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실패와 회복

Author
kgmcc
Date
2020-11-07 22:41
Views
670
본문 : 창세기 12장 10-20절

날짜 : 2020년 11월 8일



 

<창세기 12장 10-20절>

10.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14.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16.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17.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8.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19.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20.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우주비행사를 선발할 때 대부분의 경우와 같이 먼저 그사람의 경력과 배경을 보고 1단계 심사를 합니다. 그리고 2단계로 아주 특이한 심사가 이어지는데 위기나 실패를 겪어본일이 있으면 그 일을 적고 그일에서 헤쳐나온 과정을 적어보라고 하는 심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큰 위기나 실패가 없는 우주비행사 후보는 이 단계에서 실격시키고 실패를 경험하고 그 실패를 극복한 후보자만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실패를 극복한 사람만이 우주여행 중에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위기 상황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갑작스런 위기상황을 만날때 결국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운 더 큰 실패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성공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쓰러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는 데 있다‘ 고 할수 있습니다.

실패와 실수는 누구나 할 수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실수와 실패는 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하지 말아야 할 실수와 실패가 있습니다. 그것은 포기입니다. 실수와 실패는 괜찮지만 포기는 안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포기는 절대 없어야 합니다. 해서는 안될 실수와 실패는 포기입니다. 포기 하지 않는다면 실수와 실패 속에서도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행한 실패의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실패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행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10절입니다. "10.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땅에 기근이 있었고 그래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본문의 말씀이 시작 되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하는데 비가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농사를 망치게 되고 결국 먹고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치고 이러한 경제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경제적인 어려움이 나에게 다가올때 내가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이 문제에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아브라함을 ‘실패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실패를 했지만 그 실패에서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더 성숙하고 더 성장할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경제적인 문제가 일어났을때 아브라함이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 무엇이었는가? 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경제적인 문제가 생기게 될때 아브라함과 같은 실패를 하지 않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될 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이 행한 실패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첫째로 나의 삶의 자리를 쉽게 옮기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10절입니다. 10.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아브라함이 살던 땅에 기근이 있어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다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지나치게 비난을 해서는 안됩니다. 애굽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사람이 그럴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 사연과 그 배경은 먹고 살기 위해서 내려간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신앙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사건이 되었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 앞에 있는 창세기 12장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올 때에 아브라함이 무엇을 따라왔다고 그랬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란에서 가나안땅까지 약 500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왔습니다. 500마일이면 여기서 워싱턴 DC 백악관까지의 거리가 약 400마일 이니까 그보다도 더 먼 거리입니다. 차도 없는 그당시 상황에서 많은 식구들과 가축들을 데리고 이동하기엔 굉장히 멀고 힘든 여정입니다. 그 힘든 여정의 길에 대해 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5.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마침내 가나안땅에 들어갔더라‘ ’마침내‘ 이것은 그만큼 아브라함에게는 힘들고 긴 여행길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마침내 아브람이 가나안 땅 세겜 지역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십니다. 7절입니다. "7.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내가 이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온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땅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려움이 생기고 기근이 생기게 되자 쉽게 포기를 하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 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도피라고 할수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피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내 앞에 어떤 장애물이 생기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기 보다는 그 장애물에서 도피할려고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리고 도피할수 있는 이유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이 땅에 살기를 원하신다면 나에게 왜 이러한 어려움을 주시는 것인가?’ 라고 아브라함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뜻은 저쪽 아래인 애굽 땅일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그 지역에는 어떠한 가뭄에도 견딜수가 있는 나일강이 있으니까요.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몇 개의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는데 그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믿는 성도들을 축복하시기 때문에 내가 언제나 잘되어야만 한다고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33.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그래요 내가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제자라 할지라도 이 땅을 살아갈 때에 환란은 있을 수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할수있는 방법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어려움이 생기게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땅에도 가뭄이 생기고 흉년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피해야 합니까? 자리를 옮겨야 합니까? 단순히 ‘힘들고 어렵다‘ 라는 그 사실 때문에 쉽게 옮길려고 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한 첫 번째 실수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내게 어려움이 온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내 인생의 삶의 자리를 옮기는 실수까지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인생 삶의 자리를 너무 쉽게 옮기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닙니다. 모양만 바뀐 또 다른 문제가 거기에도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문제와 부딪쳐야 합니다. 비록 내게 아픔과 상처가 있다 할지라도 부딪쳐야 합니다. 상처가 없는 성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픔이 없는 성숙은 없습니다. 어려움이 닥쳐올때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는 너무 쉽게 옮기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이 행한 실패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두 번째로 사람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12절과 13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내인 사라에게 하는 말이죠. 12.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사람은 처음에 바른길로 가지 못하고 한번 어긋난 길로 가기 시작을 하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생기게 되면 그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일단 그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내 사고와 내 판단이 마비되어지고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됩니다. 인생의 방향이 막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매사에 소신 있고 당당하게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바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먹고 살아가는일에 문제가 생기게 되자 자기가 있어야 그 삶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형태의 문제가 아브라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자기 아내 사라가 예뻤던 모양입니다. 이 낯선땅에서 누가 내 아내를 빼앗기 위해서 나를 해치지는 않을까라고 하는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을 하죠. 여보 누가 당신에게 나와 어떤 관계이냐라고 묻거든 오누이 사이라고 그래.” “아내가 누이가 된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원래 오누이 관계이었습니다. 같은 아버지이지만 엄마가 다른 이복누이입니다. 하지만 결혼을 한 지금은 아내이지 누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왜 그랬습니까?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내게 보이는 환경과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아브라함과 같은 실수를 나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잠언서 29장 25절입니다. "25.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여기서 올무는 함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요. 아브라함이 사람을 두려워하다 보니까 이런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 성경은 잠언 1장 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잠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지식의 근본이란 말은 '지식중의 지식' 이라는 말입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어느정도 담대하게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왜요? 남이 모르는 지식이 내게 있기 때문에 자신있게 생활해 나갈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영어를 못하는 사람보다 좀 더 자신있게 이 미국땅에서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영어에 대한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사람이 러시아에서 생활을 하게 되면 남 눈치 보기에 바쁩니다. 자신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왜요? 러시아말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게 지식이 있고 없고에 따라 살아가는 나의 마음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지식중의 지식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입니다. 여기서 경외하는 것은 두려워하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식이 내게 있으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내가 두려워하는 지식만 있으면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딴 지식보다도 더 위대한 지식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생기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때 일어납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고 환경을 두려워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두려워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사람이나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사람이나 환경을 보고 두려워하게 되어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하신 설교중에서 이런 말을 하시는 것을 듣었던 적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미가 신약에서는 사랑하는 것으로 바뀌어졌다’ 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 보다는 사랑하는 것이 더 적극적이고 더 마음에 와닿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때 그 당시 카톨릭 교회와의 싸움은 마치 다윗과 골리앗 싸움과 같았습니다. 그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보름스에 있는 재판정에 나오라고 하는 소환장을 루터에게 보냅니다. 그때 마틴 루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 재판정에 가지 말라고 루터를 말렸습니다. 가면 당신은 죽습니다. 재판정에 나타나면 당신의 인생은 끝입니다. 가지마세요재판정이 열리는 그전날 밤에 루터는 결사적으로 하나님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밤에 루터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이튿날 아침에 자기를 말리기 위해서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보름스로 가겠습니다. 그래서 저 보름스의 재판정위에 있는 기왓장 보다도 더 많은 숫자의 마귀들이 나를 기다린다고 할지라도 나는 가서 싸울것입니다.” 이렇게 그당시에 말리는 사람을 뿌리치고 루터는 그 재판정에 갑니다. 그리고 루터를 보면서 이단의 교리를 시인하고 잘못을 인정하라 라고 말하는 재판장을 향하여 이렇게 말을 합니다. 재판장님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만 매여 있습니다. 나는 다르게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이 불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왜 사람이 두려워지게 됩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이 인생 너머 저 건너편의 주인이 되시고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의 실패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마지막 세 번째로 제단 쌓기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오고 인생의 시련이 올 때 우리는 제단 쌓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를 드리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자, 아브라함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아브라함이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자기 아내 사라를 바로왕이 데리고 갈때 아브라함이 기도를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다는 내용이 본문에는 없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정말 기도가 필요한 순간에 아브라함이 기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말 기도가 필요할 때 기도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 19사태로 인해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모든 영역에서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로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건강문제와 경제문제에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저와 여러분이 믿는 성도로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주님께 제단을 쌓는 일입니다. 주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전과 달리 교회에서 자유롭게 제단을 쌓을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성도들은 저마다 가정에서 제단을 쌓고 하루 일과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하지 못하고 염려 걱정만 합니다. 교회에서 제단을 쌓지 못한다고 걱정스런 말만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이 보여주고 있는 행동을 오늘날에도 수많은 성도들이 행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프리카에 secretary bird 라고 하는 새가 있습니다. 세크테리이니까 비서이고 bird이니까 새인데 그래서 한국말로는 비서새라로 부릅니다. Secretary bird 이 비서새는 아주 이상한 새입니다. 평소에는 아주 잘 날아다닙니다. 그런데 외부로부터 무엇인가 위험을 느끼게 되면 그만 날지를 못하고 땅을 기어다닌다고 해요. 평상시에 잘 날아다니다가 위험에 처해서 있는 힘을 다해 날아가야 할때는 날지 못하고 기어다닙니다. 그래서 이 세크테리 버드는 뱀이나 들짐승에게 잡혀서 죽는 경우가 더 많은 좀 이상한 새입니다. 날아야 할 때 날지 못하는 새. 이 새의 모습이 바로 기도가 필요할 때 기도를 하지 못 하는 우리의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 기도가 필요한 시간인데 기도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어느때보다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예배를 드리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이 어느때보다 저와 여러분이 기도해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매일 아침에 기도하신 분은 아침과 저녁에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매일 기도하지 않았던 분은 매일 아침에 기도를 하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다시 제단을 쌓게 되는 줄 아십니까. 이 사건이 다 끝나고 난 다음입니다. 이 본문 다음장인 창세기 13장 1절입니다. "1.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이제 아브라함이 애굽을 떠나서 식구들과 같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바로왕이 네 아내와 모든 소유를 가지고 나가라고 해서 가게 된거죠. 그 다음에 3절과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4.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옛날에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던 가나안 땅 벧엘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애굽 땅에 있을 때 그는 하나님을 부르지 못했습니다.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예배가 없었습니다. 예배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고 찬양이 필요한 시간에 그는 완전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형편없는 아브라함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을 보호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이 행한 실수와 실패를 교훈삼아 새롭게 신앙생활을 해나가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한 실수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래서 가나안땅에 돌아온 아브라함은 다시 예배를 드리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조카 롯과도 헤어지게 됩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서야 온전히 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롯과 헤어질때도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할수 있도록 아브라함은 양보를 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라함의 달라진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카롯은 보이는 좋은 환경인 소돔과 고모라 도시를 선택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선택합니다. 이제는 변하고 성숙해진 아브라함의 모습을 우리는 볼수 있습니다.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서 흉년과 어려움을 허용하실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역시 아브라함처럼 실수와 실패를 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않고 사람이나 문제를 두려워할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생활을 소홀히 할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모양의 실패와 실수를 할수도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아브라함은 이전의 옛날자리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옛날처럼 똑같이 예배를 드리는 생활을 해나갑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신앙은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도레미파솔라도도 같은 음악계명의 이름이었지만 이제는 이전보다 한옥타브가 높은 도레미파솔라시도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같은 도이지만 한오타브가 높은 ‘도‘ 로 시작한 것입니다. 조카 롯과 헤어질 때 조카롯은 보이는 것을 택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할 때 그명령에 순종을 함으로서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그래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실수와 실패를 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가 필요하고 에배가 필요할 때 믿음의 생활을 소홀히 할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여 믿음의 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는 우리가 지은 어떠한 잘못과 실수도 다 사해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실수와 실패가 있다 할지라도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보다 한 옥타브가 높은 신앙 생활할수 있도록 축복해주실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아브라함처럼 실수와 실패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해나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