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곡의 삶(3) 흔들리지 말라
<사도행전 8장 1-8절>
1.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우리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견디기 힘든 슬픔의 종류가 크게 세가지가 있다고 심리학자들이 말합니다. 첫째는 죽음이고 둘째는 이별 그리고 세번째로는 고독이라고 합니다. 죽음 이별 그리고 고독 이 세가지가 우리 인생이 경험하는 것 중에서 가장 큰 슬픔이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나오는 8장은 이 세가지 유형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죽음과 이별 그리고 고독의 사건이 다 나옵니다. 그리고 이러한 큰 슬픔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에 나오는 세가지 종류의 아픔을 먼저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선하신 뜻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아픔이 있어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됨으로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갈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은 첫째로 죽음에 대한 아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 전반부입니다.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여기서 그는 누구입니까? 스데반이죠. 2절입니다. “2.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그당시 스데반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장 믿음이 있고 충성스러운 평신도 지도자 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입장에서 볼때 이 스데반 집사의 죽음은 참으로 큰 슬픔이요 큰 손실이었습니다. 그동안 스데반 집사가 해왔던 섬김과 봉사의 일을 대신해줄 지도자를 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교회가 평강가운데 있어도 섬김과 봉사에 힘쓰는 일꾼을 구하기 쉽지 않은데 이제 박해와 핍박이 시작되는 상황에서 스데반의 자리를 대신할 일꾼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8장 다음에 나오는 9장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십니까? 이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기던 사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시키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가 있었던 자리는 그보다 더 위대하고 더 놀라운 헌신을 하게 되는 바울이 대신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스데반의 죽음을 헛된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오늘 날의 바울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은 스데반의 죽음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일차 이차 삼차 전도여행을 하는 동안에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포기를 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도 감정을 가진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그럴때마다 이 바울은 그옛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 가던 그 날 그 현장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수없이 날아오는 돌맹이를 맞으면서 죽어가던 스데반을 보면서 그래 저놈은 저렇게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한놈이야! 라고 의기 양양했던 그때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바울은 다시 죄인의 심정이 되어 예수님을 전하는 믿음의 길을 계속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스데반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저는 종종 이 목회자의 길이 힘들고 어려울때마다 제 어머님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28년전 제 어머님의 시신을 땅에 묻고 집에 돌아오던 도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어머니께서는 하늘에서 나를 보고 계시겠구나!’ 이전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면서 나자신이 부끄러운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머니를 속상하게 하고, 어머니를 속이고 거짓말 했던 그 모든 일을 이제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서 다 알고 계시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니까 너무 부끄러운 생각에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당시 새벽마다 어머니께서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던 모습도 생각났습니다. 그이후 한동안은 제 인생이 힘들고 고통스러울때마다 저는 어머니 시신을 땅속에 묻고 돌아온 그날 가졌던 부끄러운 마음을 생각하면서 제 마음을 새롭게 했습니다. 제 아버님도 어머님의 시신을 묻고 돌아오던 그날 ‘나도 이제부턴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겠다’ 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 믿음의 고백을 하신 이후 아버님은 교회에 다니시면서 침례도 받고 집사 직분도 받으시면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 품안에 안겼지만 어머님과 함께 주님을 찬양하고 계실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어머님의 죽음은 적어도 저와 아버님에게 귀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래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은 우리에게 아픔을 주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해주는것입니다.
본문은 두 번째로 이별에 대한 아픔을 보여줍니다.
1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1.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흩어지니라.'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그날 예루살렘에는 큰 박해와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신앙생활을 같이 했던 사람들과 뿔뿔이 흩어져 헤어져야 했습니다. 이것은 아픔이요 슬픔입니다. 하지만 흩어진 결과 어떻게 됩니까? 4절입니다. “4.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박해와 핍박 때문에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복음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하셨던 사역들이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시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모인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증인이 되리라.’ 하지만 그들은 그다음 장인 2장에 나오는 오순절날 성령 충만함을 받고도 흩어지지 않습니다. 왜요? 헤어지기 싫어서입니다. 정들었던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아픔이요 슬픔입니다. 그런데 박해를 받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할수 없이 흩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흩어져 유대와 사마리아로 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정들었던 사람들과의 이별의 아픔이 어찌 의미가 없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새로운 직장을 찾아, 또 어떤 사람은 새로운 사업을 위해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저처럼 목회지를 찾아 정든 고향과 정든 가족과 헤어져야 하는 이별의 아픔이 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별의 아픔이 의미가 있기 위해선 주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져야 함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배웁니다.
본문은 세 번 째로 고독에 대한 아픔을 보여줍니다.
5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5.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이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아닌 집사 빌립입니다, 이 빌립집사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 일곱 집사를 세울때 기름부음을 받고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빌립집사가 사마리아 땅에서 예수님을 증거할때 치유와 능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빌립을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 26절 이하를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이 빌립을 광야의 길로 내보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일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을 사람이 없는 외진 곳으로 좌천 시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빌립은 사마리아 지역에서 큰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다. 일을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빌립집사를 사람이 없는 광야로 갑자기 옮기게 하신 것입니다. 전도자는 사람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사람이 하나도 없는 광야에 가서 무엇을 할수 있겠습니까? 아마 빌립은 사람이 없는 광야에서 굉장히 허전함과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빌립에게는 이런 고독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그 광야에서 한 사람을 만납니다. 바로 에디오피아 내시입니다. 내시이지만 에디오피아의 모든 국고를 맡은 자로서 재무부 장관 쯤 되는 큰 권세가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이 내시를 만나 예수님을 전하게 되었고 이 내시는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 내시는 자기 조국인 에디오피아로 돌아갑니다. 스크린에 나온 지도를 보시면 굉장히 먼 거리입니다. 그리고 이 내시로 인하여 아프리카 대륙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프리카 대륙에 살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빌립에게 고독한 인생길을 허락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빌립이 가진 고독은 참을 만한 가치가 있는것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직장생활이나 사업을 하시다가 어떤 외로움이나 고독을 경험하실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일을 하시다가도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낄수 있습니다. 평상시에 나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외롭고 고독하게 신앙생활을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빌립과 같은 계획을 우리에게도 주셨다면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내 이 외로움 내 이 고독함은 이겨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오늘 본문의 내용중에는 죽음과 이별 그리고 고독의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보면 아픔이요 슬픔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죽음과 이별 그리고 고독의 아픔을 통해서 선한 결과로 이끌어 내십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의 선한 결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첫째로 고난 속에서도 포기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 만일 초대교회 성도들이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두려워 한 나머지 포기할수도 있습니다. “야, 저렇게 성령충만하고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일을 한 스데반 집사도 비참하게 돌맹이에 맞아 죽었다면 우리에겐 소망이 없다. 이런 하나님 안믿는 것이 더 낫겠다. 교회 다니는 것 집어치우고 고향에 가서 농사나 짓고 살자” 초대교회성도들이 이렇게 생각을 하고 행동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또 예루살렘에서 박해가 일어났을때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도망가면서 이제는 다 끝났다라고 생각을 하고 포기를 해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래요 “고난의 최대의 적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닙니다. 포기할려고 하는 유혹이 고난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적입니다” 실패는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포기는 안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예화를 들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독일 히틀러 시대때 유태인으로서 유명한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가 독일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 빅터 프랭클 박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인생을 포기한 순서대로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건강상태나 고문을 받은 휴유증의 상태에 따라 죽는 것이 아니라 삶을 포기하는 순서대로 죽어가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에 이 빅터 프랭클 박사는 자기가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 라는 제목의 책에서 '사람은 인생을 포기하는 순서대로 죽어간다‘ 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십시오. 어느날 갑자기 저와 여러분앞에 먹구름이 닥치고 폭풍우가 쏟아진다 할지라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인생의 비극은 고난이나 실패 때문이 아니라 포기할 때 일어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죽고 정든 고향땅에서 쫓겨나게 되어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대한 역사를 볼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교회나 가정이 힘들고 외롭고 고통스럽다해도 절대로 포기 해서는 안됩니다.
둘째로 고난을 그대로 받아들일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초대 교회 성도들의 입에서 원망이나 불평을 하는 모습을 찾아 볼수 없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진 그들은 이 모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살다보면 이럴수도 있는거야 인생이 다 이런 거지뭐 그러니까 저 하늘나라가 필요한 것이고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신 것이야’ 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고난은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그다음에는 무엇이든지 하기가 쉬워집니다. 평상시에 너무 하기가 힘들었던 일들을 쉽게 할 수가 있습니다. 왜요? 그일을 하는 것이 고난보다는 더 쉬우니까요. 고난을 받아들이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아주 쉽게 하게 되어집니다. 암분야에서는 미국 최고의 권위자중의 한사람이라고 할수 있는 김의신 박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1991년과 1994년 두 번씩이나 미국 최고 의사로 뽑혔습니다. 지금은 미국 대표적인 암 전문 병원 MD 앤더슨 암센터의 종신 교수로 계십니다. 그런데 이분이 한국에 방문해서 강연할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암이 치유하게 되는 기적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이 일어나는 시작은 암 치유 방법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마음의 차이에 있습니다. 환자 자신이 자기에게 생긴 암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새롭게 해석을 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환자들에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암 덩어리가 없어질때도 있지만 암 덩어리가 그냥 있는데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오래 살아가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고난을 허용하신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 고난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 고난속에서도 승리의 삶을 살아갈수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 19으로 인해 온 주변이 고통과 어려움속에 있습니다. 현재 저와 여러분에게 닥친 이 어려움과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십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고난을 주신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를 보게 될것입니다.
셋째로 고난속에서 내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자,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졌던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거기에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박해와 핍박이 일어나서 할수 없이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지역에 와서 지내고 있으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이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아니 당신들은 그렇게 평상시에 싫어하고 미워하는 이 사마리아 땅에 와 있습니까?” 그 질문에 유대인들이 자연스럽게 할수 있는 대답은 아마 이런 종류의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대한 큰 박해와 핍박이 일어나서 이곳으로 도망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에 대해서 물어보았을 것이고 자연히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까 이전에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아 그래 맞아 예전에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성령 충만을 받게 되면 유대와 사마리아 땅에 가서 나의 증인이 될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지. 그러니까 이제 보니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에 지금 순종을 하고 있네” 이러한 깨닫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비로소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더 열심을 내어서 성령 충만 받기를 기도했을 것이고 권능을 받아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좀전에 말씀드렸던 빅터 프랭클 박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난 때문에 포기를 한사람들에게는 고난은 저주이고 비극이다. 하지만 고난속에서도 그 고난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에게는 그 고난은 놀라운 축복이 될 수가 있다“ 이런 말을 한 이 빅터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수용소 속에서 자기가 이런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할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여기에서 살아나가게 되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신들이 누리고 있는 그 삶이 그자유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전파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 한마디를 내가 실감 있게 훗날에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지금 이 수용소에 와 있다“ 라는 의미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용소에 있게 된 의미를 발견한 이 빅터 프랭클 박사는 깨진 유리병을 가지고 아침마다 깨끗하게 면도를 합니다. 그 당시 독일군 병사들은 날마다 개스실과 실험실로 데려갈 유태인들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고난속에서 이 의미를 발견한 이 빅터 프랭클 박사는 계속 제외시킵니다. 깨끗하게 면도를 하고 있는 사람을 실험실에서 먼저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것이었죠. 그래서 이 빅터 프랭클 박사는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몇 명 되지 않는 생존자중에 한사람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이 빅터 프랭클 박사는 훗날에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런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상황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를 발견하면 우리는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수 있습니다“
그래요 지금 저와 여러분의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어떻습니까? 아니 지금은 괜찮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사랑하던 사람과 영원한 이별의 아픔을 경험할수 있습니다. 연약한 건강 때문에 가난한 물질 때문에 그리고 틀어진 인간관계 때문에 아픔과 고통을 경험하며 살아갈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모양의 외로움과 고독한 인생길을 걸어가게 될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이 아픔과 이 슬픔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셨다면 이일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냥 단순히 눈물 흘리고, 넘어지고 망하라고 이 아픔, 이 슬픔을 허용하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하시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십가가에서 내려와 자기를 조롱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심판하실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고통을 인내하시면서 죽어갔습니다. 왜요? 그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죽는 것이 예수님께서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두려움과 이별의 아픔이 있었지만 그일을 받아야 할 의미를 알고 계셨기에 참고 그일을 하실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온 인류가 살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 갈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지금 나에게 아픔과 고통과 외로움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참고 견딜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포기 하지 마십시다. 절망하지 마십시다. 코로나 19이 활개를 치고 있고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에 연약한 환경에 있다 할지라도 내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십시다. 그렇다면 이 아픔의 현장은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기적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쭉정이와 알곡을 나누기 위해서 주님은 키를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쭉정이와 알곡을 키에 담아 위, 아래로 흔드십니다. 쭉정이와 알곡은 주님이 키를 두손으로 잡으시고 위, 아래로 흔드실때에 갈라집니다. 쭉정이와 알곡이 위로 솟구치게 될 때 닥치게 되는 바람으로 인해 쭉정이는 키 밖으로 떨어지고 알곡은 안으로 들어옵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죽고, 사랑했던 가족과의 이별을 통해 외로움과 고독한 인생을 경험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이는 주님이 키를 드시고 위아래로 흔드시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럴수록 알곡인 우리는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내 의지가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해주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픔과 고통속에서라도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과 같이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불어오는 모든 종류의 바람을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하심이 있다고 믿고 담대하게 살아가심으로 주님과 함께 하시는 축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