 풍랑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배가 흔들리고 배안에 물이 가득 들어와 우리를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힙니다. 하지만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수 있는 최선의 일은 내곁에 계신 주님을 깨우는 것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인생의 배에 큰 바람이 불어 큰 파도가 일어날때 우리는 두가지 질문을 가질수 있습니다. '왜 이런일이 제게 일어납니까? '하나님은 왜 제게 침묵하십니까? 하지만 주님은 당신 자신이 주시는 그 평강을 가지고 힘들고 두려운 이 환경을 헤처나가시길 원하십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요.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분이, 우리가 바다 저편으로 건너갈때까지 책임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바라옵기는 이세상 그어떤 풍랑도 깨트리지 못하는 주님의 평강을 가지고 지금 내가 만난 풍랑을 극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죽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