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가라지, 쭉정이, 알곡 (1) -추수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Author
kgmcc
Date
2020-08-13 20:10
Views
1200
본문 : 마태복음 13장 24-30절

날짜 : 2020년 8월 13일



 

<마태복음 1324-30>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입니다. ‘밭의 가라지 비유’ 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냥 ‘가라지의 비유’ 라고도 말하기도 합니다. 이 ‘곡식과 가라지 비유’ 의 내용을 이시간 잠시 살펴보면, 어떤 사람이 밭에 나가서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당연히 좋은 씨만 뿌렸겠죠. 나쁜 씨앗을 자기 밭에 뿌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이 뿌린 곡식이 보리인가 아니면 밀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때가 종종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목사님은 보리(Barley) 라고 말하기도하고 또 다른 목사님은 밀(Wheat)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리와 밀은 거의 같은 시기에 뿌리고 또 추수를 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보리를 먼저 추수하고 난뒤, 약 2주후에 밀을 추수하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이 뿌린 씨앗이 밀인가 보리인가 하는 것은 알수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중요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밭주인이 뿌린 씨앗이 밀이냐 아니면 보리이냐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한 곡식을 심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밀과 보리를 일반사람들이 구분하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지금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구분하기가 쉽지 않는데 보리가 밀보다 알맹이 수가 더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가난했던 우리나라에서는 밀보다는 보리를 더 많이 심었습니다. 지금 나이가 많으신 성도님들께서는 어릴적에 밀로 만든 샌드위치나 빵보다는 보리밥을 아주 질리도록 잡수신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주인이 밀이나 보리 곡식을 밭에 뿌렸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원수가 몰래 와서 그 밭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옛날 우리나라는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밤에 몰래 그 집에 가서 불을 질러버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나라는 돌과 흙으로 집을 만들기 때문에 불을 질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그 사람의 밭에 몰래가서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그당시에는 이런 일들이 종종 생겨서 이러한 행위를 처벌하는 법도 생겼다고 합니다. 원수가 뿌린 가라지는 깜부기의 일종인데 다른말로 “독 보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그 알맹이 안에는 독이 있는데 먹으면 배탈이 나게 되고, 심하면 목숨까지 잃게 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이 독보리는 말 그대로 보리나 밀과 너무나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싹이 트고 자라는 동안에는 분간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열매를 맺는 시기가 되면 비로소 그 가라지를 곡식과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종들이 몰랐지만 나중에 결실할때가 되자 비로소 밭에 가라지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라지를 본 종들은 깜짝 놀라 주인에게 달려가 이사실을 알립니다. 종들은 가라지가 밭에 왜 생겨났는지를 몰랐지만 주인은 가라지가 생겨난 이유를 알았습니다. 28절 전반부입니다.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주인은 자기를 미워하는 원수가 밤중에 몰래 밭에 와서 가라지를 뿌린 것을 알았습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묻습니다. 28절 후반부입니다. 28.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님 우리가 밭에 가서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 그때 주인은 종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29절과 30절입니다. 29.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이러한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전체그림으로 보시면 이해하기도 쉽고 오래 기억하실 것 같아 인터넷에 있는 자료를 모아 편집을 해서 이렇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자,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내용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 비유를 설명해달라고 요청합니다. 36절입니다. ”36.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그래서 37절에서 43절까지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강적으로 알고는 계시겠지만 이번기회에 그 의미 하나 하나를 확실히 기억하고 새기기 위해서 제가 질문하고 여러분이 대답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자 여기서 좋은씨를 뿌리는 자는 누구입니까?(37) ‘인자’ 입니다.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밭은 무엇을 가리킵니까?(38) ‘세상’ 을 의미합니다“ 좋은 씨는 누구입니까?(38) ’천국의 아들들‘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세상에 천국의 아들들을 심으셨습니다. 가라지는 누구입니까(38) ’악한자의 아들들’입니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누구입니까?(39) ‘마귀’ 마귀도 이세상에 악한자의 아들들을 심었습니다. 추수때는 언제 입니까(39) ‘세상끝‘ 입니다“ 추수꾼은 누구입니까?(39) ’천사들‘입니다. 가라지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40) ’불에 사르는 것‘ 같이 됩니다. 천사들을 보내시는 분은 누구입니까(41) ’인자‘ 입니다. 가라지들은 어떤자들입니까?(41)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 입니다. 가라지들이 던져질 곳은 어디입니까?(42) ”풀무불“ 다른말로는 ’용광로‘ 인데 지옥의 식지않는 뜨거운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곳에서 가라지들이 보이는 반응은 어떻습니까?(42)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의인들이 갈 곳은 어디입니까?(43) ‘아버지 나라’ 의인들이 받을 영광은 무엇입니까?(43) ‘해와 같이 빛나리라’ 저와 여러분은 해와같이 빛나는 얼굴로 천국에서 영원히 지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43) ‘귀있는 자는 들으라’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래서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제나 듣고 믿음이 성숙되어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예수님께서 해석해주신 이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가 주는 교훈을 함께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얻는 교훈

1. 밭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란다

29절과 30절 입니다. “29.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밭은 이세상을 의미하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언제나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자의 아들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함께 더불어 같은 학교에 다닙니다. 함께 더불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또 함께 더불어 직장에서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악한 자의 아들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 41절을 보시면 가라지는 ‘곡식들을 넘어지게 하고 불법을 행하면서 곡식들을 괴롭히는 일’ 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을 넘어지게 하고 괴롭히는 일을 하는 것이 악한자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최종 목적입니다. 그럴때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저 하나도 쓸데없는 가라지를 왜 세상에 내버려 두십니까? 왜 당장에 처리하시지 않으십니까? 언제까지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그때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다 너희를 위해서니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을 하나라도 다치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래서 추수때 까지 그대로 자라게 두는 것이다” 주인이 왜 가라지를 즉시 뽑아버리지 않습니까? 곡식을 위해서입니다. 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가라지를 수백개 수천개 뽑을 수있다 할지라도, 만에 하나 곡식이 한개라도 다치게 된다면 차라리 그냥 두겠다고 하는 것이 주인의 마음입니다. 가라지 단어를 NIV 영어성경을 보시면 Weeds(잡초) 로 나오고, 킹 제임스 성경이나 NASB 성경에는 Tares(가라지) 로 나옵니다. 아마 NIV성경은 밀을 의미하는 Wheat 단어와 쉽게 대조 되게 하기 위해 잡초를 의미하는 Weeds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생각해봅니다. 채소를 재배해본 경험이 있거나, 집정원에 잔디가 있는 성도님들은 아시겠지만 잡초가 채소나 잔디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자라고 강합니다. 그래서 잡초를 뽑으면 채소나 잔디 뿌리까지 건드리게 되어 채소나 잔디가 상하게 되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한 개의 채소나 곡식이라도 상하지 않게 할려는 주인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가라지를 뽑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어라” 주인이 하신 이 말씀은 악을 조장하고 그 악을 방치하시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선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악인들을 그냥 두는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이 악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더욱 신앙적으로 성숙시키시고, 더욱 믿음을 굳세게 하십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을 넘어뜨리기 위하여 악한자를 심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오히려 신앙적으로 깨어있고 믿음을 굳세게 하십니다. 마치 많은 양 무리속에 염소가 섞여 있으면 양들이 염소의 뿔에 치이지 않기 위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먹은것들이 잘 소화되고 보다 건강하게 자라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가라지와 같은 사람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고 괴로움을 당할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우리는 주님이 다 우리를 위하여 그냥 두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마음에 믿어야 합니다. 나를 더욱 알차고 성숙하게 하기 위한 주님의 깊으신 뜻이 있음을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다음주에 좀더 자세히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바라봉기는 가라지로 인하여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할수 있는 넉넉한 마음으로 생활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얻는 교훈

2. 우리는 추숫꾼이 아니다.

39절입니다.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꾼은 천사들이니” 우리에게는 가라지를 뽑을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가라지를 뽑아내는 행위는 추숫꾼이 해야할 일입니다. 누가복음 9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도중에 어떤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에 잠시 들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 저녁에 그곳에서 주무시길 원하셨는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인 인것을 알고는 자기 마을에서 잠을 자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두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화가나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하늘에서 불을 내려가지고 저놈들을 다 멸망시켜 버리십시다” 그럴때 예수님께서는 이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습니다. 왜요? 야고보와 요한은 추수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야고보와 요한의 눈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마치 가라지처럼 보여도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가라지를 뽑을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들은 추숫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추숫꾼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은 추수때도 아니며, 심판의 때도 아닙니다. 은혜의 때이요 구원의 때입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세상끝이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추수때나 심판날이 다가온 것이지 지금 추수때는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도 이전에는 모두가 다 가라지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팽개 쳐 버리지 아니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지금 내주변에 가라치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분별은 해야 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이단인가는 분별 하며 살아갈 것을 성경은 여러군데서 말씀합니다. 그중에 한구절만 찾아보겠는데 로마서 12장 2절입니다. ‘2.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분별하도록 하라’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판단은 하지 말라고 여러군데서 말씀합니다. 역시 한구절만 찾아봅니다. 고린도전서 4장 5절입니다. ‘5.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이렇게 분별은 해야 하지만 판단은 하지 말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분별과 판단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성경에 나오는 ’판단‘ 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인 ’크리노‘ 혹은 ’카타크리노‘ 로서 법정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법정에서 판사가 내리는 판단 즉 판결을 의미합니다. 판사가 판단(판결)을 하면 그결과로 피고는 무죄나 혹은 유죄가 결정됩니다. 판단(판결)을 하면 그 판결에 따라 자유인이 될수도 있고, 반대로 감옥에 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판사가 내린 판단의 경우는 좀 다르겠지만 일반적인 경우 내가 내린 판단이 틀리면 어떻게 되냐요? 그 결과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또 만약 그사람을 판단했던 내가 똑같이 그 일을 행하면 하나님 앞에서 판단(심판) 받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판단(판결)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판단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바로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판단)후에는 우리는 의인이 아니면. 죄인이라는 판결이 내려지게 되고 그에 따라 천국이 아니면 지옥으로 가야 합니다. 판단은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 마지막날에 ’다시 오실 주님께서 인간이 감추인 것을 다 드러낼것이니까 너희들은 판단하지 말아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반해 분별은 ’도키마조‘ 라는 헬라어로서 ’진짜와 거짓을 구별한다‘ 는 의미가 있습니다.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구별하는 것입니다. 강조되는 것은 구별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선 악과 선, 그리고 거짓과 진실에 대해서는 반드시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 예수님 당시에 세리와 창기들은 사람들 눈에 확실한 가라지 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세금쟁이들과 창녀들은 이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암적인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친구처럼 대하시고, 같이 식사도 하십니다. 그래서 세리와 창기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날마다 예수님 곁으로 모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입니다. ‘1.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서로 수군수군 거립니다. 그다음 2절입니다. 2.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이사람이(예수이죠) 죄인을 영접하고 죄인과 같이 음식을 먹는다’ 이렇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 주변에 모여서 비꼬는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3절입니다. ‘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그리고 그 유명한 세가지 비유의 말씀을 하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길을 잃어버린 양을 찾아 아흔 아흔마리의 양을 두고 길을 나서는 선한 목자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비유는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한 개의 동전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 구석구석을 부지런히 찾는 여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치막으로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물러받은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먼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내면서 물려받은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합니다. 나중에 먹을 것조차 없어서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게되자, 더 이상 견딜수가 없어서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날마다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아버지는 멀리서 자기 아들인 것을 알아보고 뛰어나가 반깁니다. 그리고 아들 손에 새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는 새 신발을 신기고 동네 잔치를 벌립니다. 이 세가지 비유에서 나타나고 있는 공통된 점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은것에 대한 기쁨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은것에 대한 기쁨이 얼마나 큰지 선한 목자나 여인이나 아버지는 모두가 다 온 동네사람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벌립니다. 이러한 비유를 예수님께서는 그당시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비유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당시 창기와 세리와 죄인들은 어떤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그들은 아마도 ‘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집을 나간 자식으로 생각하시는구나.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집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고 계시는 구나’ 이런 감격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당시 창기와 세리들은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가라지의 삶을 청산하고 곡식으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곡식처럼 보였던 사람이 있었는데 실상은 가라지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예수님의 제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가라지이였습니다. 가롯 유다는 가라지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가롯유다의 발도 씻겨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실때도 제일 먼저 가롯 유다에게 떡을 떼어 주십니다. 그날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븥잡을 무리들을 뒤에 몰래 숨기고 예수께 나아가 입맞춤을 하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향하여 “친구여” 라고 불러 주십니다. 가롯 유다가 명백하게 가라지임이 드러나게 되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고통속에서 죽어가시는 그 순간에도 가라지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십니다. “34.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장 34절) ‘아버지 하나님, 만일 저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면 제게 이렇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라지 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보여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도 가질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가라지와 곡식은 태생부터가 다릅니다. 곡식 종자와 가라지 종자는 출발이 전혀 다릅니다. 좋은 곡식은 주님이 뿌리셨고 가라지는 마귀가 뿌렸습니다. 그럼으로 가라지가 절대로 곡식이 될수 없고 곡식이 가라지가 될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가 가라지인지 누가 곡식인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권한은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가라지 처럼 보여도 주님의 눈에는 하나님 아버지 품에 돌아올 곡식일수도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쉽게 정죄하고 판단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물론 내 믿음의 올바른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분별은 해야 합니다. 정의와 불의, 진리와 비진리, 그리고 진짜와 가짜는 구별해야 합니다. 바라옵기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의 이 마음을 품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라지 비유에서 얻을수 있는 교훈

3. 추수할 때가 있다

40절입니다.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추수 할 그날은 심판의 날이요 세상 끝날 입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결정적으로 분리가 되는 날입니다. 성경에서 심판은 분리, 나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삶과 죽음도 분리입니다. 양과 염소의 분리. 주님의 좌편과 주님의 우편으로의 분리,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의 분리, 심판은 가르기, 분리입니다. 그리고 나의 이 육신과 나의 영이 분리 되는 것이 바로 이 육신의 죽음입니다. 이 육신과 영이 분리가 되는것이 육적인 죽임이라면 나의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때가 바로 영적인 죽음입니다. 내 영이 하나님과 같이 있게 되면 영생이요 천국입니다. 그런데 내 영이 하나님과 같이 있지 못하고 분리되어 떨어지게 되면 영적인 죽음이요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이 육신이 살아있어도 내 영이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으면 내 육신은 살아있다 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에 심판할때가 있다고 이 비유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섰을 때 이세상에서 지냈던 삶에 대해서 반드시 회계(계산)하는 과정이 있음을 예수님은 여러가지 비유에서 알려주십니다. 염소와 양의 비유,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의 비유, 달란트 비유, 악한 농부의 비유, 열처녀의 비유 등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대부분 내용을 보시면 하나님앞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대해 계산하는 과정이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심판의 날을 대비하며 하루하루 살아야 합니다. 이 육신은 장막이고 껍데기입니다. 이 육신속에 있는 내 이 영이 진정한 나입니다. 이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이 육신은 부모님으로부터 왔지만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나의 이 영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내 구세주로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받습니다. 구원은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선 다움주에 더 자세히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가라지의 비유에서 추수할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추수할 때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이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 날은 심판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 될것입니다.

그럼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곡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곡식이라면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가라지라 할지라도 나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곡식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알곡이고 다른 하나는 쭉정이입니다. 그렇다면 알곡과 쭉정이는 무엇이 다릅니까? 그리고 또 우리는 쭉정이와 가라지에 대해서도 종종 혼동합니다. 쭉정이와 가라지는 전혀 다릅니다. 쭉정이와 가라지는 어떻게 서로 어떻게 다릅니까? 알곡과 쭉정이 그리고 쭉정이와 가라지는 또 어떻게 다릅니까? 그리고 또 그들이 가게 되는 최종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그럼 다음주 이시간에...,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